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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는 우리 역사로 편입돼야

작성자Jaybe|작성시간12.12.09|조회수183 목록 댓글 0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한국사로서의 금의 역사'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면서 역사학적, 민족학적, 영역적, 관계사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김 교수는 그 대표적인 근거 중 하나로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혹 고려)에서 옮겨 온 유민이고 나라를 세울 때 협력한 발해 유민들은 곧 고구려계라면서 아골타 근족들의 혼인 대상 민족은 요양에 거주하던 발해 귀족의 여식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주 지역에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나 고조선(단군조선,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까지 강대한 국가를 유지·경영하다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 내로 위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러나 만주지역에서의 우리 역사는 여기서 단절되지 않았으며 금나라도 우리나라 역사의 범주 내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는 신라, 백제와 함께 3국의 한 축이었으며 발해는 신라와 남북국을 이루었고, 금나라 또한 고려와 다시 남북국을 이루었던 우리역사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라가 무기력하게 망했다고만 생각했다. 심지어 이등박문이 고종을 협박하여 양위시킬 때도 신라 경순왕을 인용하면서 양국(讓國)이 마치 한국의 전통인 양 놀려댔다. 또한 그 뒤에 친일파 이광수가 소설 ‘마의태자’를 써서 마의태자의 금강산 입산을 널리 기정사실화했다. 광복 후에도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히트하여 신라는 백제와 달리 두말하지 않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것으로 알게 됐다.


그러나 금강산의 태자 유적지를 가나 설악산의 유적지를 가나, 마의태자는 아버지인 경순왕 앞에서 말했듯이 천명이 아니고서는 신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고 충신 의사를 모아 끝까지 역전사수(力戰死守)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의 후손인 김씨들이 여진에 가서 금나라를 세웠고, 금나라의 후예인 후금 즉 청나라를 세웠다. 신라인이 여진족의 추장이 되었다는 것도 금사, 송막기문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금나라의 주거방식은 한민족의 고유방식인 온돌이었고, 금나라의 지배계층엔 발해인이 많이 포함 되어 있었다.


여기서 꼭 해두어야 할 말은 지금까지 중국의 역사로 알던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의 역사는 우리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감히 중화를 침범한 요와 금나라를 우리나라 역사 속에 끌어넣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발해는 겨우 우리 역사라 했으나 요나 금은 우리 역사의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것이다.


지금의 중국사가 성립된 것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중국사는 이른바 중화민족의 역사였다. 몽고는 물론 거란(요), 여진(금)의 역사는 중국사가 아니었다. 이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킨 것은 청나라였다. 청은 후금이요 여진의 나라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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