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침략을 주장하다 몰락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의 고향 가고시마현의 이토 유이치로(伊藤祐一郞) 지사는 사이고는 조선에 평화 교섭단을 파견하려 했던 견한론(遣韓論)자라고 주장했다. 사이고를 청렴결백한 무욕의 소유자라고도 평가한 이토 지사는 교육 현장에서 그의 본래 모습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며 교과서에 견한론도 병기하도록 출판사에 요청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토 지사의 이 같은 답변은 가고시마 지역을 중심으로 뿌리 깊게 퍼져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재평가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이미 연구자들은 사이에서는 사이고가 조선과의 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견한론자라는 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재평가론자들은 사이고가 침략적 이미지인 정한론자로 낙인 찍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분개하고 있다.
일본 교과서에는 사이고를 무력으로 조선을 개국하려 한 정한론자로 기술하고 있다. 당시 쇄국정책을 고집한 조선이 일본의 수교 요구를 번번이 거부하자 사이고 등이 앞장서 정한론을 정부 입장으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내부 불만을 바깥으로 돌리려는 정략적 판단이 담겨 있었다. 사실 1873년 정한론이 처음 거론되었을 때는 정치권의 가벼운 화두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의견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정치권은 정한파와 반정한파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과 유럽을 시찰하고 돌아온 사절단이 전쟁보다는 내치를 우선해야 한다고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고, 사이고는 결국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 사학을 창설하는 등 인재 양성에 주력하다 1877년 정부군에 맞서 세이난(西南)전쟁을 일으켰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메이지유신 3걸 중에 한명인 사이고는 메이지유신으로 몰락한 무사들에 대해 늘 동정적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정한론이야말로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시켜주는 동시에 그들의 지위를 다시 상승시켜 줄 수 있는 해결책으로 보였다. 정말 정한론이 정부내의 갈등을 해소시켜 줄 수만 있다면 자신의 한 목숨은 아깝지 않다는 감상주의가 사이고의 내면에 흐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이고는 자신이 무사들에게 보여 준 동정보다도 더 큰 애정과 존경을 지금까지 일본국민으로부터 받고 있다. “이름도 필요 없다, 돈도 필요 없다, 지위도 명예도 목숨도 필요 없다는 남자가 제일 상대하기 힘들다. 바로 그런 사람이라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다.” 사이고가 한 말이다.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인간은 아무리 누르려 해도 도저히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