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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와 민씨척족과의 정치적 유대관계

작성자jayel|작성시간15.01.05|조회수750 목록 댓글 0

민씨척족들은 명성황후의 간택으로 성장 집권한 세력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민씨척족들은 명성황후의 인척세력으로 정계에  등장한 게 아니라  흥선대원군의 외척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의 생모 부대부인 민씨가 민씨일족이었고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될 수 있던 것도 부대부인의 공로가 제일 컸다.


명성황후의 양오빠 민승호는 부대부인의 친동생이니 명성황후 간택 당시 대원군은 외척 지위를 안동김씨나 풍양조씨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처가 세력을 고종의 처가세력으로 삼아 이중으로 외척지위를 맡겼고 민씨 척족들은 국왕의 외가에다 처가까지 겸하여 그 지위가  굳어져서 장기적으로 대원군 퇴임 후 권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큰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민씨척족들의 집권의 기반을 만들어준 건 아이러니하게 흥선대원군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귀인 이씨의 소생 완화군을 책봉하여 여흥 민씨가 절대적인 외척세력으로 군림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이를 눈치 챈 민씨 척족들과 명성황후는 대원군 반대세력을 끌어 모아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 권력을 잡았다. 명성황후는 민씨 세도정권의 지도자이나 그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고 실질적으로 정권을 운영한건 민승호 민겸호 민태호 민영익 민영준 등 민씨척족의  권신들이었다


민승호 민겸호 등 민씨 정권 초기 지도자들은 운현궁 처남출신들이라 명성황후와 직접적인 혈연관계와 멀어서 현실적으로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운영하기 보다는 수평적인 관계로 운영하였고 민태호 민영익 부자는 세자빈 순명효 왕후 간택으로 성장한 세력이고 민영준 등은 조선에 주재한 청나라 원세개의 힘으로 권력을 잡았던 세력이라 현실적으로 명성황후에 절대적인 의존성을 띠지 않았다.


후일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은 4대 강령에서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를 없애자는 구호를 내건 것만 봐도 명성황후보다는 민씨척신들이 부패의 온상이었다. 갑신정변때 김옥균이 일차적으로 명성황후를 제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권력을 잡은 민씨 세도정권은 개화파까지 끌어들여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타파하고 통상개항을 추진하게 되어 열강들과 수교를 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게 되지만 극심한 정치적 부패와 보수 세력의 반발로 임오군란을 초래하였고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에 의해 다시 재집권하면서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되고 친청성향으로 민씨정권의 운영권은 사실상 청이 쥐면서 국왕 고종을 위협하는 권위적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그래서 고종은 김옥균의 급진 개화파와 함께 친청성향의 민씨정권을 타도하려고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청에 의해 실패하면서 청의 간섭체제는 강화되고 청일전쟁때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 외교로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청의 눈밖에나고 청나라 원세개는 고종 부부를 폐위시키고 이준용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지만 본국 정부의 비협조와 타 열강들의 반발로 무산되고 민씨 정권의 수장 민영익은 원세개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할 정도로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들은 동지 관계가 아니었다.


후일 명성황후가 박영효의 친일파를  실각시키고 친러 내각을 수립시킬 때 민씨척족들을 불러들이지 않고 박정양 등 신진 관료들을 내각의 주 세력으로 삼은 사실을 고려하면 명성황후와 민씨척족들의 유대관계는 그리 절대성을 띤 게 아니었다.


명성황후의 친족인 민영준이 나중에 민영휘로 개명하여 자신의 친족을 죽인 일본에 협조하여 친일파가 된 사실을 보더라도 명성황후와 민씨척족들은 일심화 된 정치세력은 아니었다. 상황에 따라 서로 연대하고 경계하는 이중성을 띤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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