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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의 글들

[스크랩] [[설교]]이제는 사탄의 신발을 벗어야 할 때

작성자나눔(양미동)|작성시간10.01.12|조회수11 목록 댓글 0

 

이제는 사탄의 신발을 벗어야 할 때 

누가 11:14-20 로마서 7:21-25

 

곽건용 목사

악령이 두려운 두 가지 이유

‘모세’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모습은 영화 《십계》에서 모세 역을 했던 찰톤 헤스턴입니다. 이 사람은 실제 모세와는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모세’ 하면 가장 먼저,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찰톤 헤스턴입니다. 마찬가지로 ‘악령’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상은 영화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바로 그 악령입니다. 열두 살짜리 여자 아이에게 들어가서 온갖 기막힌 일들을 일으키는 바로 그 놈, 침대를 들었다 놨다 하질 않나, 온갖 물건들을 집어던지질 않나, 전기 불을 켰다 껐다 하질 않나, 급기야는 자기를 내쫓으려는 두 명의 신부를 죽여 버리는 바로 그 놈이 우리 뇌리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악령입니다.

 

사람은 논리보다 인상에 치우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 《십계》에 나오는 모세가 진짜 모세일 것 같고 영화 《엑소시스트》가 그리는 악령이 진짜 악령이라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다른 종교를 그만두고 기독교만 따져 봐도 사람들은 악령 또는 사탄에 대해서 오랫동안 다양한 생각을 펼쳐왔는데 이 모든 생각들을 영화 한 편이 순식간에 삼켜버렸다고 말하면 지나칠까요? 그만큼 ‘인상’의 힘이 무섭습니다. 이 ‘인상’이란 것을 무시할 수 없고 지워버릴 수는 더더욱 없지만 그래도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인상이 정말 그것과 부합하는지 생각해보고 반성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난주일 설교에 대해서 몇 분에게 반응을 들었습니다. ‘남을 이해하는 것도 좋지만 사탄을 이해해보자는 말은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니냐?’는 반응에서부터 사탄을 회개시켜야 하고 사탄을 회개시키는 과정은 곧 나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란 말에 공감했다는 반응까지 다양했습니다. 사탄은 결국 나 자신의 일부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새로울 것이 없는데 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반가웠다고 언급한 분도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사탄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오늘은 ‘사탄 신발 벗어보기’라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령을 두려워하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악령이 갖고 있다고 믿어지는 ‘힘’ 때문이고 둘째는 악령이 누군지 정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탄이나 악령에 대해서 우리는 많이 말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놈이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그가 누군지, 뭘 하려는 놈인지도 모르고,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놈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놈이 두려운 것입니다. 여기에 두려움과 무지의 악순환이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또 두렵기 때문에 알려고 하지 않아서 점점 무서워지고 점점 더 오리무중이 되는 악순환 말입니다.

 

사탄의 딱지를 붙여 치워두면 사탄이 없어지나?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악령’이란 딱지를 붙여서 멀리 치워두고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두려움을 회피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입니다. 이 방법이 효과적인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탄을 이런 식으로 다뤄왔습니다. 사탄에다 ‘이해할 수 없는 놈’이란 딱지를 붙여서 멀리 치워놓고 피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피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에게 회교가 그랬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은 회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을 ‘악의 종교’라고 선전해왔습니다. 그리고 회교와의 전쟁에 ‘거룩한 전쟁’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을 붙여 놓고 사람들을 기만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결과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공포와 이해하기 싫은 것들에 대한 미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무서워하고 이해하기 싫은 것들을 미워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리가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괴물이 되어 우리를 공격합니다. 세상의 모든 괴물들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적과 원수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원수는 내가 이해하기를 포기할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라고 묻기를 그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순간에 그는 나의 적이 되고 원수가 됩니다.

 

사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의 역사를 살펴보면 두 가지 눈에 띠는 점이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첫째로, 처음에는 나와 상관없는 절재적인 타자였던 사탄이 점점 내게 가까운 존재로 이해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아득하게 멀리 있던 사탄이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이 과정의 종착역은 어디일까요? 말할 것 없이 나 자신입니다. 멀리 있던 사탄은 점점 가까워지더니 결국 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사탄은 ‘내 안에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둘째로, 초대교회 교부들 중에 사탄을 무찌르고 죽여 없애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사탄을 회개시킬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한 ‘엉뚱한’ 교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소수였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사탄’이란 딱지를 붙여서 멀리 치워두는 것만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다고 본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그를 회개시킬 길을 찾아야 세상의 악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본 사람이 그 옛날에 있었습니다. 악과 싸워 이기는 방법은 그를 회개시키는 것이라고 믿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탄의 무기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 하나를 쫓아내신 일 때문에 논쟁이 벌어진 얘기가 나옵니다. 이 사건을 보고 놀란 군중 중에는 예수님이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싸우면 쓰러지게 마련이고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다.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데 만일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겠느냐......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마귀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마귀는 내분으로 망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있다! 예수님은 마귀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만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마귀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 지배하는 현장,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얼핏만 봐도 생각할 점이 많은 구절이지만 전부 다 얘기할 수는 없고 한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조차 그것이 마귀의 힘인지 하나님의 힘인지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중들 가운데는 예수께서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이 재림한 예수님에게 한 얘기가 생각납니다. 대심문관은 어째서 자기를 방해하러 왔냐고 예수를 비난합니다. 그는 자기가 진짜로 섬기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라고 실토하고 나서 자기가 어떻게 사람들을 지배하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지상에는 사람들의 양심을 영원히 지배하고 사로잡을 세 가지 강력한 힘이 존재하오. 그것은 기적과 신비와 교권이오. 이 세 가지로 허약하고 비열한 인간들을 지배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은 세 가지를 모두 거부하고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었소.” 예수께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을 때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을 거절하심으로써 ‘기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유혹을 물리치셨고, 높은 데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을 거절하심으로써 ‘신비’로운 일로 사람을 모으려는 유혹을 물리치셨으며, 사탄에게 절하고 세상을 차지하라는 유혹을 거부하심으로써 ‘권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유혹도 물리치셨습니다. 대심문관은 이 점을 말한 것입니다. 대심문관은 계속해서 이렇게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하지만 만일 신비가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이나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비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을 터이니 설령 양심에 거리낀다 할지라도 무조건 복종해야 할 것은 신비라고 가르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겠소?”

 

마귀 두목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낸다는 주장을 부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저는 ‘사탄이 쓰는 방법으로는 사탄과 맞서 이길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사탄이 쓰는 무기를 써서 사탄과 싸우면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 무기를 쓰는 데는 사탄이 우리보다 훨씬 더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초보자는 같은 칼을 써도 무예의 고수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도스토옙스키의 혜안에, 나아가서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을 전하는 복음서 기자들의 혜안에 탄복해마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요즘 사탄은 힘으로 윽박질러서 사람을 자기 종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 까닭은 그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손쉬운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탄은 기적과 신비와 교권이라는 수단으로 사람의 양심을 사로잡고 지배합니다. 사탄은 중요한 종교적 가치들을 갖고 사람의 양심을 마비시킨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만일 신비가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이나 사랑이 아니라 신비라고 믿을 것이니 설령 양심에 거리낀다 할지라도 무조건 복종해야 할 것은 신비라고 가르치는 것이 정당화되지 않겠소?” 사탄은 지금도 이렇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탄의 신발을 벗어야 할 때

신앙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기적이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과 신비의 효과는 길어봐야 몇 년입니다.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운 기적도, 칠층천에 올라가본 신비한 경험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 수명은 불과 몇 개월에 불과하고 길어봐야 몇 년을 넘지 못합니다. 권력과 야합해서 교회의 세속적 영향력을 증대하는 길도 옳은 길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1년 장로 대통령이 다스리는 동안 한국에서 수십 만 명이 교회를 떠났다는 통계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렇게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 ‘잘못했다. 그래도 신앙을 버리면 안 된다.’고 말할 염치가 없습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기적과 신비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탕으로 해서 각자의 양심을 갈고 닦는 일입니다. 행하지 않았을 때 닥칠 징벌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행했을 때 받을 보상을 계산하지도 말고 나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결단으로 양심에 따라서 다른 이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또 이해한 만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We can love them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우리는 그들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전적으로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A River Runs through It》에서 아버지 목사가 죽을 때까지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둘째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 행한 설교에서 한 말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남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악’의 딱지를 붙여놓고 치워버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목사처럼 누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를 전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탄이 내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지금 내 안에도 사탄이 도사리고 앉아 있습니다. 그는 들락날락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거기 있을 것입니다. 사탄이 내 안에 있으니 싸우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대충 적당히 싸워서는 안 되고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사탄과 싸우려면 먼저 그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의 신발을 신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신발을 영원히 신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완전히는 물론 아니고 대충이라도 사탄을 알았으면,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노리고 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수단들을 사용하는지 알았으면, 이제는 그의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는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은 온갖 수단으로 우리를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립니다. 이것이 사탄이 사람을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때로는 기적을 일으킴으로써, 때로는 신비한 일들을 만들어냄으로서, 또 때로는 요행을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으로 착각하게 만듦으로써, 세속적인 성공을 복음의 승리라고 오해하게 만듦으로써 사탄은 우리를 지배합니다. 저는 기적이나 신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났다면 그 기적이 누구를 위한 기적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 신비가 무엇을 위한 신비인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지름길이 없는 정직한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차근차근 벽돌을 한 장씩 쌓아가야 하는 무던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운운하면서 이 정직하고 무던한 과정을 건너뛸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사탄의 유혹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한두 번의 기적이나 신비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나의 양심과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서 내리는 결정과 결단의 총합이고, 남을 이해하려 애쓰고 이해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사랑하려는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을 알았다면 그것을 더 신고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탄의 신발을 아직까지 신고 있다면 그것을 당장 벗어버리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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