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장사인 장원(張舍人 狀元)에게 보낸 답장 1
<<본문>>
그대가 결정코 이 일을 성취하고자한다면
다만 항상 마음을 텅텅 비워서
사물이 오면 곧 응하는 것이
마치 활쏘기를 배우는 사람이
오래 오래하면
표적을 적중하게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보지 못하였습니까?
달마대사가
이조 스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다만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이 되어야
가히 도에 들어갈 수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자마자
곧 안배하기를
완연히 무지한 곳을 향해서
굳게 스스로 억눌러서
마음이 마치 장벽과 같게 하려고 합니다.
조사께서 말씀하신바
“착각하고 오해하였으니
어찌 일찍이 방편을 알겠는가.”
라고 한 것입니다.
암두 화상이 말하였습니다.
“막 이렇다고 하면 곧 이렇지 아니함이니,
옳은 글귀도 또한 제거하고
그른 글귀도 또한 제거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는 본보기입니다.
비록 한순간에 꺾어지고
단박에 깨트려짐을 얻지 못하더라도
또한 언어의 굴리는 바를
입지 아니할 것입니다.
달을 보면
손가락을 바라보지 아니할 것이며,
집에 돌아가면
길을 묻지 아니할 것입니다.
정식을 깨트리지 못하면
마음의 불꽃이 번쩍번쩍하면서
선명하게 빛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를 당해서
다만 의심하던 바의
화두로 제시하십시오.
예컨대 승려가
조주 선사에게 묻기를,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선사가 말씀하기를,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오로지
화두를 제시하여 들지언정
왼편도 옳지 않으며,
오른편도 옳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을 가져서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며,
또한 화두를 드는 곳을 향해서
알려고도 하지 말며,
또한 현묘한 이해를 짓지도 말며,
또한 있고 없음에 대한
알음아리를 짓지도 말며,
또한 참으로 없다는
그러한 없음을 지어 헤아리지 말며,
또한 아무런 일이 없는
상자 속에 들어가 앉아 있지도 말며,
또한 돌과 돌이 부딪쳐서
불이 일어나는듯하고
번개가 쳐서
불이 나는 듯 하는 곳을
향해서 알지 마십시오.
곧바로 마음 쓸 곳이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을 때에
공적한데에
떨어졌는가를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곳이 곧 좋은 곳입니다.
문득 늙은 쥐가
소의 뿔 속에 들어가서
곧 끝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 일은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습니다.
오직 숙세에 일찍이
반야의 지혜를 깊이 심었거나,
일찍이 무시의 광대한 겁에
참다운 선지식을 받들어 섬겨서
바른 지식과 바른 견해를 훈습해서
영식 속에 둔 사람은
경계를 만나고
인연을 만나
현행하는 곳에서
맷돌이 맞듯 할 것입니다.
마치 만인 속에 있더라도
자기의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더라도
자연히
구하고 찾는 마음이
흩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운문 선사가 말씀하였습니다.
“말을 할 때에는 곧 있다가
말을 하지 아니할 때에는
곧 없게 하지 말며,
사량할 때에는 곧 있다가
사량하지 아니할 때에는
곧 없게 하지 말라.” 라고 하였습니다.
또 스스로 제기하여 말하기를,
“일러보아라.
사량하지 아니할 때에는 무엇인가?”
라고 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서
또 스스로 말하기를,
“다시 또 무엇인가?” 라고 하였습니다.
근년이래에
참선에 많은 길이 있어서
혹 한번 묻고
한번 답하다가
끝에 가서
한마디가 더 많으면
그것을 참선으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고인들의
도에 들어간 인연을 가지고
머리를 모아 헤아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헛된 것이고
저것은 실다운 것이며,
이 말은 유현하고
저 말은 미묘하다 라고 하여
혹 대신 답하기도 하고,
혹 다르게
답하기도 하는 것으로서
참선을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으로 화회하여
삼계가 오직 마음이며
만법이 오직 식이라는 것에 두어서
참선을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아무런 말이 없이
검은 산 밑의 귀신들이 사는
굴속 같은 데 앉아서
눈을 딱 감고 말하기를,
“위음왕 부처님
그 저쪽의 부모가 낳기 이전의 소식이다.”
라고 하며 또 이르기를,
“묵묵하면서 항상 비추고 있다.”
라고 하여
참선을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미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하고,
깨달음으로서
두 번째에 떨어진 것이라고 여기며,
깨달음으로서 속이고
희롱하는 것이라고 여기며,
깨달음으로서 건립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이미 깨닫지 못하고
또한 깨달음이 있음도 믿지 아니합니다.
묘희가 항상
납자들과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세간의 기술이나 예술도
깨달은 곳이 없으면
오히려 그 미묘한 것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면서
다만 입으로만 고요함을 이야기하여
곧 거두어 드리고자 하는가?
마치 머리를 숙이고
동쪽을 향해 달리면서
서쪽에 있는 물건을 취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라고 합니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급할수록 더욱 더디어집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가히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교학 가운데서 그를 일러,
“대반야를 비방하는 사람이며,
부처님의 지혜의 생명을 끊는 사람이라.” 합니다.
천불이 출세하더라도
참회가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선의 씨앗이지만
도리어
악의 결과를 불러올 것입니다.
차라리 이 몸을 부수어
작은 먼지를 만들지언정
마침내 불법으로서
인정에 맞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정코
생사를 대적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이 칠통같은 무명을
타파해야만 비로소 됩니다.
삿된 스승들이
순하게 어루만지며
동과의 도장을 가지고
도장을 찍어서 곧 말하기를,
“나는 천 가지를 알고
백가지를 안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벼와 같고 삼과 같고
대와 같고 갈대와 같이 많지만
그대는
총명하고 지견이 있는지라
반드시 이러한 악독은
받아드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혹여 마음을 씀이 간절하여
빨리 효과를 구하고자할까 염려하여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염오를 만나게 될까 염려되어
붓을 믿고
갈등하기를 이렇게 하였습니다.
눈 밝은 사람의 엿봄을 만나면
한바탕 허물이 될 것입니다.
부디 잘 들어두십시오.
다만 조주 선사의
한 개의 무자(無字)로
일상의 반연을 만나는 곳에서
제시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십시오.
고덕이 말씀하였습니다.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깨달음으로서 법칙을 삼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설법을
하늘에서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게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면
모두가 어리석고 미치어
바깥으로 내달릴 뿐입니다.
힘쓰고 힘써서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무비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