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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백제설에 대한 반박

작성자bellar|작성시간13.09.21|조회수361 목록 댓글 0

대륙백제설은 물적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즉, 백제식 무덤이나 유물이 중국에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대사는 근본적으로 고고학을 기준으로 편년과 기록의 진위 여부가 검증되어야 함을 생각하면, 이는 실로 치명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륙백제론자들은 오직 문헌과 정황증거만으로 대륙백제가 실존하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 송서, 양서, 남사에는 백제가 요서, 진평 2군을 차지했다고 나온다.


이는 대륙백제론자들이 최대의 논거로 삼는 것인데, 사실은 문헌에서 드러나는 최대의 약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송서(宋書), 양서(梁書), 남사(南史)는 근본적으로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시대 당시 남조(南朝)의 역사서인데, 요서, 진평 2군은 북조의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백제가 실제로 저 땅을 차지했다고 하면 북조의 역사서에 한 줄이라도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진서(晉書)의 5호 16국 관련 부분이나 북사(北史)에는 그러한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북사(北史)라는 책은 남사(南史)와 같은 사람이 쓴 책이라는데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쓴 책인데도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일부러 대륙백제 기록을 감추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말 감추려고 했다면, 일단 송서, 양서, 남사의 백제전의 맨 첫머리에 당당히 나오는 요서, 진평 백제군 얘기부터 없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 북사에서 삭제 했다면, 같은 사람이 쓴 남사에서도 당연히 삭제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버젓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재야와 몇몇 민족주의자들이 감정적으로 주장하는 중국인들에 의한 은폐와 삭제라는 것이 얼마나 근거 없는지 확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백제가 진출했다고 하는 요서, 진평은 5호 가운데 선비족이 건립한 전연(前燕)과 후연(後燕)의 영역이었습니다. 특히 후연은 수도 자체가 요서의 중심지인 조양(朝陽)이었습니다. 전국시대 이래로 요서군의 치소는 이 조양 인근에 위치했습니다. 이런 면으로 보면 백제가 후연과 동시기에 요서군을 점거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애초에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송서에는 백제가 요서, 진평을 차지한 시점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고구려가 요동을 완전히 영유하게 된 것은 광개토왕이 후연을 격파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국양왕이 이보다 앞서 요양 지역에 잠시 진출했음을 생각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백제는 이미 황해도 부근에서 고구려와 치열한 대결국면에 있었을 뿐 아니라, 조금씩 눌리고 있던 상황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강대한 적을 한성의 바로 북쪽에 두고, 또 대규모의 군대와 선박을 동원하여 아무 연고도 없는, 더구나 당시에는 고구려에 비해 우위에 서 있는 것으로 평가받던 후연의 중심지인 요서로 원정을 떠났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저 세종류의 사서는 서로 독립적이라고 하기가 힘듭니다. 송서(宋書)가 제일 먼저 편찬되었고, 양서와 남사는 사실 송서를 보고 쓴 책입니다. 같은 얘기가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에 반해, 송서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남제서의 백제전에는 요서, 진평 백제군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아서, 송서의 해당 기사가 대체 왜 나왔는지 더욱 파악하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학계의 과제는, 오히려 송서의 이런 오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밝히는 일이지, 백제의 요서 진출을 규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2. 구당서 백제전에는 백제가 서쪽으로 월주(越州)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월주는 양자강의 하구이다. 백제의 영토가 여기까지 이르렀던 증거이다. 그런 말이 확실히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신당서(新唐書) 백제전에는 좀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순서가 바뀌어서, "서쪽으로 월주와 경계하고 남으로는 왜이며 북으로는 고구려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 이에 이른다. 그 나라의 동쪽은 신라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당서와 비교해 보면, 신당서의 기록이 훨씬 명확합니다. 월주는 왜, 고구려, 신라와 동등한 위치에 놓여있습니다. 즉, 백제땅이 아닌 것이죠. 백제의 해외영토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영토확장주의 사학자들은 놀랍게도 여기에서 월주와 왜 까지만 말하고 고구려와 신라는 말하지 않고 감춥니다. 그걸 말 해 버리면 월주와 왜도 백제땅이 아니라는 게 명백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정도 쯤 되면 기록을 은폐하는 건 고대 중국인들이 아니라 현대의 한국인 재야사학자들입니다.   


3. 동성왕 때 북위의 군사가 백제를 침략했는데, 기병 수십만이라고 되어 있다.


북위와 백제 사이에는 고구려가 있었으므로 기병이 올 수 없다. 대륙백제와 북위 사이에 일어난 전투임에 분명하다. 사실 이 주장에는 많은 변용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북위는 선비족의 나라이다. 선비족은 유목민족이므로 배를 탈 수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이는 입에 담는 것 조차 비루한 주장이기는 한데, 이런 얘기도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써 보았습니다. 원래 백제-북위간에 전투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1차 사료는 남제서에 실린 동성왕의 표문입니다. 남제는 당시 북위와 대치중이었으므로, 수십만기라는 병력 규모는 실로 과장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동성왕의 표문에는, 백제 장수 목간나가 큰 선박을 격파했다고 쓰고 있어, 북위군의 침략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 군대는 배를 타고 온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4. 백제의 위덕왕은 북제로부터 동청주자사로 책봉 받았다.


청주는 오늘날의 산둥 반도다. 이는 북제가 백제왕을 산동 반도의 지배자로 인정했음을 확증하는 사료이다. 이런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서, 우선 과연 북제가 백제왕을 동청주자사로 책봉했다는 것이 무슨 효력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청주 라면 응당 산동의 중심인 청(靑)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앞에다 동(東)을 붙인 건 또 무엇일까요. 장수왕은 북위로부터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책봉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같은 시기에 북위에 거기대장군이 없었는가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지요.  책봉을 받은 사람은 사실 위덕왕(재위 554~598)뿐만이 아닙니다. 광개토왕은 영주와 평주의 군사(軍事)로 책봉 받은 일이 있습니다. 둘 다 난하 이동의 요서지역입니다.

 

영토확장주의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보고 광개토왕이 북경 근처까지 정복했던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확실히 글자만 보면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책봉을 받은 사람 가운데는 왜(倭)왕 무(武)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역사에서 웅략에 해당한다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남제(南齊)로부터 진한(신라)과 가야의 군사(軍事)로 책봉 받았습니다. 지명이 들어가는 책봉을 받았다는 건 곧 그 지역을 정복한 증거라고 주장하던 재야들은, 여기에 이르면 갑자기 말이 바뀝니다. 이런 태도는 대단히 비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한국의 영토만 넓히고 싶어 하는 영토확장주의 역사학입니다. 결론을 먼저 내 놓고 연구를 시작하지 말고, 외국의 지배자에 대한 책봉을 마구 내려준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먼저 생각을 해 봐야 할 것입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는 남조와 북조가 각각 전국의 절반씩만 영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명목상으로는 스스로 천하를 지배하고 있으며 상대편은 괴뢰 정권에 반란 도당에 지나지 않는다고 선전했습니다. 따라서 여러 나라들은, 자기 땅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기 땅이 아닌 지역에 대해서도 그 땅을 정벌하여 전국을 통일할 것을 전제로 해서 아무 실권이 없는 직위를 내립니다. 이런 것을 가수(假授)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5호 16국 때부터 굉장히 보편화되어있던 현상으로 무슨 자사, 무슨 태수 하는 관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외국의 왕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거창한 벼슬들을 내렸습니다. 벌써 국내에 그 벼슬을 갖고 있는 신하가 있어도 작위를 또 주었습니다. 직책이 곧 지배권을 뜻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명목과 실제가 일치해야 할 것입니다. 잘 알려진 예는, 조조가 유비를 예주자사로 봉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유비는 예주를 한 번도 지배해 보지 못했습니다. 조조는 유비를 회유하려고 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위덕왕 책봉 사건은 중국의 분열기에 일어났던 특이한 외교 현상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지, 그것 하나만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5. 송서에는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번에도 또 송서(宋書)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사실 이 기록은 송서의 오류가 원래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풀 수 있는 힌트가 될 수도 있지만 아무 이상할 게 없는 말일 가능성도 큽니다. 왜냐하면, 요동의 동쪽 천리라는 건 이미 요서도, 요동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요동의 동쪽에는 한반도도 들어갑니다. 북사(北史)에는 백제가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 세워졌다고 되어 있는데, 대방은 황해도 부근으로 비정되므로 송서의 기록에 문제가 없는 셈입니다.


6. 북사와 주서(周書)에는 백제가 진, 송, 제, 양 나라 때 강좌(江左, 강동이라고도 하는, 양자강 하류, 오늘날의 절강성 지역)를 모두 차지했다고 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이 주장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북사와 주서에는 그런 말 따위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 주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시작해서 송, 제, 양나라가 강좌에 웅거하고 후위(북위)는 중원에 자리하니,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번국이라 칭하였으며 작위를 받았다. 북제가 중국의 동쪽에서 세력을 떨치니 백제왕 융은 이번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다른 말은 다 지우고 "진, 송, 제, 양" 과 "강좌에 웅거" 만 빼내서, 백제가 강좌에 웅거했다고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북사에는 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시작해서 송, 제, 양이 강좌를 점거하니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번국이라 칭하였으며 작위를 받았는데, 위나라와도 계속 왕래하였다." 역시 다른 말은 다 지우고, "진, 송, 제, 양" 과 "강좌를 점거" 만 빼내서, 백제가 강좌를 점거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북사와 주서를 볼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이용해서 왜곡을 하고 있습니다.


7. 자치통감에는 부여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 쇠약해졌다고 되어 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대해, 한국사학계에서는 여기서의 백제는 고구려의 오기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치통감의 사료적 가치가 높기는 하지만 송나라 때 쓰인 책이며, 부여가 존재했던 당대의 기록 어디에도 부여가 백제와 인접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부여가 쇠약해진 것은 처음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고 그 다음에는 선비의 침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는 이것을 처음에 백제의 공격을 받고 그 다음에 선비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치통감에 의하면 부여는 백제의 공격을 받아 서천(西遷)하였는데, 백제가 요서에 있었다면 오히려 자신들을 공격한 백제의 가까이로 수도를 옮긴 셈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이 백제는 고구려의 오기로 여기는 것이 순리입니다.


8. 백제의 지명이 중국에 있다.


중국의 지명도 우리나라에 많습니다. 사비성이 중국의 사수 근처에 있었다는 말도 합니다. 이 비슷한 얘기로는 고려의 지명이 중국에 있다느니, 조선의 지명이 중국에 있다느니 하는 것 까지 있습니다. 한자 가운데 뜻이 좋고 쓰기 쉬운 것들은 거의 다 지명에 사용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비슷한 것은 아무데서나 발견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은, 서울에 테헤란 밸리가 있으니까 서울이 이란의 수도였던 게 틀림없다는 말도 할 사람들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보듯이 송서와 자치통감의 두 기록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송서의 경우에는 현실성이 떨어지고, 자치통감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오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대륙백제가 설치되었다고 하는 시기는 보통 4세기 후반~5세기입니다. 백제는 근초고왕대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였고, 황해도 북단에서 고구려와 사투를 거듭한 끝에 이로부터 불과 수십 년 만에 광개토왕의 침입을 받아 국운이 결정적으로 꺾입니다. 해외 영토를 경영할 만큼 대규모의 병력과 전선(戰船)을 동원하여 원정을 떠날 여유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백제가 해외영토를 보유하기는 어렵다고 봐야합니다. 백제는 부여족 일파의 종족명이었고 이들이 요서 부근에서 살다가 3~4세기에 황해를 통해 한반도로 이동하여 기존의 한(韓)계 지배층을 내몰고 고대국가 백제를 성립시켰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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