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창고

공예(工藝)실용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를 함께 지닌 조형물의 총칭.

작성자자운|작성시간09.08.19|조회수199 목록 댓글 0

공예(工藝)실용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를 함께 지닌 조형물의 총칭.생활에 유용한 물건을 제작하는 공업기술과 미술 두 분야가 결합하여 유기적인 통일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된다. 따라서 단순한 도구적 기능과 심미적 기능 중 어느 쪽을 선택적으로 추구하는 경향과는 구별되며, 근대적인 예술관이 성립된 뒤에는 미술의 한 분야로 분류되고 있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공예의 개념과 고유영역은 명확히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미술공예·산업공예·민속공예등 수요층과 제작방법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공예는 미술과 공업기술이 미분화된 상태로 존재하면서 국가 기간산업의 구실을 해왔다. 또한 관청수공업체에 소속된 공장들은 기술의 성격에 따라 여러 전문분야로 나뉘어 제작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부터 기계생산방식과 서구의 예술관이 도입되고 생활구조가 급변하면서 수요기반이 허물어져 미술과 공업 사이에서 공예의 개념과 영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탈봉건·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해야 할 시기를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보냄으로써 우리 공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안은 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공예와 산업을 분리시킨 일제의 공산정책(工産政策)은 공예계가 새로운 공업디자인 분야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80년대초에는 그 동안 공예의 본령으로 여겨져왔던 실용적인 면이 배제된 채 심미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흐름이 생기기도 했다. 공예라는 용어는 문호개방 이후부터 쓰이기 시작했으며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공예부가 신설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 이전에는 '생활한다'나 '일한다'는 뜻을 지닌 '성녕'이라는 우리말이 일반적으로 쓰였다.공예의 종류는 재료에 의해서 금속공예·도자공예·목칠공예·염직공예·유리공예·옥석공예·지공예·가죽공예·골각공예 등으로 분류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조선초 경공장(京工匠)에 각종 공예기술 분야가 129종이 있었으나 근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단절되고 30여 종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이 가운데 현대공예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금속공예·도자공예·목칠공예·염직공예 네 분야이다. 제작기술에 의해 분류되는 전승공예 분야와는 달리 재료에 의해 새롭게 나뉜 이 네 분야는 조선미술전람회 공예부의 출품작 분류기준에서 비롯된 것이다. 1950년대말 대학에 공예 전공학과가 설치되면서 현재와 같이 굳어지게 되었다.금속공예선사시대부터 우리나라 공예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던 금속공예는 BC 700년경인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다. 초기에는 청동검·동모(銅) 등 무기 및 종교의식에 필요한 의기(儀器)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농경문청동기·쌍두령(雙頭鈴)·팔두령(八頭鈴)·다뉴세문경(多細文鏡) 등은 의기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가운데 다뉴세문경은 청동기시대 미술을 대표하며 당시 공예기술의 수준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동검과 동모의 거푸집[鎔范] 발견은 청동기의 국내 주조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철기시대에는 무기·농기구 등이 주로 제작되었다. 강하면서도 성형(成型)이 쉬운 장점을 가진 철은 각종 생활용기는 물론 생산도구에 발전을 가져와 공예품의 질을 높이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고분에서 발견된 귀금속 공예품을 통해 우리나라의 금속공예가 4~5세기경에 이미 정교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누금(金)·타출(打出)·투각(透刻)·감장(嵌裝)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제작된 이 시기의 금속공예품들은 계세사상(繼世思想)에 기초한 당시의 사후세계관에 따라 피장자의 내세를 위해 주로 무덤에 부장했던 것들이다. 관모에서 귀걸이·목걸이·반지·허리띠·신발에 이르기까지 신체의 각 부위를 화려하고 장엄하게 치장했는데, 이것은 지배계층의 신분적 위계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귀금속 위주의 금속공예는 삼국·통일신라 시대를 기점으로 재료가 점차 구리·철 등으로 바뀐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져 일반공예품은 물론 대부분의 불교공예품도 구리를 소재로 제작되었다. 종·향로·금고(金鼓)·운판·정병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고급재료를 쓰지 않는 대신에 구리 그릇의 표면에 은실을 감입하여 정교한 상징문양을 새겨넣는 은입사(銀入絲) 기법이 크게 성행하여 종교적 장엄효과와 함께 고려사회의 귀족적 취향을 반영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금속공예의 화려한 치장경향은 사라지고 실용위주의 일상용기를 제작하면서 제기(祭器)에도 유기(鍮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실용적 경향은 금속공예기술의 퇴보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특수층이 전용하던 금속기명이 서민층에까지 저변화되는 기회가 되었다.도자공예도자공예는 생활용기로서의 실질적 기능은 물론 전통시대 미술의 중요한 표현매체로서도 매우 이른 시기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각 시기를 대표하는 토기·도기·자기의 종류와 다양한 기법들은 공예기술의 발전과정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선사시대에는 즐문토기·무문토기·홍도(紅陶)·흑도(黑陶)·김해식토기가 각 시기별로 삶의 조건을 개선하려는 선사인들의 의지와 기원을 담아내면서 점차 발전했다. 삼국시대에는 김해식토기의 전통을 토대로 하여 삼국이 각기 다른 형식을 보이는데, 원통형에 가까운 고구려 토기와 백제의 회색삼족토기, 신라의 고배(高杯)·장경호(長頸壺)·높직한 기대(器臺) 등은 그 좋은 예이다. 현재 전하는 대부분의 토기들은 금속공예품과 함께 부장용으로 묻혔던 것들인데, 이 가운데 기마인물형토기·압형(鴨形)토기·가형(家形)토기·주형(舟形)토기 등은 사물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해냄으로써 조형미에서도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기형(器形)과 문양에서는 다소 변화를 보인다. 장경병·유개합(有蓋盒) 등은 앞시기에 없던 새로운 기형이며, 특히 발전된 가마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이 무렵에 축적된 녹유계 자연시유의 경험은 고려청자의 발생에 하나의 디딤돌 구실을 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경질토기가 생활용기로 계속 제작되었으나 대표적인 것은 역시 청자이다. 우리나라 청자는 중부 연안지대에 유입된 중국 북방계의 산화염 청자기술과 강진·부안에 들어온 남방 월주요계통의 환원염 청자기술로 구분되는데, 이 가운데 남방계통의 영향이 더욱 컸다. 3% 내외의 철분이 섞인 장석유의 청록빛이 감도는 깊은 유색을 특징으로 하는 청자는 그 발생시기에 다소 이견이 있으나 늦어도 10세기경에는 상당히 우수한 청자가 제작되었고, 11세기와 12세기에는 절정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2세기경에는 정돈된 기형과 비취빛의 발색효과에 관심을 쏟았던 순청자와 달리 흑백토로 운학·국화문 등을 정교하게 시문(施紋)하는 상감청자가 새롭게 유행했다. 고려청자의 우수성은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독창적으로 창안해낸 상감기법은 중국보다 앞서 시도된 진사(辰砂)기법과 함께 세계도자역사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산화염 번조기법이 들어와 유색이 변질되고 인화문(印花紋) 시문기법이 대두되는 등 변화를 겪으면서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분청사기는 제작기법에 따라 감화(嵌花)·인화·박지(剝地)·조화(彫花)·철화(鐵畵)·백토(白土)분청 등으로 나뉜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제작된 분청사기는 상감청자의 말기적 현상에서 점차 백자로 이행해가는 변화의 추이를 보여주면서 서민적인 느낌을 주는 그릇이지만, 고급백자와 함께 왕실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한편 백자는 조선시대 전반에 계층을 초월하여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특히 왕실과 중앙관서용은 관청수공업체인 사옹원(司甕院)을 통해 조달함으로써 백자의 질을 일정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유백색의 유약 빛깔을 바탕으로 하여 사군자·용·길상문자 등 다양한 문양을 청화나 철화안료로 시문하는 경향도 순백자와 더불어 조선백자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조선 말기 이후에는 수요층이 크게 저변화하는 대신 질적으로는 퇴조의 양상을 보이면서 근대로 이행된다.목칠공예목공예는 자연산의 목재를 직접 이용하기 때문에 제작과정이 단순하여 비교적 오래 전부터 활발하게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단층 목조를 골격으로 한 건축구조와 온돌 위의 평좌식 생활을 오랜 전통으로 하는 우리의 생활구조는 목공예의 다양한 종류와 폭넓은 사용을 촉진시켰다. 청동기와 철기시대에는 도끼를 비롯한 벌목용 도구를 통해 목공예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확인되며, 최근에 창원 다호리 출토의 대바구니·목관 등은 이를 뒷받침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삼국시대에는 마족형 탁자가 그려진 고구려 벽화와 백제 무령왕릉 출토의 금은장식칠관, 그리고 신라의 궤개전(机槪典)·칠전(漆典)을 비롯한 목공예 관계의 각종 관서는 목공예품이 부장용은 물론 일상용품으로도 다양하게 쓰여졌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뛰어난 공예기술을 바탕으로 당시의 귀족취향과 어울리는 나전칠기가 경함·염주합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었으며, 그 우수성을 인정한 중국왕실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임시로 설치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가구는 쓰임새는 물론 조형미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엄격한 남녀유별의 유풍과 청렴·검소하면서도 격조있는 삶을 추구했던 당시의 숭문기풍(崇文氣風)을 바탕으로 남성 전용의 사랑방과 안방 및 부엌 등 수요층의 신분과 사용목적에 따라 가구양식도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면서 발전했다. 별도의 장식이 없이 나뭇결을 살린 단순한 구조를 통해 쾌적한 비례와 함께 수준 높은 조형미를 창출해낸 사랑방 가구는 백자와 더불어 조선시대 공예의 백미로 꼽힌다.이밖에 염직·유리·가죽·종이·석공예 등이 각 시기의 생활구조와 맞물려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공예의 다양성은 조선시대의 경공장에 소속되었던 129종의 각종 공예기술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그러나 개화기와 근대기에 들어서 생활환경 및 제작수단이 크게 변화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공예전통이 전반적으로 해체되었다. 특히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조선미술전람회의 공예부를 통해 형성된 여러 부정적 체질은 오늘의 새로운 공예전통 수립에 적지 않은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장식예술디자인(design)어떤 구상이나 작업계획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과정.또는 마음속에 이미 세워져 있거나 밑그림(또는 모형)으로 나타낸 구상이나 계획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유럽에 대한 나폴레옹의 구상도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고, 이듬해에 만들 자동차의 모형도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계획을 실행하는 것은, 처음에 예상하지 못했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 계획을 계속 발전시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엄밀한 의미에서 디자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결과는 디자인이 아니지만 그속에서 발견되는 앞선 구상이나 계획은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예컨대 단테의 〈신곡〉 줄거리).어떤 창작품을 만들기 위한 원형이 되는 구상이나 계획은, 일관성이 있고 효과적인 하나의 전체를 만들기 위한 각 부분의 상호 관계를 주로 나타내는데, 대개는 4가지의 제약 요인이 고려된다. 즉 쓰이는 재료의 성능, 재료를 적용하는 방법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 전체에 속해 있는 부분들의 상호작용, 그리고 작품을 보거나 사용하거나 작품과 관련 맺을 사람들에게 작품 전체가 미치는 영향 등이다. 디자인이 창작품을 만들기 위한 견본이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응용미술 작품과 동의어이고, 이때 디자이너는 응용미술가를 말한다. 순수미술에서 디자인은 흔히 그 자체가 창작의 한 과정으로 여겨지는 반면, 공학에서는 적절한 개념과 경험을 구체화하여 명확하게 나타낸 기록을 의미할 수 있다. 건축과 상품 디자인에서는 디자인의 예술적 측면과 공학적 측면이 하나로 융합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서, 건축가나 공예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의 산업 디자이너는 오직 공식에 따라서만 디자인할 수도 없고, 화가나 시인이나 음악가만큼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것이다.디자인은 모든 예술, 특히 예술 교육에서 폭넓게 쓰는 용어이며, 구성이나 표현양식 또는 장식을 의미한다. 구성은 하나의 사물 안에 존재하는 요소들간의 관계의 기본틀이며, 분석적으로 볼 때 각 부분이나 전체와는 분리된 것으로 간주된다. 예컨대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의 디자인'이라는 말에서 '디자인'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신고전주의적 디자인은 신고전주의 표현양식을 의미한다. 올오버(allover) 디자인은 어떤 장식이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면서 하나의 평면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낱말은 이처럼 여러 분야에서 제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폭넓게 쓰이기 때문에, 글의 앞뒤 관계를 고려하여 그 의미가 파악된다. 그러나 가령 항공학에서 말하는 디자인은 또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혼란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산업 디자인, 시각 디자인공예(옥스포드 미학사전)Craft(공예)는 현대 미학 안에서 두 가지의 서로 관련된 의미를 발전시켰다. 공예는 그리스의 techne와 로마의 ars 시대로부터 18세기까지 내려오는 "art(예술)"와 동일한 의미로서, 제품이나 행위에 있어서의 인간의 능력을 나타낸다. 공예는 또한, 어떤 능력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는 활동이나 오브제(object)를 나타낸다. 1750년 경 "순수미술(fine arts)"이 일반적인 미술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공예"는 숙련된 행위와 그것의 생산품이라는 기존의 관념 안에서 미술의 유의어로 남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세기의 관습이 순수(fine)를 순수미술(fine art)로부터 떨어뜨렸을 때, 순수미술과 일반적인 미술 사이의 대비는 예술과 공예 사이의 대비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다른 용어도 사용되고 있기는 하다 : 실용예술(useful arts), 장식예술(decorative arts), 산업예술(industrial arts)). 19세기 중반까지, "예술 대 자연"이라는 기존의 대비는 "예술 대 공예"라는 새로운 극성(polarity)으로 대체되었다. 역설적으로, "공예"가 인간 기술의 산물이라는 예술의 옛 의미를 취했음에 반하여, 예술 대 공예라는 새로운 한 쌍 안에서의 "예술"은 이제 자발적인 창조로서의 자연의 모델로 스스로를 생각한다. 새 극성의 구조 안에서, 4개의 요소가 공예의 개념과 연결하여 생각된다 : (1) 기능의 탁월함, (2) 수공 기술과 전통적 형태의 우월함, (3) 시장의 요구와의 약속, (4) 순수미술의 위풍에 비하여 낮게 여겨지는 매체의 사용(시각 예술 안에서의 점토, 금속, 섬유, 나무와 노래, 춤, 그리고 음악과 문학의 스토리 형태)"공예의 미학" 등의 용어의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는 마치 그것이 승격의 증거인 것처럼 누군가 공예를 현존하는 미학의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일상에서의 미학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인 미학이다.소외(疏外 : alienation)사회과학에서 자신의 주변, 노동 및 노동의 산물, 자아로부터 멀어지거나 분리된 듯한 감정상태를 가리키는 말.현대 사회생활을 분석하는 데 많이 쓰이지만 이 소외라는 개념은 여전히 난해한 개념으로 남아 있다. 가장 보편적인 의미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력감:자신의 운명이 자기 스스로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외적인 힘이나 숙명, 또는 운이나 제도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듯한 느낌, ② 무의미성:세상사나 대인관계와 같은 모든 활동영역에서의 이해가능성 또는 일관된 의미의 부재, 또는 삶에 대한 전반적인 목적상실감 등, ③ 무규범성:공유된 사회적 행위규범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광범위한 비행의 확산, 불신, 무제한적인 개인의 경쟁 등을 초래하는 것, ④ 문화적 소외:사회의 기존가치들로부터 멀어져 있는 듯한 감정으로, 예를 들면 관습적인 제도에 대한 지식인이나 학생들의 저항에서 볼 수 있는 감정, ⑤ 사회적 고립:사회적 관계에서 느끼는 고독감이나 배척감, 즉 소수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고립감, ⑥ 자기소외:정의하기가 가장 어려운 개념이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중심주제가 된다. 여러 가지 점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괴리감을 말한다.서구 사상에서도 소외개념은 항상 인식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1935년 이전에는 사회과학의 주요참고 서적에 소외에 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19세기와 20세기초에 이미 카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페르디난트 퇴니에스, 막스 베버, 게오르크 지멜의 사회학 고전들에는 소외개념이 암시적 또는 명시적으로 나타났다. 그중 자본주의하의 소외된 노동을 얘기했던 마르크스의 소외개념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하의 노동은 자발적·창조적이기보다는 강제적이며, 노동자는 노동과정을 거의 통제할 수 없다. 노동의 산물은 타인이 전유(專有)함으로써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데 사용되고, 노동자 자신은 노동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된다. 소외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종적인 존재'(species being)를 실현할 수 없으며 노동 속에서 인간의 본질이 실현되지 않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현대사회의 소외에 관한 사상 가운데 한 가지 흐름을 대표하고 있을 뿐이다. 2번째 흐름은, 탈소외(dealienation)의 전망에 관해 마르크스주의보다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지만, 이른바 ' 대중사회' 이론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입장이다. 19세기와 20세기초의 산업화가 가져온 사회적 혼란을 지켜보면서, 뒤르켐과 퇴니에스(결국 베버와 지멜도 마찬가지임)는 전통사회의 몰락과, 그에 따르는 공동체 의식의 상실을 한탄했다. 현대인은 전례없이 고립된 상태에 빠졌다. 현대의 개인은 도시화하는 대중 속에서 이름도 개성도 상실했고, 아직 새로운 합리적·관료적인 질서에 대한 믿음도 얻지 못한 채 옛 가치들로부터도 뿌리뽑히게 되었다. 소외개념에 대한 가장 명확한 표현이 뒤르켐의 아노미(anomie:그리스어로 '무법상태'라는 뜻의 anomia에서 유래) 개념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노미란 개인주의의 만연과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사회규범의 해체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적 상황을 말한다. 베버와 지멜이 뒤르켐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켰다. 베버는 사회조직에는 합리화와 형식화로 향하는 근본적인 흐름이 있다고 강조했다. 개인적인 관계는 작아지고, 비인간적인 관료제도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지멜은 한편으로 주관적·개인적인 것과, 또 한편으로 점차 증대되는 객관적·익명적인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사회생활의 긴장을 강조했다 (→ 색인 : 마르크스주의).앞에서 언급한 소외에 대한 현대적인 개념규정들, 즉 무력감, 무의미성, 무규범성, 문화적 소외, 사회적 고립, 자기소외 등은 개략적인 지침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후기의 저술가들은 어떤 범주를 통해서든 아주 다른 개념들을 발전시킨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소외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기 스스로에 대해 '괴리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후기 저술가들은 소외의 개념정의에서뿐만 아니라 이 개념의 전제부터 서로 다르다. 대립적인 전제 가운데 2가지가 규범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다. 첫째,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미국에서는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와 에리히 프롬, 프랑스에서는 조르주 프리드만과 앙리 르페브르)은 소외를 규범적인 개념으로 파악하고 인간의 본성이나 자연법 또는 도덕원리에 바탕을 둔 어떤 기준에 비추어서 기존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취급했다. 둘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소외를 개인의 의식과는 독립된 객관적인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노동에서 '행복한 로봇'이 되는 것은 자신의 노동체험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관계없이 소외당하는 것이다. 한편 어떤 학자들, 즉 일반적으로 미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소외는 하나의 사회심리학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곧 소외란 무력감의 체험, 소외된 듯한 감정이다. 이러한 가정은 일탈행동(逸脫行動)의 분석과 묘사, 즉 로버트 K. 머턴과 톨콧 파슨스와 같은 이론가들의 저술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 색인 : 자기).아르누보(Art Nouveau)1890경~1910년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예술 양식.길고 구불구불하며 유기적인 선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인데, 주로 건축물, 실내장식, 보석세공, 유리 디자인, 포스터, 삽화 등에 쓰였으며 19세기 예술과 디자인의 대부분을 주도했던 모방적 역사주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려는 계획적인 시도였다. 이것은 영국에서 처음 발달했으며 곧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었는데, 독일에서는 유겐트슈틸,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체시온슈틸,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레플로레알레 또는 스틸레 리베르티, 스페인에서는 모데르니스모 또는 모데르니스타라고 부른다. 아르 누보란 아르 누보 작품을 많이 전시한 파리의 한 화랑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영국에서는 이 양식이 19세기 초엽 시인이자 예술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연한 데생에서 시작된 선형주의(線形主義)의 전통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의 직접 효시는 유기체선(有機體線)의 우수한 표현미에 많이 의존했던 삽화가 오브리 비어즐리의 심미주의, 그리고 응용 미술에서 생동감 있는 양식의 중요성을 확립한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이다. 유럽 대륙에서는 화가 폴 고갱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표상적인 선을 이용한 실험작품들로 아르 누보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운동은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는 일본 판화의 선형적인 도안이 유행하면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아르 누보의 뚜렷한 장식적 특징은 파동적·비대칭적인 곡선이며, 이것은 흔히 꽃줄기와 봉오리, 포도 덩굴손, 곤충의 날개 등 미묘하고 구불구불한 자연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선은 고상하고 우아하며, 매우 율동적이어서 채찍과 같은 힘이 가득 찬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픽 미술에서 선은 형상·조직·공간·색조 등 모든 회화 요소들을 그 자체의 장식효과에 종속시킨다. 건축물과 조형미술에서 모든 3차원(입체) 형태는 구조와 장식의 융합물을 창조하면서 유기적·선형적인 리듬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건축물에서 이러한 장식과 구조의 종합을 볼 수 있으며, 예를 들면 철물·유리·세라믹·벽돌 등 재료들을 자유롭게 조합하여 기둥과 대들보가 두꺼운 덩굴줄기마냥 덩굴손을 펼치는 모양이 되고, 유리창은 빛과 공기의 소통뿐만 아니라 유기적인 전체구조에서 막 모양의 부산물이 된다. 이러한 방법은 합리적이고 명확한 구조라는 전통적인 건축물의 가치기준과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상당히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아르 누보 양식의 작품을 만들었다. 유명한 작가들을 들어보면, 특히 오스트리아의 제체시온슈틸에 영향을 주었고 기하학적인 선을 전문적으로 사용했던 스코틀랜드의 건축가이며 디자이너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 매우 유연하고 섬세한 구조 양식으로 프랑스의 저명한 건축가 헥토르 기마르에게 영향을 주었던 벨기에의 건축가 헨리 반 드 벨데와 빅토르 오르타, 미국의 유리공예가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 프랑스의 가구 및 철공예 디자이너 루이 마조렐, 체코슬로바키아의 그래픽 디자인 예술가 알폰세 무하, 프랑스의 유리공예 및 보석 디자이너 르네 랄리크, 전통 구조를 가진 건물을 식물 모양의 아르 누보 철세공으로 장식했던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헨리 설리번, 선을 초월하여 건물들을 구근 모양의 곡선적이고 밝은 색조의 유기적 작품으로 변형시켜 아르 누보 운동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지목되는 스페인의 건축가이자 조각가 안토니오 가우디 등이 있다.1910년 이후에 아르 누보는 퇴조하여 결국 특징적인 장식양식으로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 누보는 20세기 디자인의 미적 통일성으로의 이행과정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고딕복고양식(Gothic Revival)중세 고딕 건축에서 영감을 받아 생겨난 건축양식.19세기에 신고전주의 양식과 견줄 만큼 미국과 영국에 널리 퍼졌으나 유럽 대륙에선 이 양식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딕 건축의 요소들을 되살린 건물로서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영국 작가 호레이스 월폴의 저택인 스트로베리 힐(Strawberry Hill)이다. 이 양식은 초기에 지어진 여러 건물과 마찬가지로 구조적 가능성이나 원래 기능을 무시한 채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멋을 내기 위해서 고딕 건축의 요소들이 사용되었다. 장식과 멋을 중요시하는 초기의 경향은 제임스 와이엇이 설계한 폰트힐 대저택(Fonthill Abbey)에도 나타나는데, 시골에 자리잡은 이 건물에는 높이 82m나 되는 탑이 있다. 이 건물은 중세의 생활에 대한 낭만적 동경 및 비실용성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처음에 이 양식은 개인저택에만 쓰였으나 1820년대 영국에서는 공공건물에도 고딕 요소를 쓰기 시작했다. 가장 잘 알려진 건물은 찰스 배리 경과 A.W.N. 퓨진이 설계한 새 의회의사당이다. 하나의 커다란 건물군을 이루고 있는 이 의사당은 초기의 회화적인 특징 대신 중세 영국 건축양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19세기 중반에 건설된 여러 건물의 기본이 되었다. 그뒤 더 화려하고 우아한 건물을 짓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열망에 따라 이 양식은 절정에 이르렀다.미국에서도 고딕 복고양식은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화려하지만 엄밀하게 계산되지 않은 초기 양식은 리처드 업존이 설계한 뉴욕의 트리니티 교회(1840)에 나타나며 영국에서처럼 부자들이 시골에 저택을 지을 때 즐겨 사용했다. 좀더 정확한 고증에 바탕을 둔 후기 양식은 렌윅의 세인트패트릭 대성당(1859~79, 뉴욕 시) 같은 건물을 비롯해 공공건물에 많이 쓰였다.이 시대의 주류가 신고전주의에서 고딕 복고양식으로 옮겨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3가지다. 첫째, 예술 전반에 걸친 낭만주의 혁명으로 고딕풍 이야기와 로맨스를 낳은 중세에 관한 문학적 관심이 자극되었기 때문이다. 월폴이나 월터 스콧 경 같은 작가들이 중세를 배경으로 소설을 써서 그 시대에 대한 향수와 기호를 불러일으켰으며 중세 수도원이나 성을 그린 풍경화도 이런 성향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교회개혁에 참가했던 건축이론가들이 고딕건축에 나타난 종교적 의미를 전달하는 글들을 썼기 때문이며, 셋째, 존 러스킨의 저서들이 종교적 도덕적인 충동을 강렬하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러스킨이 쓴 〈건축의 7등 Seven Lamps of Architecture〉(1849) 〈베네치아의 돌 Stones of Venice〉(1853)은 널리 읽혔으며 좋은 평판을 받았다. 그는 중세의 장인정신이야말로 도덕적으로 우월한 중세 생활방식을 반영하고 있다면서 옛날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프랑스 건축가 외젠 에마누엘 비올레 르 뒤크는 여러 저서에서 고딕 복고운동을 계속해 나가도록 고무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에는 고딕 요소가 희미하게 나타날 뿐이며 그가 복원한 고딕식 건물도 비현실적인 때가 많았다.고딕 복고양식은 19세기에 되살아난 복고양식들 가운데 가장 세력있고 생명력이 있었다. 1870년대 후반부터 시들기 시작했으나 영국과 미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도 교회나 학술연구소 같은 건물들은 이 양식으로 지어졌다. 새로운 건축 자재가 개발되고 기능주의에 관심을 쏟으면서부터 비로소 고딕 복고양식이 사라졌다.예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영국의 심미(審美)운동.전유럽에 걸쳐 장식예술에 대한 새로운 평가의 시작을 의미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장식예술은 진부해지고 그 양식과 장인의 기술, 대중의 기호 수준이 저하된 데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1860년경에 이르러 늘어나게 되었다. 그들 중에 영국의 개혁자이자 시인이며 디자이너였던 윌리엄 모리스가 1861년에 중세 장인들의 정신과 특성을 되찾는 데 헌신할 실내장식가 및 제조업자들의 회사를 설립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그중에서 건축가 필립 웨브, 화가 포드 매독스 브라운, 에드워드 번 존스)은 수제 금속세공품·장신구·벽지·직물·가구·책 등을 만들어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디자인 중 많은 것을 디자이너와 가구 제조업자들이 본뜨고 있다.서양의 건축 中러스킨의 건축관계 저술과 퓨진의 건축활동은 미술공예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건축가이며 사회개혁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르네상스 이후, 특히 산업혁명 이후 쇠퇴한 에술의 시회적 기반을 인식하고 공업 생산에 저항하며 중세의 정신적·미학적 원리가 담긴 수공예 제품의 복고를 주장했다. 그러나 결과는 시민들의 실생활문제를 해결하는 저렴한 제품을 생산하지 못했으며, 사회변혁을 이룰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못했다. 1859년 모리스를 위해 웨브가 설계한 벡슬리히스에 있는 ' 붉은 집'은 미술공예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모리스의 가르침은 애슈비(1863~1942)·크레인(1845~1915)·보이지(1857~1941)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딕 복고양식, 미술공예운동).실내장식 中18세기 후반에는 산업혁명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고, 많은 실내장식품의 기계 생산이 증가하고 있었다. 19세기초에는 양식에 우열의 차이가 없다고 하는 절충주의적 사고의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서로 다른 양식을 혼합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관념으로 이어지고 이러한 사고가 19세기의 전기간에 걸쳐 유행했고 20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유럽 주요국가들의 실내장식은 갈수록 중후하고 정교해졌으며, 대담한 무늬가 있는 밝은 색상의 벽지들이 널리 쓰였고 방들은 가구로 빽빽해졌다. 1830년대 로코코 양식이 부활되고 여기에 중국·일본 양식과 유사한 장식이 제한적으로 가미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로코코가 퐁파두르 양식으로 부활하고 신르네상스 시대가 출현했으며, 영국에서는 디자이너이자 작가인 윌리엄 모리스가 중세적인 착상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창했다 (→ 색인 : 미술공예운동). 그렇기 때문에 기계 제품들의 가능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1890년대에 발전된 아르 누보(Art Nouveau) 양식은 고딕 양식을 상기시키면서 최근에 수입된 일본 예술을 함축했다. 그것은 뚜렷하게 비대칭적이었고 꽃 장식을 주로 했으며 곡선을 강조했고 장식 모티프들을 어울리지 않게 병렬하는 데서 효과를 끌어내었다. 이러한 장식은 훗날의 아르 데코(Art Deco)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가 끝날 무렵 가구를 빽빽이 채우고 지나치게 공을 들여 꾸민 실내에 대한 반동의 기미가 강해지면서 흰색이나 아주 가벼운 색깔을 입힌 무늬없는 실내벽, 자연 그대로의 목재, 단순한 문과 벽난로 등이 20세기 전반에 일어난 변화의 하나였다.가구 中 근대편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물질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위축된 인간의 가치와 거기에서 비롯된 기계제품의 범람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주창된 미술공예운동(Arts &Crafts Movement)은 존 러스킨의 사상과 윌리엄 모리스의 실천력을 바탕으로 일어난 운동이며 모든 분야의 공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세의 공예가 정신과 수공예의 부활이 미학적인 현대감각과 합쳐지면서 가구의 단순성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동양풍의 직선적이고 유기적인 형태와 디자인이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여러 가지 양식을 모방·혼합하여 복고적인 가구를 만들었던 만큼 미술공예운동의 가구는 신선한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으나 고딕 양식의 부활에 치중하여 새로운 양식을 제시하지는 못하였다. 이 운동 초기의 가구 경향은 장식보다 재질감에 치중했으며 점차 여러 경향의 디자인을 폭넓게 시도하면서 유럽 각국에 폭넓게 파급되었다.공예상의 자연주의라고도 불리는 아르 누보(Art Nouveau) 양식은 식물·동물·곤충 등의 소재를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인 유선형의 유연한 곡선과 기하학적 원형으로 표현했으며, 특히 곡선들은 해초나 덩굴식물의 줄기와 같은 율동적인 흐름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대담함과 절대적인 전통적 요소의 혼합으로 루이 15세 당시의 로코코 재활을 위한 시도였다고도 볼 수 있다. 루이 15세의 책상, 루이 16세의 의자, 르네상스풍의 찬장 등을 선보였다. 유리나 주철과 같은 가소성 재료에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목재가구에서는 대단한 수공과 재료의 손질을 감내해야 했다. 가구 제작기술의 수준이 높아지긴 했으나 장식이 지나치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다.활자 中19세기 이후의 활자체와 서적의 도안산업혁명으로 인해 작업과정이 기계화되고 서적의 수요가 증대되자 인쇄과정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기계로 식자를 하게 됨으로써 서적의 외형이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식자기를 이용할 수 있는 활자의 종류가 제한되어 이전과 같이 한 권의 서적에 다양한 활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공예가이자 열정적인 사회운동가였던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는 산업혁명이 노동이나 작업에서 얻어지는 인간의 즐거움을 빼앗아갔으며, 수공업을 파괴시킨 기계화가 미적 아름다움을 상실시켰다고 주장하고 수공업을 근본으로 하는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했다. 모리스는 인쇄기술자 에머리 워커와 함께 켐스콧인쇄소(1891~96)를 설립하고 워커에게 중세의 필사체에 의거했던 초기 활자체의 아름다움과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는 새로운 활자체를 도안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과거로의 복귀가 더좋은 사회를 실현시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결과 손으로 만든 종이에 수동식 인쇄기를 사용하고 손으로 제본을 했다.켐스콧의 최고 서적으로 손꼽히는 〈초서 Chaucer〉(1896)는 인쇄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서적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데, 당대의 인쇄기술자나 도안공들로 하여금 완벽한 제작과정을 통해 서적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하도록 자극시키는 역할을 했다. 곧이어 영국·독일을 비롯한 유럽 대륙과 미국에서 모리스의 출판활동을 전형으로 한 민간 출판사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영국의 도브스출판사는 장식이나 그림 등을 배제하고 주로 활자체의 아름다움과 여백의 활용, 인쇄과정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단순하고 소박한 서적을 발행했다. 독일에서는 워커의 활자체와 손으로 만든 종이를 사용하여 주로 고전문학과 독일·영국의 문학작품을 발행하던 크라나흐출판사가 널리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출판에도 장식미술과 마찬가지로 생명력과 도덕성이 겸비되어 있으며, 동시에 시대적 감각을 반영하는 새로운 미술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아르 누보(Art Nouveau)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벨기에의 H. 반 데 벨데가 그 선두주자로 꼽힌다.Bauhaus정식 이름은 Staatliches Bauhaus. 독일의 디자인 학교.1919~23년 사이에 존속했는데, 1925년까지는 바이마르에 본거지를 두었다가 1932년에는 데사우로 옮겼고 베를린에서 문을 닫았다. 그란드 듀칼 색슨 예술 아카데미와 그란드 듀칼 색슨 공예학교를 합병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세워 바우하우스('건축의 집')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가옥 건물'이라는 뜻의 독일어 '하우스바우'를 거꾸로 조합해 만든 이름이다. 바우하우스에서는 그로피우스가 예술의 모태인 건축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았던 여러 가지 수공예를 가르쳤다.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숙달된 기능을 동시에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이 2가지의 분리를 막으려고 시도했다.그 이전 19세기 중반에는 윌리엄 모리스(1834~96)가 이끈 개혁가들이 목적에 부합되는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는 우수한 수공예품을 강조함으로써 그와 같은 분야에 다리를 놓으려고 시도했다. 1890년대에는 이러한 노력들이 미술공예운동으로 이어졌다. 미래에 대한 안목을 가진 바우하우스 디자인 학파들은 일상 생활의 모든 측면을 고려한 훌륭한 디자인에 정성을 쏟았으며 개인적으로 창안한 사치품에 역점을 두지는 않았다. 그로피우스는 이러한 노력이 20세기에 들어와 어떤 영향을 미친다면 기계적 생산이 디자인의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 학교의 방침을 대량생산 쪽으로 끌고갔다. 이러한 그로피우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이후의 현대 디자이너들은 부유층을 위한 개별 작품보다는 전체 사회를 위하여 쓸모있는 작품과 미적 즐거움을 주는 물품을 생산한다는 차원에 노력을 기울였다 (→ 색인 : 대량생산).바우하우스에 다니는 학생들은 실습에 들어가기 전에 요하네스 이텐과 조지프 앨버스, 라슬로 모호이 노디가 가르치는 6개월 과정의 예비학습을 받아야 했다. 목공·금속공·도예·스테인드글라스·벽화·직조·그래픽·인쇄·무대연출을 다루는 실습장에서는 대체로 이론을 강조하는 예술가(조형교수라고 불렀음)와 기능인 두 사람이 맡아 가르쳤다. 3년에 걸친 실습교육 후 학생들은 전문직공 자격증을 받았다.바우하우스의 교수 가운데에는 파울 클레(스테인드글라스·회화 담당), 바실리 칸딘스키(벽화 담당), 리오넬 파이닝거(그래픽 담당), 오스카 슐레머(무대연출 담당), 마르셀 브로이어(실내장식 담당), 헤르베르트 바이어(인쇄·광고 담당), 게르하르트 마르크스(도예 담당), 게오르크 무헤(직조 담당) 등 20세기의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이 있었다. 만들어진 작품들은 아주 다양했지만, 입면체와 직4각형, 원형에 기초를 둔 특수한 스타일이 바우하우스의 특징으로 여겨졌다.바우하우스의 구성원들은 1919년부터 건축에 관여했다(특히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사우의 행정과 교육·주거 단지). 그러나 이 특수한 학교에 대한 그로피우스의 계획에 중심을 이룬 건축부는 1927년에 이르러서야 만들어졌다. 건축부 학과장으로는 스위스의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가 지명되었다. 그 이듬해 그로피우스가 사임하자 마이어가 1930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었다. 마이어는 정치적으로 극좌파로, 데사우 당국과 다투었기 때문에 사임하게 되었다. 그후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가 1933년 나치군이 학교를 폐쇄하기 전까지 새로운 교장으로 있었다.바우하우스는 여러 방면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바우하우스의 공장 제품들은 널리 모방되었으며 일상생활에 쓸 여러 가지 물품들을 편리하고 수수하게 설계하는 것이 널리 보급되었던 것은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개념과 모형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교수법과 교육이념은 전세계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보급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예술 교육과정에는 바우하우스처럼 학생들이 기초적인 디자인 요소를 습득하게 하는 교육과정이 들어 있다. 바우하우스가 장려한 교육 사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37년 시카고에서 뉴바우하우스(뒤에 디자인 연구소로 개칭)를 세웠다가 같은 해 그로피우스를 하버드대학교 건축학부 학과장으로 지명한 모호이 노디의 업적이 있다. 1년 후 미스는 시카고로 이주하여 일리노이공과대학교에 건축과(그당시에는 아머 연구소)를 세웠으며 후에 그 캠퍼스를 직접 새로이 설계했다.더 읽어 볼 책들예술과 사회의 관계, 기본 역사서아놀드 하우저, 백낙청 역,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고대 중세 근대 현대편 4권), 창작과비평사예술로부터의 공예의 소외래리 쉬너, 김정란 역, 예술의 탄생, 들녘. 2007야나기 무네요시에 관련해 나카미 마리, 김순희 역, 야나기 무네요시 평전 - 미학적 아나키스트, 효형출판. 2005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에 대한 비판이데카와 나오키, 정희균 역, 인간부흥의 공예, 학고재, 2002디자인의 개념과 현대사회의 관계김민수, 21세기 디자인 문화탐사, 솔출판사. 1997 현대 예술의 개념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소논문)진중권, 현대미학강의, 아트북스. 2007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