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304년부터 439년까지 북중국에서는 16개의 나라들이 흥기했다가 망하고, 서로 물고 물리고 물어뜯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대혼란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이 혼란기를 마감하고 북중국을 통일한 강력한 왕조가 세워졌으니, 그것은 선비족의 탁발씨(拓跋氏)부족이 386년에 세운 북위(北魏 386~534)이다. 북위는 439년까지 북쪽에 있던 여러 국가들을 차례차례 평정하여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또 북쪽에 북위가 건립되었을 때 남쪽에는 남제(南齊 479~502년)가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북위가 왜 백제를 침범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439년 마침내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는 자신의 영토 앞에 있는 백제가 무척 눈에 가시 같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488년 북위가 백제를 공격해 왔다. 백제의 동성왕은 젊은 군왕답게 이를 과감히 맞아 격퇴하였다. 이 백제군은 백제군과 남제군(南齊軍)의 연합군이었다.
자치통감 권136 영명(永明) 6년(488년)조의 기록을 보면,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했다. 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 진평 2군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요서, 진평 2군의 백제 땅에 관해 언급함으로써 북위가 공격해온 곳이 바로 하북성내 백제 강역이었음을 명백히 하였다. 위서 권7하 고조기(高祖紀)에 “태화 12년(488년) 소색(남제의 세조를 낮추어 부름)의 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 왔다. 갑인일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부대를 지휘하여 막도록 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태화 13년(489년) 정월 소색이 외국인 부대를 보내어 변방을 침략했다. 회양태수 왕승준이 반격해 쫓아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성왕 10년 (488년)의 백제-남제 연합군과 북위군의 전쟁은 대규모였으며, 이 전쟁이 끝난 후 동성왕은 다음과 같은 인사 조치를 행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하였다. 이 기록은 백제가 남제에게 보낸 외교문서 속에 포함되어 남제서에 채록되어 오늘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건위장군 광양(廣陽)태수 겸 장사인 고달을 용양(龍驤)장군을 대방(帶方)태수로, 건위장군 조선(朝鮮)태수 겸 사마인 양무를 건위장군을 광릉(廣陵)태수로, 선위장군 겸 참군인 회매를 광무(廣武)장군 청하(淸河)태수로 명하다.” <남제서 권58 동남이전(東南夷傳) 백제국조(百濟國條)> 대방태수가 임명된 대방군은 백제건국의 고토인 대방고지를 말한다. 광릉군은 양자강의 하류입구 북애(北岸) 부근을 말한다. 광양군은 북경 동북부에 위치한 상곡(上谷)지방이다. 청하군은 지금의 산동반도 임뇌, 창읍 지방이다.
즉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장군들의 계급을 승진시키고, 그 논공행상으로 백제영토의 太守로 임명한 것이다. 백제-남제의 연합군에 패전한 북위는, 490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하북성 지구의 백제를 공격해 왔다. 그 당시의 상황을 남제서(南齊書) 권 58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때 위나라 오랑캐가 또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왕 모다가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파견하였다.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위나라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이 490년(경오)의 전쟁 상황은 백제가 남제에 보낸 495년의 외교문서 속에도 묘사되어 있다. 즉 “지난 경오년 북위가 개전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와, 신이 사법명등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어 맞받아치고, 밤에 기습으로 번개같이 치니, 흉도가 당황하고 무너져 총퇴각하는지라 달아나는 적을 뒤쫓아 가면서 마구 무찌르니, 시체가 들에 깔리고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적의 예기가 꺾이고 그 사나운 흉행을 거두게 되어 이제 역내가 고요하고 평안하게 되었다.“
490년 경오년 전쟁에서 패한 위(魏)의 문제는 백제의 세력에 눌려 수도를 평성(平城 북경부근)에서 백제로부터 멀리 떨어진 낙양으로 옮긴다(493년). 전열을 정비한 북위는 다시 494년 12월 대군을 발하여 양양(襄陽), 의양(義陽), 종리(終離), 남정(南鄭)으로 쳐들어가 백제와 남제를 공격하였다. 남제군은 영주(寧州)자사 동만(董巒)을 비롯하여 3천여 명이 북위군의 포로가 되었다. 기세가 오른 북위군은 개전 2달 만에 위 효문제(孝文帝)가 직접 전투지인 종리에 까지 나타났다. 그러나 백제-남제연합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위군은 문제를 옹위하여 종리에서 쫓겨 달아나고, 북위의 장군 풍탄이 전사하는 등 결국 북위군은 총퇴각을 하게 된다. 그 뒤에도 태화 21년(497년, 동성대왕 19년) 6월 또 다시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남제 연합군을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498년 4월에도 또 전쟁을 걸었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만다. 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동안 무려 5회에 걸쳐 큰 전쟁을 치룬 북위는 국고가 탕진되어 재정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결국 태화 22년 7월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또 근위대의 1/3을 축소했다.
백제의 강역이었던 하북성, 산동성은 해발 1미터 미만 평지 옥토이고, 북위의 주무대인 산서성은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이며, 태행산맥은 성을 쌓을 수도 없는 해발 2500미터 이상 고산지대이다. 이 태행산맥을 중심에 두고 북위가 동쪽의 평야지대를 얻고자 하였으나 백제의 동성왕에게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와의 5차례의 큰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동성왕의 주무대는 과연 어디였을까? 식민사학계는 동성왕에 대해서는 이상스럽게 침묵하고 있다. 그 이유는 동성왕에 대한 기록이 명확히 사서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침묵하면서도 일부에서는 계속 동성왕 당시에 북위가 한반도로 건너와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위는 선비족으로 기마병이 주력부대였다. 기병이라 수군이 없어 바다건너 올 수도 없다. 그런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치룬 곳은 어디인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인가? 대륙에서 일어난 전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