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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작성자후니|작성시간06.04.05|조회수1,042 목록 댓글 0
 

인간의 악한 본성은 원래 악한 것이니, 선이란 인위적으로 된 것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면 서로 싸우고 빼앗기 때문에 양보란 있을 수 없을 것이요, 또 나면서부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면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할 줄만 알 뿐 신의나 성실성은 없을 것이다. 또, 귀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려는 감각적 욕망이 있으니, 그대로 두면 무절제하여 사회 규범으로 지켜야 할 예의나 규범의 형식적 절차인 문리(文理)는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성질이나 감정에 맡겨 버린다면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아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할 것이니, 반드시 스승의 교화와 예의의 법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남에게 사양할 줄도 알고 사회의 질서를 지킬 줄도 알아 세상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의 천성은 원래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이란 인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나무는 반드시 도지개를 대고 불에 쬐어 바로잡아야 곧게 되고 무딘 칼은 반드시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바로잡히고 예의를 얻어야 다스려질 것이다. 만일 스승이 없으면 편벽된 데로 기울어져 부정해질 것이요, 예의가 없으면 난폭해져서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왕(聖王)이 이를 위하여 예의를 일으키고 법도를 세워 성정(性情)을 교정하고 훈련함으로써, 사회 규범에 따르고 도리에 맞도록 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을 살펴보면 스승의 감화를 받고 학문을 쌓아서 예의를 숭상하는 사람은 군자가 되고, 제 성정대로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소인이 된다. 이로써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은 인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그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으로서, 사람의 본성을 잘못 이해하여 타고난 본성과 후천적으로 교정된 성정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무릇 본성이란 타고난 대로를 말하는 것이니,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요, 행동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의는 성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니, 배우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배우지 않고 행하지 않아도 그대로 있는 것을 본성(本性)이라 하며, 배우고 노력해야 되는 것을 인위(人爲)라 한다. 이것이 성(聖)과 위(僞)의 구별인 것이다. 이제 사람의 본성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니,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떠나서 있을 수 없고, 들을 수 있는 밝은 귀를 떠나서 있을 수 없으므로, 눈이 밝고 귀가 밝은 것은 배워서 된 것이 아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의 본성은 착하지만 악한 이유는 모두 본성을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 곧 그 소박을 떠나고 그 소질을 떠나게 마련이니, 잃어버릴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성은 악하다. 이른바 성이 선하다는 것은, 그 소박한 것을 떠나지 아니할 때를 미(美)로 보고, 그 소질을 떠나지 아니할 때를 선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그 소박한 것과 미와의 관계를 또는 그 소박한 본질과 선과의 관계가, '보는 것의 밝음이 눈을 떠나지 않고 듣는 것의 밝음이 귀를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을 때를 두고 '성이 선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배고프면 배불리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입고 싶으며, 고단하면 쉬고 싶은 것이 본성이다. 그런데 배고파도 먼저 먹지 못하는 것은 어른에게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릇 자식이 아비에게 사양하고 아우가 형에게 사양하며, 또 자식이 아비 대신 일하고 아우가 형 대신 일하는 것은 두 가지가 다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요, 성정에 어긋난다. 그러나 효자의 도리는 예의의 규범이다. 그러므로 성정대로만 하면 사양할 까닭이 없고 사양하면 오히려 성정에 반하는 것이 된다. 이로써 사람의 성정이란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이란 인위적인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사람이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그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 박하면 후하기를 원하고 추하면 아름답기를 원하며, 좁으면 넓기를 원하고 가난하면 부유하기를 원하며 천하면 귀하기를 원하는데, 자기 속에 없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구하는 것이다. 또한 부유해지면 재물을 원치 아니하고 귀해지면 권세를 원치 않게 되는 것이니, 사람은 또 자기 속에 있는 것은 절대로 밖으로 구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이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그 본성이 악하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본성에는 처음부터 예의라는 것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애써 배워서 그것을 갖고자 노력한다. 또, 인간의 본성 그 자체는 예의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자 노력한다.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사람은 예의도 없거니와 예의를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예의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고 예의를 모르면 인도(人道)에서 벗어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본성 그대로 놓아두면 사람은 인도에서 벗어나 혼란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분명히 인간의 본성은 악하며, 이것을 착하다고 말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꾸밈의 결과일 뿐이다.


性善說

 

맹자(孟子)가 주장한 중국철학의 전통적 주제인 성론(性論). 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는 학설이다. 성론을 인간의 본질로서의 인성(人性)에 대하여 사회적․도덕적인 품성이나 의학적․생리학적인 성향을 선악(善惡)․지우(知愚)라는 추상적인 기준에 따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현실의 사람을 언제나 이념적인 모습으로 파악하게 된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인 확충(擴充)작용에 의하여 덕성(德性)으로 높일 수 있는 단서(端緖)를 천부의 것으로 갖추고 있다.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등의 마음이 4단(四端)이며 그것은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근원을 이룬다. 이런 뜻에서 성(性)은 선(善)이며, 공자(孔子)의 인도덕(仁道德)은 선한 성에 기반을 둠으로써 뒤에 예질서(禮秩序)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정치사상으로 바뀌었다. 당나라의 유학자이고(李)는 도가(道家)와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복성서(復性書)》에서 성의 본연인 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성선사상(性善思想)은 선악(善惡)은 어느 쪽으로도 기를 수 있다는 세석(世碩)이나 후한(後漢)의 혁신적 사상가 왕충(王充)의 성론과 대립되고, 선악의 상대적 전환가능성이 있는 순자(荀子)의 이른바 성악설(性惡說)과도 크게 다르다. 그 후 유교는 성선설을 도덕실천의 근거로 하여 계승되고 발전하였다.


性惡說

 

고대 중국의 유학자 순자(荀子)가 주창한 학설로서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윤리사상. 인간의 도덕적 수양(修養)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유가에서는 그 수양의 가능성이나 수단과 관계되는 문제를 놓고 본성론(本性論)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순자는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고 나섰으나 그 목적은 맹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수양을 권하여 도덕적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에 바탕을 두었다. 성악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감성적(感性的)인 욕망에 주목하고, 그것을 방임해 두면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악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수양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것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가르침이나 예의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쌓아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 사상은 백성을 정치적 권력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규제하려고 한 이사(李斯)․한비자(韓非子) 등 법가에 계승되었으나 유가의 정통사상으로서는 성선설(性善說)에 압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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