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8 - 오사카성 여름 전투에서 성은 함락되고 요도기미는 자결하다!
2024년 11월 25일 사카이 (堺) 와 스미요시타이샤( 住吉大社駅) 를 구경하고는
미도스지선 난바역 (御堂筋線 なんば 駅 ) 에서 지하철을 타고
혼마치 (本町 본정) 역에서 환승해 다니마치 욘초메 (谷町四丁目) 역에 내립니다.
오사카 역사 박물관을 거쳐 오사카성 (大阪城, 대판성) 에 도착하니, 깊은 해자에 거대한 오사카성의
성벽이 보이는데.... 공격군은 이 넓고 깊은 강을 건너야 하고 성벽에서 쏟아지는 총알과 화살
세레를 받아 어찌어찌 성벼을 넘는다고 해도 다시 제2차 해자 강물과 그너머 내성의 성벽이 가로막습니다.
오사카성은 백만 대군으로도 넘을수 없는 난공불락이라고 하겠는데.... 도요토미 히데요리
와 요도기미에 사무라이등 10만이 지키는 성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의 영주들을 동원해서 20만 대군으로 성벽을 에워쌌으니 1614년 의 겨울 전투 입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전초전에서 도쿠가와군 3만 5천의 공격에서 단 2천명으로 성을 지켜낸바 있는 사나다
노부시게는 수성전 보다는 히데요리가 친정에 나서 선공으로 후시미성과 니조성을 점령하여 교토에 머물던
이에야스를 처단하고 오우미를 차지해 이에야스의 후속 부대를 분단시켜 도쿠가와 가문에 맞서자고 건의합니다.
하지만 실권을 쥔 엄마인 요도도노가 아들 히데요리의 안전을 우려하여 친정을 결사 반대하였기에
결국 농성전을 하게 되는데 외곽의 성채들은 모두 함락되고 오사카성 전투로 이어지니.....
오사카성은 서쪽은 바다, 동쪽은 히라노강, 북쪽은 요도가와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로
남측이 문제인데...... 사나다 노부시게는 견고한 요새인 "사나다 마루" 를 축성합니다.
5천명이 수성한 견고한 사나다 마루 때문에 도쿠가와군이 하루새 1만명이 몰살되는등 죽어
나가면서 전쟁이 지지부진해 지자 꾀많은 이에야스는 서양 대포를 가져와 발사합니다.
한 발이 천수각에 떨어져 시녀 하나가 죽자 실권을 쥔 요도도노가 새파랗게 질리는 바람에 낭인들 해체,
사나다마루를 비롯 해자 철거를 하면 병력을 물리겠다는 이에야스의 화의를 받아들여 전쟁이 끝납니다.
하지만 저 너구리 이에야스가 휴전과 평화를 유지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 불과 6개월 후 1615년 여름에 전국의
다이묘들을 소집해 오사카성을 포위하니 오사카 여름의 진(大阪夏の陣) 인데... 전투 경험이라고는 없는 아녀자
이면서도 실권을 움켜쥔 요도도노는 평화가 몇십년은 이어질 것으로 믿었던 것일까요? 어리석고도 어리석도다!
도쿠가와는 군대를 철수하고 죄를 묻지 않는대신 로닌 해체와 오사카성 외측을 둘러싼 해자를 도쿠가와군이 메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니, 도요토미 측은 허락하고 자기들도 니노마루, 산노마루의 장벽을 철거한다는
약속하는데, 이에야스는 73세로 살 날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으니 그가 죽으면 훗날을 도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오사카측은 언제까지 해자를 메워야 하는지 기한을 정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을 끌려고 했는데 하지만
도쿠가와는 무려 7만명을 동원하여 오사카성을 둘러싼 8킬로에 달하는 외측 해자를 단 3일만에
메워버렸고, 이에야스는 아들 히데타다에게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해자도 메워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애초 부터 화의의 목적은 오사카성 공략에서 가장 골치아팠던 난공불락의 사나다마루와 해자를
없애는 것이니.... 시간을 끌려던 도요토미 측은 당황해서 항의했으나, 공사가 늦어지는
것 같으니 우리가 도와준다는 것이었으니 항의를 외면하고는 한달만에 모든 해자가 메워졌습니다.
분노한 도요토미측은 방어시설이 철거되어 벌거벗은 상태라 로닌들을 시켜 외성을 쌓고 해자를 파내는 대공사
를 시작했으니 도요토미가 화평조건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고 도쿠가와가 주장하기에 좋은 명분을
제공해준 셈이고 로닌들에게 사기진작을 위해 보수를 주니 일부 로닌이 무기를 구입하면서 트집이 잡힙니다.
1615년 3월, 이에야스는 '모반을 일으키려는가' 라고 도요토미 측에 책임을 물으니,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을 떠나
지정한 영지로 이전하던가, 성 안에 있는 병사들을 내보내라는 요구를 하는데.... 항복 요구인지라 거부하니
이에야스는 그럴줄 알았다면서 4월에 다이묘들의 병력을 모았고 5월에 진군을 시작해 여름 전투가 시작됩니다.
오사카 여름의 진의 상황은 겨울과는 달랐으니 이때 병력은 도쿠가와 측이 15만명, 도요토미 측이 5만 5천명
정도였는데, 3배에 달하는 병력차에다가 오사카성은 방어력을 잃고 벌거벗은 상태였으니, 해자가
메워진 오사카성의 농성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성에 주둔하던 많은 로닌과 주민들이 성을 떠났던 것입니다.
해자와 요새등 방어시설이 없으니 오사카성 농성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 병력차로 바닥에 가까운
병력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사나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 밖으로 나와 싸워 병사
들의 사기도 올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처럼 다이묘들의 배반을 유도해 히데요리의
본진에 군사가 집중되는 틈을 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는 본진을 기습 공격하자는 작전을 짭니다.
문제는 그러기에는 병력 열세에 히데요리가 전사하면 안된다며 거품을 무는 요도도노를 비롯 수뇌부는 불가능
하다며 거부하니 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는 다시 선공으로 후시미성을 점령할 것을 건의해 다른 오인중
도 찬성했지만 이 역시 요됴도노 등 수뇌부는 불가능하다며 듣지 않았으니 조금이라도 위험한건 못하겠다는?
사나다 노부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본진으로 삼았던 차우스산의 요새를 재활용해 제2의 사나다마루
를 짓게 되며, 모리 카츠나가, 고토 마타베에와 함께 도쿠가와군이 오사카로 가는 길목을 막고 요새
에서 농성하면서 주력 부대를 묶어두고, 기마부대로 이에야스가 있는 본진을 기습한다는 작전을 세웁니다.
하지만 적군이 사나다마루에 접근하기 전에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토 마타베에 부대가 단독으로
도쿠가와군과 먼저 전투를 벌였으니..... 스스키다 카네스케 등이 함께 독하게 싸웠지만
도쿠가와군이 압도적이라서 중과부적이었고 모리 부대가 구원왔을 때는 이미 전사한 이후였습니다.
작전이 처음부터 꼬이자 차우스산 요새를 버리고 나온 사나다 노부시게군은 다테 마사무네의 병력과
맞서게 되는데, 다테 마사무네가 자랑하는 기마 철포대에게 대승을 하게 되니
철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바닥에 숨어서 접근하면 창으로 찌르는 야리부스마 (槍衾) 작전이었습니다.
초소카베 모리치카와 기무라 시게나리도 도쿠가와군을 습격하기 위해 이이 나오타카, 도도 다카토라의
부대와 조우해 전투를 벌였는데, 전 주군 모토치카를 위한 쿠와나 요시나리의 희생과
모리치카의 분전으로 도도군을 거의 괴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나..... 이이
나오타카 원군이 도착하면서 중과부적으로 수에서 밀려 기무라 시게나리는 전사, 모리치카는 패주합니다.
다음날 도쿠가와군은 총공격을 시작하니, 이에야스는 전날의 전투가 장기전으로 고생한 만큼 이번 전투는
3일 만에 끝내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에 사나다 노부시게와 모리 카츠나가는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목을 노리니 병력 차이는 여전하기에 이에야스를 죽여서 한 방 역전을 노린 것입니다.
카츠나가가 다른 병력들을 상대하면서 길을 열어주는 사이에 사나다 노부시게는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돌격해
어느정도 성공하니 이에야스 자신도 예상못한 공격이라 당황했고 미카타가하라 전투후 최대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서운 돌격이었으니 텐노지(天王寺) 전투로.... 이에야스는 2번이나 할복을 각오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사나다 노부시게의 병력은 고작 3천명 뿐인지라 3차례나 돌격했지만 군세가 적어 이에야스
를 죽이지 못한 노부시게는 “간토무사가 백만이라고 자랑하지만 남자는 하나도 없구나
(関東勢百万と候え、男はひとりもなく候)」” 라는 유명한 말로 도쿠가와군을 조소
하면서 의연히 말에 올라 퇴각했지만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고 다른 도요토미군도 서서히 괴멸됩니다.
만약 히데요리가 출전했다면 전황은 바뀌었을거라고 도쿠가와도 기록하지만 엄마 요도도노는 끝까지
귀한 아들인 히데요리의 출전을 막았고 실전 경험이 많은 장수들인 오사카 오인중이 전멸해
버렸으니.... 허울좋은 오사카성 상층부는 어중이 떠중이라 도쿠가와군이 공격하자
도요토미군은 마지막까지 저항했으나 병력 열세와 무능한 지휘부로 인해 결국 성문이 돌파 당합니다.
그리하여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진 끝에 오사카성의 여러 구역은 도쿠가와군에게 차례차례 함락당했으며,
도요토미측의 항복 사신이 히데요리를 살려달라는 요청도 거절되는데 74세 이에야스는 자신이
죽고나면 이 자들이 히데요리에게 다시 붙을 가능성도 있기에 모두 죽이는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습니다.
히데요리의 아내였던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가 나서서 남편을 살려달라고 이에야스에게 찾아가
간절히 빌었지만 역시 거부당했고.... 결국 이이 나오타카가 히데요리가 있던 야구라에
화공을 해서 파괴되기 시작했으며 그틈에 도쿠가와 군이 진격해 저항하는
도요토미군을 닥치는대로 죽이자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희망이 없음을 알고 할복 자결 합니다.
이순신 장군도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 하면 살것이라" 했는데 요도도노는 자식 히데요리를
끝까지 위험한 전투에 내 보내지 않고 치맛자락으로 보호하며 살려다가 결국은 죽은 것이니.....
전쟁의 참혹함을 모르는 아녀자로 필사즉생의 각오 없이 안전하고 편암함만을 꾀하다가 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천혜의 요새로 난공불락이자, 도요토미 가문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던
오사카성은 무너지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도 진시황의 2세 황제 처럼
단 2대 만에 그의 사세구대로 “오사카의 영화는 정말 꿈 속의 꿈” 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에야스는 눈엣가시인 도요토미가를 멸망시킴으로써 다이묘들은 도쿠가와에게 충성을 맹세할수
밖에 없었고 후계자 히데타다에게 권력계승을 하며 에도 막부의 통치를 확고히
하니 겐나엔부를 선포해 전란이 끝났다는 것을 알렸고, 일국일성등 다이묘들이 군비를
확장하는 것을 규제하며 중앙집권으로 매튜 페리가 오기 전까지 일본은 250여년의 평화를 누립니다.
이 전투로 유명해진건 오사카 오인중 (五人衆) 이니.... 고용된 입장에다가 각자 다른 속셈을 가지고
수락한 것이지만, 도쿠가와 가문이 워낙 싫은지라 배반해서 항복하느니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치며 강력한 적에 맞서 멋지게 싸우다 장열히 죽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물 먹이고 죽일뻔한 사나다 유키무라 (노부시게) 는 사후 에도
시대는 물론 현대에도 초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게 되는데.....
도쿠가와 측에서도 그를 최고 무장으로 평가했기에 그를 띄우는데 거부감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모리 카츠나가는 최후의 돌격에서 적군의 시선을 이끌며 자신에게 병력이 몰리도록 하는 맹활약했는데
노부시게에게 그 전공이 다 넘어가 버렸으니.... 사나다의 그림자에 가려진 모리 카츠나가를
가리켜 “안타까운 후세...... 사나다는 이야기하지만 모리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들 5인중 에게는 도쿠가와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측도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 특이한데, 사나다
마사유키로 부터 전술을 이어받은 노부시게 처럼 전쟁에 잔뼈가 굵은 그들의
계획을 매번 도요토미 지휘부가 거부했으니..... 요도도노와 오노 하루나가 등이 이런 악역이라?
히데요리의 유일한 소꿉친구인 키무라 시게나리는 오사카 겨울의 진이 첫 출진이었으니 그는 오사카 겨울
의 진이 끝나고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화의를 할 것을 서로 약속한다는 글을 적은
맹세서를 주고받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만났는데 이에야스는 맹세서에 자신의 피를 연하게 묻힙니다.
키무라 시게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맹세서에 피가 너무 연하니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다시 피를 묻혀 달라고 했고, 노장 이에야스는 군소리 않고 이에 응했으니
완전 무명이었던 시게나리의 대담한 행동은 전국에 퍼져 이름이 널리 알리졌다고 합니다.
시나노(나가노) 우에다성(上田城)의 사나다 가문은 승패를 알수 없는 전쟁에서 가문의 존속을 위해 형제가
두패로 갈라지니 장남은 도쿠가와의 동군에 아버지와 차남 노부시게는 서군에 섰는데 1600년 2천으로
3만5천 도쿠가와군을 이긴 사나다 노부시게는 형님의 탄원으로 목숨을 구해 키슈 쿠도산에 유배됐습니다.
14년 세월이 흐르고 오사카성 전투가 임박하자 사나다 노부시게는 오사카로 향하기 위해 산을 탈출
해야 했는데.... 키슈의 아사노 가문은 유배인들을 감시하는 역할이었지만,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탓에 모른척 하거나 추격을 대충 했기에 노부시게는 오사카성에 들어갈수 있었답니다.
이 전투는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에서 최초로 포병이 창설되고 대포가 투입되었는데, 대포가 등장한건 전국시대
말기로 유럽 상인들과 거래하면서 대포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규슈의 기독교도 영주 오토모 소린은
포르투갈 선박에 비치된 대포를 돈을 주고 사들여서 "쿠니쿠즈시(國崩し)" 라며 최종병기 처럼 취급했습니다.
오토모씨는 포르투갈 선박을 고용해서 적의 성에 대해 함포 지원을 의뢰하기도 했고, 오다 노부나가는 모리
수군에 대항하기 위해 대형선을 건조하고 대포 3문을 설치하여 모리 수군을 격멸하기도 했지만
예외적인 경우이고... 다이묘들은 대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임진왜란 때도 일본군은 대포가 없었습니다.
국가 단위로 화약을 생산하고 수입했던 명, 조선과 달리 수백개로 나뉜 영지 단위로 전쟁중이던
일본 의 다이묘들은 화약 소모량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으니..... 대포 1발을
쏠 화약이면 조총을 수십 - 수백발을 쏠 수 있었으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오사카 전투에서 양측이 대포 포격전을 벌였는데, 이에야스측은 대포의 중요성을 알고 서양 상인들
에게서 대포를 사들이는데 열중해 서양식 대포를 수십문이나 보유한 반면에 히데요리측은
고작 몇문에 불과했고 이것을 나무로 만든 목포로 대체하여 화력에서 이에야스측 보다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이에야스 측의 대포도 유럽 대포에 비하면 약하니 치명타를 주는 수준이 아니라서 근접전과
공성전도 여전히 시행되었는데, 첫째 일본의 대포는 가장 큰 것도 5~6kg의 포탄을 겨우
날리는 소형포였기에 야전이나 공성전에서 공포스러운 효과를 발휘하기에는 위력이 부족했습니다.
둘째로 무거운 대포를 끌고 다니기에는 체격이 작은 일본 말로는 역부족이었으니, 조선이나 중국은
대포를 끌때 소를 활용했는데 일본도 소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매우 드물었으니...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에서 노획한 대포를 사용하거나 직접 주조하여 반란 진압에 사용했습니다.
막부 말기 조슈번이나 사쓰마번이 영국등 서양선과 싸울 때 사무라이들이 낡은 청동 대포를 창고에서 꺼내어
쏘았으나..... 오히려 대포가 폭발하여 일본군의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고장도 잦고 화력은 약했습니다.
조선은 광해군이 재위하던 시대였는데,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소식을 들은건 전투 종료후
몇달 뒤 대마도주를 통해 알려졌고.... 명나라와 후금 또한
조선에서 보낸 서찰과 상인, 간첩들을 통해서 전쟁 종결 3년 뒤인 1618년에야 알게 됩니다.
히데요리는 1593년 히데요시가 57세때 태어났는데 어머니 요도기미는 아사이 나가마사 (浅井長政)의 처(妻) 로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 의 여동생 오이치의 장녀 차차 인데.... 차차의 여동생 고우는 2번 결혼한적이
있음에도 핏줄 덕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결혼해 태어난 센히메 (千姫) 는 이종사촌인 히데요리와 결혼했습니다.
6살 센히메는 이모 요도기미를 시어머니로 불러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인데, 오사카성 함락당시 이에야스는 손녀인
센히메를 구출하니 그녀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측실에게서 난 딸 나아히메(奈阿姫) 가 처형당할 위기에
놓이자 구해서 양녀로 삼았다가 출가시키니 덴슈니 (天秀尼) 라는 법명을 받고 불문에 귀의한후 36세로 죽습니다.
다음해 1616년 막부를 반석에 올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죽었으며 19살 센히메는 쿠와나 번주 혼다 다다카쓰
의 손자 혼다 다다토키와 재혼했고... 곧 히메지 성주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가서는 히메지성의 안주인이
되는데 히메지성은 구로다 간베에 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혼다씨 성이 되면서 화려하게 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