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에 처음으로 진화적 메커니즘을 제공한 사람은 트리버즈(Robert Trivers, 1943~)였다. 해밀턴의 친족 이타주의(kin altruism)에 상응하여 호혜성 이타주의(reciproc al altruism)라고 명명된 그의 이론에 따르면, 지금 이 순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미래의 보답을 기대하며 남에게 도움을 주는 행위로 인해 인간을 비롯한 많은 동물들의 사회성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계약 이타주의(binding altruism)인 셈이다. 이타적 호혜성의 진화를 위해 서로 교류하는 개체들이 친척일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같은 종에 속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둘이 평생 단 한 번밖에 만나지 않는다면 도움을 받고 난 다음 보답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호혜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며 서로의 만남이 비교적 빈번해야 진화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한강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뛰어들 수는 있지만 난생 처음 이집트를 여행하던 중 나일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리 쉽사리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또 언제 이집트를 방문하게 될지도 모르거니와 내가 나일강에 빠질 확률도 매우 적을 뿐더러 내가 구한 그 사람이 내가 빠졌을 때 마침 그 강변을 거닐 확률은 더더욱 작기 때문이다.
1971년 트리버즈의 이론이 발표되자 인간 사회의 호혜성 이타주의 행동의 예는 수없이 많이 논의되었지만 다른 동물의 예는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1977년에 이르러서야 인간이 아닌 다른 영장류에서 첫 예가 보고되었다. 크레이그 패커(Craig Packer)는 올리브비비(olive baboon) 수컷들간의 호혜성 동맹 관계를 연구하여 으뜸수컷(dominant male)을 피해 발정기의 암컷에게 접근하려고 버금수컷(subordinate male)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그 후 침팬지를 비롯한 다양한 영장류 사회에서 상호 털고르기, 음식 나눠먹기 등의 호혜성 행동들이 보고되었지만 트리버즈 이론에 가장 결정적인 도움이 된 연구는 단연 윌킨슨(Gerald Wilkinson)의 흡혈박쥐 연구였다.
중남미 열대에 서식하는 흡혈박쥐들은 밤마다 소나 말 또는 맥 같은 큰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데 워낙 신진대사가 빨라 연이어 사흘 밤만 피를 빨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래서 흡혈박쥐의 사회에는 서로 피를 나눠먹는 풍습이 진화했다. 윌킨슨의 연구에 따르면 흡혈박쥐들은 누구보다도 친척들과 가장 빈번하게 피를 나눠먹지만 오랫동안 가까운 자리에 함께 매달려 있는 짝꿍들에게도 피를 나눠주고 또 훗날 피를 얻어먹기도 한다. 이들은 서로를 분명히 인식하며 오랫동안 호혜관계를 유지한다. 이들이 피를 빨지 못하고 돌아오는 확률에 의거하여 예상수명을 계산해보면 태어나서 3년을 버티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로 피를 나눠먹는 전통 덕택에 흡혈박쥐들은 야생에서 15년 이상을 살기도 한다.
흡혈박쥐들이 서로 피를 나눠먹는 풍습을 보며 나는 종종 우리 사회의 헌혈 문화를 떠올린다. 박쥐들 중에서는 거의 최대의 대뇌 신피질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지만 기껏해야 그 무게가 1그램밖에 되지 않는 두뇌를 가진 흡혈박쥐들이 기꺼이 피를 나눠주고 또 훗날 돌려받는 훈훈한 풍습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우리들 대부분은 길에서 헌혈버스를 발견하면 아예 멀찌감치 돌아간다. 따끔한 주사바늘까지 내 몸에 꽂아 빼준 내 아까운 피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쓰이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뜻 헌혈을 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흡혈박쥐와 영장류 사회의 예들이 호혜성 이타주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하긴 하지만, 도대체 그런 호혜 관계가 애당초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에는, 트리버즈 자신이 예로 들었던 청소놀래기의 경우가 가장 훌륭해 보인다. 열대지방 바다의 산호초 주변에는 다른 물고기들의 몸을 깨끗이 청소해주며 살아가는 물고기들이 있다. 물고기들은 우리처럼 손이 있어서 몸의 구석구석을 손질할 수 없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이 같은 청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청소놀래기는 아가미 덮개 밑으로 파고들어 마치 자동차 필터처럼 생긴 아가미의 속살에 붙어 있는 온갖 이물질들을 제거하질 않나, 아예 입 속에 들어가 치아 사이까지 마치 치과의사가 스케일링을 하듯 꼼꼼하게 청소한다. 바로 이 장면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청소 서비스를 받으러 온 물고기가 마침 배도 출출하다면 마음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입 안에 들어와 청소에 여념이 없는 놀래기는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냥 꿀꺽 삼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래 본들 그 날 한번의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 뿐 앞으로 허구한 날 누가 몸 구석구석을 청소해줄 것인가? 한 끼의 식사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단골 서비스를 받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호혜 관계가 유지되려면 계약을 어기는 사기꾼을 색출하여 응징하는 메커니즘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호혜성 이타주의의 개념은 종종 정의(justice)의 문제와 연관되어 논의된다. 이 분야 연구에 세계적인 학자이며 2007년 우리나라 경제학자로는 처음으로 세계적인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한 바 있는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최정규 교수의 저서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전통적인 경제학에서 전제하는 이기적 인간이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돕는 이타적 인간보다 더 큰 물질적 이득을 얻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타심을 발휘하는가에 대한 최근 연구 결과들이 소개되어 있다.
진화경제학자들은 인간 행동의 진화를 탐구하기 위한 도구로 '최후통첩게임(ultimatum game)'이라는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연구자가 실험에 참여한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에게 1만원을 주고 둘이 나눠 가지라고 주문한다.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제시한 금액을 받아들이면 둘은 1만원을 나눠 갖게 되지만 만일 거부하면 둘 다 한 푼도 갖지 못한다. 이기적 인간이라면 당연히 크기에 상관없이 어떤 배당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다못해 단돈 100원을 준다 해도 받는 게 거부하는 것보다 이익이다. 하지만 1982년 독일 쾰른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뜻밖에도 배당액이 전체 금액의 30%를 넘지 않으면 제안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화경제학자들은 이 같은 결과를 인간의 이타성과 보복 성향으로 해석한다. 선에는 선으로 대하지만, 악에는 자신이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악으로 대응하는 성향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불공평에 대한 응징은 우리 인간만의 속성이 아니다. <침팬지 폴리틱스>의 저자이자 미국 에머리 대학의 여키스 국립영장류연구소 소장인 프란스 드월(Frans de Waal)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흰목꼬리말이원숭이들에게 돌멩이를 가져오면 그 대가로 오이를 교환해주는 실험을 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규칙을 바꿔 한 원숭이에게만 맛있는 포도를 주기 시작하자 40%의 원숭이들이 교환행동을 중단했고, 심지어 돌멩이를 가져오지도 않은 원숭이에게 포도를 주기 시작하자 무려 80%가 자기들의 돌멩이마저 집어 던졌다. 최근에는 개들도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면 협조를 거부하고 고개를 돌린다는 사실이 오스트리아 빈 대학 연구진에 의해 관찰되었다.
인간 못지않게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개미는 상당히 조직적인 자체 감찰제(worker policing)를 마련했다. 개미의 세계에서는 번식은 철저하게 여왕의 몫이고 일개미는 그런 여왕을 도울 뿐 스스로 자식을 낳지 않는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실제로는 일개미들도 심심찮게 알을 낳는다. 여왕개미는 이른바 ‘여왕물질’이라는 페로몬을 분비하여 이 같은 역모를 통제하려 하지만 그 사회에도 어김없이 틈새를 비집는 이들이 있다. 어머니인 여왕이 낳는 알은 부화하여 동생이 되지만 동료 일개미가 낳은 알은 조카로 태어난다. 조카는 동생보다 유전적으로 덜 가깝기 때문에 일개미는 자기들 중의 누군가가 알을 낳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서로를 감시하며 누군가 그 감시를 피해 알을 낳더라도 곧바로 먹어 치운다.
우리 인간 사회에도 사뭇 유치하지만 비슷한 제도가 있지 않은가? 유명인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사생활 장면을 찍어 언론매체에 팔아먹는 사진사들을 이탈리아어로 ‘파파라치’라고 한다. 이 단어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 상당히 화려한 적응방산(adaptive radiation)을 하고 있다. 교통법규 위반차량을 신고하는 ‘카파라치’를 시작으로 불량식품의 제조 및 판매를 신고하는 ‘식파라치’, 교습시간 또는 수강료 기준 위반 학원을 고발하는 ‘학파라치’, 영화 파일의 불법 업로드를 적발하는 ‘영파라치’ 등 실로 다양하다. 함께 협동해야 할 동료들로 하여금 서로 감시하게 만드는 이 같은 제도는 자칫 공동체 정신을 해칠 수 있지만, 진화의 역사를 통하여 가장 효율적인 질서 유지 체제 중의 하나로 확립되었다. 세상은 모름지기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며 살게 마련이다.(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