십팔사략에 기록된 한 고조 '유방'은 그의 먼 후손 '유비'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고우영 작가에게 아마도 그렇게 해석되었는지 모른다. 고우영 십팔사략에 유방의 장점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했다. '화'를 내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다. 그리고 받을까 말까를 결정한다. 이 점 유비도 비슷하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고우영 삼국지에서 유비는 '귀가 큰' 사람으로 나온다. 잘 듣는다는 의미다. 화를 안내는 것이 유방과 비슷하다.
'한나라' 유씨의 특징이었을까. 이 넓은 '아량' 덕분으로 글자 그대로 '면 단위' 벼슬에 머물러 있던 유방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 그 중 '역사'에 기록된 세 인물이 있으니 바로, 장량과 소하 그리고 한신이다. 후방의 근거지를 관리하면서 군량을 대고 군사를 길러 보급을 담당하는데 소하만한 인물이 없다고 유방이 칭찬했다. 마찬가지로 천리 먼곳에 떨어져 '장막'안에 기거하며 작전을 수립하고 펼쳐나가 승리를 이끌어 내는데 장량만한 인재가 없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한신'에 대하여는 안 그랬다. 대신, 감정을 가졌거나 '라이벌' 의식을 느꼈거나 그랬을 법 하다.
아니, 여기에 이르르면, 유방과 유비의 차이가 나타나게 된다. 바로, 대업을 이룩하고 나서의 '태도'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유방의 '화 안내고 통큰' 도량이 일단 대업을 이룩하고 나니 바뀌어 버렸다. 그의 핵심 참모진과 장군들을 하나씩 둘씩 제거했다. 가장 큰 원인은 '여태후'였다. 그러니까, 대업을 이룩하는 과정속에서, 유방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하늘 위에 '청룡'의 이미지를 보게 되어 끊기지 않고 보급을 담당했던 여태후가, 일단 대업을 이룩하자 글자 그대로 '전제자'로 권력을 배후에서 휘두르게 된 것이다. 물론 유방이 죽고 나서는 아예 '여태후'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휘두르면서 '여씨 천하'를 이룩하게 된다.
유비의 경우는 그의 핵심 전략가 '제갈 양'에게 '양위'의 뜻까지 비칠 정도로 '진정'어리게 어진 사람이었다. 귀 크고 남의 말 잘 듣고 끝까지 기다리고 '거저' 아무것이나 주워먹지 않으면서 그야말로 어진 '군주'의 이미지에 부합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물론 '소설'적으로 각색되었을 것이다. 십팔사략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에 가까우니 좀 더 사실적일 것이다. 십팔사략에서 유방과 유비는 이렇게 다르다. 유비는 자신의 장군과 참모중에서 단 한 사람도 죽이거나 제거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봉추선생 방통은 작전중에 전사했는데, '말'이 놀라서 쓰러지자 유비가 자신의 백마를 내줬기 때문에 '낙봉파'에서 '유비'로 오해 받아서 집중 화살 사격에 죽었다. 주군을 대신해 죽은 셈이다. 제갈양은 단 한번 유비의 뜻을 거슬렸었는데, 바로, 오나라와의 연합을 깨는 '관우' 보복전쟁이었다. 이런 종류의 전쟁이 승리를 이끌 리 만무했다. 허나, 유비와 장비, 관우의 관계를 잘 아는 제갈양은 결사 반대가 불가했다. 바로 이때가 단 한번, 군사와 주군이 의견 불일치 시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유비의 '보복' 전쟁 군대의 군사는 '법정'이 맡았다고 한다. 나중에 패전하고 돌아와 죽음에 임박한 유비가 제갈양에게 사과하면서 '양위' 의사를 물었던 것이다. 그래서 삼국지는 이런 곳에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제갈양이 양위를 거절한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번의 '출사표'는 심금을 울리는 명문이었다. 그 스스로 제위를 탐내거나 하지 않으면서도, 나라 전체를 이끌어 나간 사람이 제갈양이었으니 정말 대단하다. 그의 주군 유비가 너무도 통큰 사람이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유비 진영에서는 결국 위나라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고 말지만 단 한 사람도 대업을 이룩한 이후 숙청되거나 제거되지 않았다.
허나 유방은, 그의 손아래 동서 번쾌까지 죽이려 했다. 번쾌가 형집행을 위해 압송되던 도중 유방이 죽었기에 집행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장량과 소하, 한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순서가 왔다. 가장 결정적인 제거는 한신이었다. 한신때문에 '토사구팽'이 나온 것이다. 유방이 한신을 죽이지 않았다면 토사구팽의 전설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십팔사략과 같은 중국의 역사서에는 '묘미'가 있다. 한신의 참모였던 괴철은 그에게 '솔밭 정'자 삼정립 구도를 제안했다. 그것이 아니면 살아날 길 없다는 얘기도 했을 것이다. 유방이 한신을 죽이게 된 것은 여태후의 배경도 있었지만 아마 이런 이유때문이었을 것이다. 제나라 왕으로 있을때 유방이 '출사'를 명령했지만 응하지 않은 전력이 결정적이었다. 따라서 유방이 한신을 제거하게 된 것은 일종의 필연과도 같다. 언제든 한신이 마음만 먹으면 제나라를 근거지로 '독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장량이 전략가였고 실병력을 지휘하는 장군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사실 장량은 항우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에서 '뒷 공작'을 감당하게 되었고 유방군의 '군사' 역할은 실질적으로 종식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군사'의 자리를 한신이 맡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한신은 요컨대 삼국지의 '주유'와 비슷한 인물이었다. 장량과 더불어 전략가적 면모를 가지고 있어서 유방의 후손 유비가 다시금 근거지로 삼게 되는 '촉'으로 들어와서 잔도를 불태워 버리는 전략 행위의 의미를 꿰뚫어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한신에게는 별도의 '책사' 혹은 '군사'가 불필요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100만 대군도 가볍게 지휘하는 출중한 역량이었다. 사실 '토사구팽'의 원인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유방이 한신에게 질문했다. 그대가 볼때 나는 어느정도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오? 10만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대는 대체 얼마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소? 많을 수록 좋습니다. 10만과 다다익선이라는이 '대답'이 크게 비정치적이었고 비외교적이었다. 이런 '자만심'의 드러냄도 토사구팽에 한 몫한 것이다. 다음 질문과 대답으로도 앞의 감정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럼 그런 내가 그대를 수하로 거느리는 까닭은 무엇이요? 그게 저와 폐하의 다른 점인데, 그 드넓은 도량으로 장량이나 소하, 저 같은 참모와 장군을 거느리시는 역량은 아무도 따르지 못합니다. 하하하. 유방이 만족했지만 옆에 여태후는 불만이었다.
반면 소하는 '상국'이라는 중국 역사상 단 한번뿐인 벼슬에 오른다. 요컨대 황제와 맞먹는 '승상'이라는 의미 아닌가. '지록위마'로 유명한 환관 조고는 스스로 '상국'을 칭했다고 한다. 단 한번뿐이라는 것은, 재상 소하가 중국사에 나오는 여러명의 명재상 중에서 가장 공로가 크고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요즘말로 '행정의 달인'이었다는 것인데, 한국에는 '고건'이라는 사람이 이런 칭호를 들었다. 단지 '행정의 달인' 만이 아니라, 사람 보는 눈도 있어서, '촉'에 진입한 유방의 군사속에 끼어든 '한신'이 떠나려 했을때 붙들어온 사람이기도 하다. 소하가 한신을 데려오지 않았으면 유방의 대업은 그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 유방은 대단한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간단히, 유방은 후방을 안심하고 소하에게 맡긴채 어디든 출정이 가능했다. 소하는, 제갈양 만큼이나, 별다른 야심 없이 그저 주군 유방에게 충성을 다했다. 군대의 양성과 보급 이것이 소하의 책임이었고 어김없이 일을 잘해 냈다. 그야말로 '상국'의 칭호를 얻는데 여태후의 반대같은 것도 없을 정도로 뛰어났고 뒤탈 같은것 생기지 않게 잘 챙겼다는 것이다. 탁월한 능력과 처세가 어울려 여태후같이 까칠한 전제자의 칼날을 피해갔다.
마지막으로 장량이 있다. 제갈양과 달리 행복한 전략가였다. 제갈양은 소하와 장량 그리고 한신까지 겸했다. 제갈양이 북벌을 시작할 무렵에 믿음직한 장수로 마씨 형제들중 마속이 가장 뛰어났지만 그의 직계 장군이었던 조자룡에 턱없이 못미쳤다. '작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호로곡에서 북벌을 망치고 '읍참마속'의 고사를 만들고 말았다. 반면 장량은 제갈양처럼 후방의 군대양성이나 보급 등은 소하가 다 해결해 주었고 작전의 수행은 한신이 해결했기에 '전략적 정치'만 하면 되었다. 장량의 전략적 판단은 제갈양 못지 않다. 유방은 이렇게 뛰어난 세 사람이 역할분담을 잘 해낸 덕분에 이 세사람만 잘 통솔하면 만사가 다 되었다. 게다가 세사람중 누구도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한다든지 그런 야심이 없었다. 장량은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던 한나라 사람이었고 한신도 그랬다. 이들의 목표는 한나라의 재건과 부흥이었지 그 이상이 아니었다. 한신이 만일 더 큰 야심이 있었다면 괴철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한나라'를 복원한다는 정도로 목표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량이 유방에게 한나라 부흥의 꿈을 위탁하기로 결심하고 한신에게 찾아가서 '출병'을 요청했을때, 여기 응한 이유였다. 괴철의 삼정립 구도를 물리치고 유방을 한나라 황제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소하와 장량, 한신 모두 스스로 일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 같은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유방이 그래서 복을 타고 났다는 것이다. 장량은 창업에 성공한 이후 스스로 떠나는데, 토사구팽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기보다, 창업이후에 대하여 잘 알아서였을 것이다. 재계로 진출하여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와, 신선이 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설이 있다.
유방이 창업과 더불어, 유비 정도로만 어질었다면 한나라 역사가 좀더 순탄했을 것이다. 여태후의 폭정이 여씨 일족에 의한 한나라 황실의 장악으로 이어지면서 백성들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유방의 참모중 진평이라는 뛰어난 인물의 몫이 유씨 천하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여태후가 죽으면서 진평은 그 일을 해냈고 한나라는 당대 로마와 더불어, 아시아의 제국으로 등극했다. 어느때보다도 평화롭고 좋은 한시절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늘 구비를 만든다. 중간에 왕망의 신나라가 끼어드는 덕분에, 유수라는 그야말로 '유수의 인물'이 다시금 나타나는 계기가 된다. 유수는 유비와 한신을 합친 정도의 인물이었고 정말 훌륭한 군주였다. 그래서 유수 이야기는 새롭게 써야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