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회> 사회자
<법신불전 헌배> 일어서서 대례
[기도]
<입정>
<영주>
천지영기 아심정(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我與天地 同心正)
<기원문>
<심고>
128장 서원을 이루어 주소서(心告歌)
<독경>
일원상서원문(一圓相誓願文)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초월의 생사문인바,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본원이요 제불조사 범부 중생의 성품으로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자연하여 무량세계를 전개하였고,무상으로 보면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로병사와 사생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이와 같이 무량 세계를 전개하였나니,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이 법신불 일원상을 체받아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공부를 하며, 또는 사리를 원만하게 아는 공부를 하며, 또는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하는 공부를 지성으로 하여 진급이 되고 은혜는 입을지언정 강급이 되고 해독은 입지 아니하기로써 일원의 위력을 얻도록까지 서원하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도록까지 서원함....
<법어봉독>:155쪽
대종경(大宗經)
제3 수행품(修行品)21장
수행품(修行品)21 장
이 청춘(李靑春)이 여쭙기를 [큰 도인도 애착심(愛着心)이 있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애착심이 있으면 도인은 아니니라.] 청춘이 여쭙기를 [정산(鼎山)도 자녀를 사랑하오니 그것은 애착심이 아니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청춘은 감각 없는 목석을 도인이라 하겠도다. 애착이라 하는 것은 사랑에 끌리어 서로 멀리 떠나지를 못한다든지 갈려 있을 때에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자신 수도나 공사(公事)에 지장이 있게 됨을 이름이니 그는 그러한 일이 없나니라.]
< 일상수행의 요법 대조> (p54)
1)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2)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3)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4) 신과 분과 의와 성으로써 불신과 탐욕과 나와 우를 제거하자.
5)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6) 타력 생활을 자력 생활로 돌리자.
7)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잘 배우는 사람으로 돌리자.
8)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으로 돌리자.
9) 공익심 없는 사람을 공익심 있는 사람으로 돌리자.
<성가>89장 : 괴롭다 즐겁다 하는 이들아(苦樂의 노래)
<설법> 창산 김진성 교무(선진 : 78)
미륵불과 용화회상 / 최도화 외.. 선진
최도화
최도화[崔道華, 1883~1954]
본명은 인경. 법호는 삼타원(三陀圓). 법훈은 대호법. 전북 임실군 지사면 금평리 개금실에서 부친 순화(順化)와 모친 진정만옥(陳正滿玉)의 일곱자매 중 6녀로 출생. 13세에 원 없는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비관하여 28세에 동네 방죽에 투신자살을 기도, 지나가던 여승에 의해 구해져 그로부터 출가하여 한강변 종남산 미타사, 계룡산 동학사에서 나반존자 주력수행을 했다. 이후 태을주(太乙呪) 수련을 하다가 각지 용한 기도터를 찾아다니며 기도하는 한편 비단장수를 하며 절집의 화주 노릇도 했다.
간곡한 기도와 간병으로 진안 좌포 김승지의 폐병에 걸린 아들을 낫게 하여 신임을 얻어 만덕산 산제당과 그 일대의 산전을 관리하게 되면서 임실 개금실의 가족들을 이주시켰다. 최도화는 산등 넘어 미륵사에 내왕하며 화주 노릇을 하게 되고 여기서 정산종사를 만나 생불님으로 받들게 되며, 변산 봉래정사에서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왕생불님을 만난 법열로 교화, 진안 마령의 전삼삼ㆍ전음광 모자를 이끌어 전주로 이사하게 하여 전주에 회상 창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익산에서 불법연구회를 창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소태산은 최도화를 길잡이로 하여 서울에 가서 박사시화를 통해 이동진화ㆍ이공주 등의 창립인연들을 만나게 된다. 정산은 최도화에 대해 ‘전북 회상과 서울 회상의 총연원’이라고 했다. 최도화는 거진출진으로서, 공식 직명은 ‘행상 순교(行商巡敎)’로 319명의 입교 연원을 달았다. 타고난 강인한 기질, 담이 차고 한번 하기로 한 일은 기어이 끝을 보고 마는 성격에 주선력과 계획성이 있어 회상 창립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최도화는 미륵불의 출세와 용화회상 건설에 관심이 많았다(《대종경》 전망품16). 소태산을 미륵불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으며 궁색하게 사는 양하운 대사모에게 집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아들 조갑종이 전무출신했다.
대종경(大宗經)
제14 전망품(展望品)16
최 도화(崔道華) 여쭙기를 [이 세상에 미륵불(彌勒佛)의 출세와 용화회상(龍華會上)의 건설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사오니 미륵불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며 용화회상은 어떠한 회상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들어나는 것이요, 용화 회상이라 함은 크게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처처 불상(處處佛像) 사사 불공(事事佛供)의 대의가 널리 행하여지는 것이니라.] 장 적조 여쭙기를 [그러하오면, 어느 때나 그러한 세계가 돌아오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지금 차차 되어지고 있나니라.] 정 세월(鄭世月)이 여쭙기를 [그 중에도 첫 주인이 있지 않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하나하나 먼저 깨치는 사람이 주인이 되나니라.]
장적조[張寂照, 1878~1960]
본명 미상. 법호는 이타원(二陀圓). 법훈은 대봉도. 1878년 10월 15일(음), 경남 통영에서 부친 문중(文中)과 모친 박거창(朴居昌)의 6남 5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고 고결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성격이 남성적이고 활달했다. 16세 되던 해 부모의 뜻을 따라 이웃 마을의 이씨(李氏) 문중에 출가하여 풍족한 환경에서 10여년을 지냈으나 남편과 이상이 맞지 않고 집안 살림의 구속에 묶여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구차하고 답답한 인생이라 생각하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를 원했다.
30세 미만에 집을 떠나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한때 10여년간 예수교와 보천교 등을 신앙했다. 1921년(원기6) 5월 15일 이만갑(李萬甲)의 소개로 전북 부안 변산의 실상초당을 찾아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제자가 되고 이어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이후 영산에 도실(道室)을 지을 때는 여자의 몸으로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땔나무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고, 원평에 교당설립을 목적하고 교도를 찾아 순교하며 기금 마련을 위해 작농도 하고 행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평에서 변산까지 먼 길을 내왕하며 알뜰한 신성을 바쳤다. 무엇보다도 연원교화에 큰 공적을 남겼다.
원평의 서동풍ㆍ서중안 형제를 인도하여 익산총부 건설의 주역이 되게 했고, 증산교 교파인 무극도인들을 개종시켜 귀의케 했다. 1929년(원기14) 봄 부산으로 내려가 아들 이덕환의 집에 살면서 순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 1931년(원기16)에 하단지부(현 당리교당)를 설립하여 당시 소태산과 조송광을 초청하여 소태산의 최초 경상도 행가를 가능케 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북방교화에 나서 1936년(원기21) 함경도 청진에 사는 아들 집에 있으면서 7명을 입교시켰고, 1937년(원기22)에는 만주로 진출하여 심양(審陽)ㆍ길림(吉林)ㆍ목단강(牧丹江)ㆍ장춘(長春)ㆍ연길(延吉) 등에서 1945년(원기30) 5월까지 218명의 새 회원을 입교시켰다.
숱한 고생 끝에 목단강변에 교당 건물까지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제2차세계대전 중 비상시국으로 인하여 중지하고 총부로 귀환해야만 했다. 특별한 교직은 없었으나 혼자의 몸으로 원평ㆍ대구ㆍ부산ㆍ평양ㆍ청진ㆍ만주ㆍ서울 등을 순회하며 법음(法音)을 전하던 장적조에게 소태산은 이타원(二陀圓)이란 법호를 주었는데, 박사시화(一陀圓)ㆍ최도화(三陀圓)와 더불어 ‘불법연구회 3대여걸’로 불렸다. 1931년(원기16) 3월 여자수위단 곤방(坎方) 단원에 피선되어 대중의 신망을 받았기도 했다. 1960년(원기45) 12월 20일 노년의 수양을 즐기던 중앙수양원에서 열반했다. 법위는 정식 법강항마위에 올랐으며, 1988년(원기73)에는 대봉도(大奉道)의 법훈이 추서되었다.〈張眞修〉
정세월[鄭世月, 1896~1977]
본명은 인흥(仁興). 법호는 칠타원(七陀圓). 불법연구회 초대회장을 역임한 서중안(秋山徐中安)의 부인. 최초 여자정수위단원 역임. 1896년 1월 26일, 전북 김제군 만경면 인흥리에서 부친 문명(文明)과 모친 이명인화(李明仁華)의 10남매 중 5녀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활달하고 근실했으며, 3살 때부터 백부 슬하에서 양육되어 16세에 서중안과 결혼했다. 전처소생의 딸 둘을 친딸과 다름없이 사랑하여 인근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부모를 효양(孝養)하며 하솔의 도도 분명히 하여 가족들이 모두 따랐고 이웃의 모범이 되었다.
1924년(원기9) 불법연구회 창립과 익산총부 건설에 초대회장인 부군과 함께 당시 3천여평의 기지 대금과 건축비 일부(6백여원)를 의연(義捐)했다. 1927년(원기12) 부군과 더불어 가산을 정리하고 교단 창업에 전무하기 위해 총부 구내로 이사했다. 그러나 부군은 우연히 발병하여 효차를 보지 못하고 1930년(원기15) 6월 2일 49세의 일기로 열반했다. 큰 슬픔이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1932년(원기17) 전무출신을 단행했다. 이후 총부식당 주임으로 7년간 알뜰한 공심으로 살림을 꾸렸으며, 1941년(원기26)부터 3년간은 총부 순교로 교화발전에 노력했다.
소태산대종사가 직접 여자정수위단 시보단을 조직할 때 여자정수위단의 일원이 되었다. 8ㆍ15광복 이듬해인 1946년(원기31) 전재동포구호소 주임으로 1년간 구호사업에 종사했으며, 1947년(원기32)부터는 총부 순교로 1년, 총부 내 감원으로 2년, 양로원 주임으로 1년을 일했다. 《회보》 제4호에 ‘공부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구별’이라는 감상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1935년(원기20) 동선 때는 소태산으로부터 초견성 인가를 받기도 했다. 1954년(원기39) 6월부터는 중앙수양원에 입원하여 수양에 힘쓰다가 1977년(원기62) 열반을 얼마 앞두고 ‘음력 구월 보름경에 가야겠다’고 미리 날을 받아 두더니 과연 9월 13일(양력 10월 25일) 82세로 열반했다.
서중안[徐中安, 1881~1930]
주요약력
본명은 상인(相仁). 법호는 추산(秋山). 법훈은 대호법. 1923년(원기8) 입교하여 초대 불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중앙총부 건설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생애와 활동
서중안은 1881년 11월 21일 전북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에서 부친 치욱(致旭)과 모친 반월경화(潘月鏡華)의 11남매 중 넷째 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집안에서 조부에게 글을 익히다가 12세 때 비로소 서당에 나갔는데 가세가 빈한하여 형제가 하루씩 번갈아 나무를 하러 다니며 글공부를 했다. 어릴 적부터 타고난 천성이 인후하고 침착했으며 강직하고 세밀했다. 16세에는 근동의 오씨(吳氏)와 결혼했다. 17세에는 향교 출입을 하며 선비들과 문장을 주고받았고, 만경면 향교의 유사(有司)로 추천되었다.
하지만 서중안은 유학에만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다. 당시 자유평등의 진취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향교책임자로 있을 때 반상차별로 죄 없는 사람을 압박하고 착취하던 폐풍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가문에 내려오던 노비문서를 불살라버렸다. 20세부터는 각처의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다. 서중안은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의서(醫書)를 탐독하며 연구했고 틈만 있으면 서예와 묵화도 그리며 거문고를 뜯기도 했다. 근동에서는 명필,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했다. 28세에는 성덕면장에 추천되어 6년간 근무했는데, 이때 민심이 그를 따랐다.
일제의 압정에서 면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날이 갈수록 가일층 압정을 가하는 일제에게 더 이상 앞잡이 노릇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30세 때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전북 김제군 만경면 인홍리 사람인 정세월(七陀圓鄭世月)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35세에 충남 강경읍에 한약방을 열었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김제면 교동리에 ‘인화당한약방’을 개설했는데, 명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각처에 신용을 얻어 번창했다. 1923년(원기8)에 친형인 서동풍(春山徐東風)으로부터 소태산대종사의 도덕 말씀을 듣고 원불교에 입교했다.
그 당시 여러모로 보아 김제 사회에서 비교적 명망을 갖추고 부유하게 살던 서중안의 입교는 원불교 창립기의 간고한 시절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평소에 종교라면 기피해오던 그였지만 자연 중 마음에 감동된 바 있어 친형의 인도로 험로를 찾아들어 부안 변산 봉래정사에서 새 회상 교법을 초안하며 수양중인 소태산을 뵙게 되었다. 소태산을 만난 서중안은 감복하여 그 자리에서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었으며 하룻밤을 지내고 난 뒤에는 그것도 부족하다하여 소태산보다 10여세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부자지의(父子之義)로서 결연하여 주기를 간청하며 자기 심신의 일체지도권을 소태산에게 일임했다.
그때부터 얼마 후에 부인 정세월과 함께 봉래정사를 다시 찾은 서중안은 소태산에 간곡히 청했다. “상인(중안)이 사뢰었다. 이곳은 도로가 험난하고 장소가 협착하옵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가 광활한 곳을 택하여 도량을 정하시고 여러 사람 전도를 널리 인도하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대종사 때가 온 것을 짐작하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나가기는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가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상인이 사뢰었다. 소자 비록 물질이 많지 않고 정성이 부족하오나 능히 담당하겠나이다.
대종사 드디어 허락하시고 이로부터 정식으로 회상 여실 준비를 시작하시었다”(《대종경선외록》 사제제우장18). 소태산은 서중안의 말에 응하여 장차 정식으로 회상을 열 계획을 함께 의논한 후 그 준비에 착수했다. 소태산으로부터 새 회상 공개에 따른 제반 실무를 하명 받은 서중안은 정산종사를 비롯한 수인의 동지와 더불어 그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24년(원기9) 2월에는 소태산 최초의 상경길에 동행하여 소태산이 머물 임시출장소를 서울 당주동에 자비로 주선했다. 그리하여 한 달 동안 곁에 시봉하며 서울의 박사시화ㆍ성성원ㆍ이동진화ㆍ김삼매화 등 중요인연들을 모으는데 힘을 썼다.
1924년(원기9) 3월에 서울을 떠나 전주로 내려온 소태산은 새 회상 공개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4월 29일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날 총회에서 소태산은 불법연구회 총재로 추대되고 초대회장에는 서중안이 선정되었다. 새 회상 공개의 기지를 물색하던 소태산은 8월에 전북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를 기지로 확정했다. 익산총부 건설은 서중안ㆍ정세월 부부가 당시 3,495평 기지의 대금 전부와 건축비 일부를 희사한 것이 그 토대가 되었다. 익산본관인 도치원을 건축할 때에 총부 기지 대금은 물론이요 회관 건축비도 상당 부분 희사했다.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회관 건축 당시 김제 약방에서 불이 났다는 전보를 받고도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다 마치지 못했는데 사사(私事)일에 마음이 끌려 중간에 갈 수 없지요”라 했다. 일을 마치고 약방에 돌아와 보니 방 한 칸 남기지 않고 약방은 다 타버렸다. 화재를 위문하는 친지들에게 “불은 이왕에 난 것이고 공사가 더 중하지. 사람은 주인이고 물건은 끝인데 본말이 바꾸지 않는 이상 걱정할 것 없지”라고 말했다. 1924년(원기9) 12월에 완공된 ‘불법연구회’ 본관은 서중안의 글씨로 기둥에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을 걸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서중안은 공도자숭배의 정신에 입각하여 익산 본관 유지대책을 위한 후원기관으로 장차 약업기관을 경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한약방을 내놓을 작정했으나 양자로 들인 조카가 소유권 분쟁을 일으켜 서중안이 40여년 동안 사회적으로 쌓아올린 인망과 공신력을 실추시켰다. 이 일로 여론이 악화되자 소태산은 서중안을 불러 “공도사업은 재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중안의 그 금강같은 오롯한 마음이 더 중한 것이니 약방을 양자인 조카에게 내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약방을 조카에게 넘겨주었다. 서중안은 46세 되던 1927년(원기12)에는 가산을 정리하고 본교의 사업에 전일하기 위해 총부 구내로 이사했다.
그러나 서중안은 좌절로 인한 발병으로 백방의 치료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부인 정세월과 은법자(恩法子)인 성정철(誠山成丁哲)에게 살아계신 모친의 후사를 부탁한 후 1930년(원기15) 6월 2일 49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서중안의 열반을 추모하는 글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정산종사는 “익산본관이 터도 없을 때에 추산당은 3천여원이란 거액을 의연하여 기초를 구성했으며 오늘날의 발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추산당은 문필이 출중했나니 《수양연구요론》의 표지(추산당의 친필)만 보아도 아는 일입니다. 추산당은 누구에게든지 겸손했으며 하심(下心)을 주장했습니다”라고 추모했다.
송도성은 감상담에서 “굴기하심(屈己下心)이 네 글자 아무라도 말하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추산당께서 능히 이것을 실행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서로 경어를 사용하자는 의견을 추산당이 제의했습니다. 추산당의 몸은 가시었다 할지라도 그 좋은 법만은 가지 않고 길이 우리의 마음속에 잠겨 있으니 우리 남녀노소가 그 법을 모범하여 서로 굴기하심으로 위주하면 떠나신 영가에게 보답이 되는 동시에 본회의 전도가 양양평화할 것입니다”라고 회고하여 그 인품을 그리고 있다. 서중안은 익산총부 건설의 선구자였고 물질적 후원자였다. 기지대금을 쾌척하여 오늘의 중앙총부가 있게 했고 교단의 크고 작은 일에도 힘 미치는 한 자신의 일로 삼은 대공심가였다.
<성가>
159장 : 우리님 대자 대비(總部를 찾아가리)
<공고>
<생활결의 구호>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원망 생활을 감사생활로!
<성가>
102장 : 저희들이 이 불사로(回向의 노래)
<폐회>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삼대력을 얻어 제생의세 [濟生醫世]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