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초 한 골동품상이 국립박물관을 찾아와 유물 세트를 내놓으며 사라고 제안했다. 그것은 쇳물(청동물)을 부어 청동제품을 제작하는 틀인 ‘청동거푸집’이었다. 골동품상이 내놓은 거푸집 세트는 6쌍으로 된 12점과 한쪽만 남은 1점, 반쪽만 남은 1점 등 모두 14점으로 되어 있었다. 이 거푸집으로 세형단검·꺾창·창·낚시바늘·침·소형도끼·끌 등 8종 24점의 청동제품을 만들 수 있다.
박물관 관계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학자들이 뭐라 강변했던가.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원시적인 석기시대에 머물고 있다가 중국의 침략을 받아 청동기와 철기 같은 선진문물이 한꺼번에 유입됐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석기와 금속기가 함께 쓰였다는 ‘금석병용기’ 용어를 끌어왔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8종 24점이나 되는 청동제품을 제작한 증거(거푸집 세트)가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국립박물관은 이 거푸집 세트를 사들이지 못한다. 유물구입비가 없다는 어이없고도 기막힌 이유였다. 이 거푸집 세트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 설립자인 고 김양선 박사(1907~1970)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유물세트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정확한 출토지점을 몰라 학술적인 생명력을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다만 전남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에서 출토됐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었다. 결국 이 거푸집 세트는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전(傳)영암 출토 청동거푸집’의 명칭을 얻었다.
그럼에도 1986년 국보로 지정됐다. 기원전 3~2세기 무렵 국내의 주조기술로 청동제품을 대량 제작한 정황증거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출토지점을 모르는 한계를 넘어서는 가치가 있다고 인정된 것이다. 그러던 2002년 5월 어느 날이었다. 발굴기관인 호남문화재연구원이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갈동마을을 지표조사 하고 있었다. 전주시 관내 국도의 우회도로 건설을 위한 사전조사였다. 그러나 아무런 고고학적인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한수영 호남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은 뭔가 찜찜했다. 이 일대는 해발 26~42m의 야트막한 구릉이 쭉 이어진 곳이다. 만경강과 서해로 확 트인 그야말로 비옥한 충적지가 펼쳐져 있다. 이런 곳이야말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입지가 아닌가. 아무 징후가 보이지 않을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냥 스쳐지나가도 모를 이곳을 정식발굴지역에 포함시켰다.
정식 발굴이 한창이던 2003년 8월1일이었다. 1호 움무덤(구덩이 파고 시신을 묻은 묘)에서 상상도 못할 유물이 출토됐다. 세형동검 거푸집 1쌍이었다. 거푸집 중 한 점은 벽에 붙어서, 다른 1점은 옆으로 기울어진 채 확인됐다. 한수영 책임조사원은 “거푸집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세형동검의 거푸집을 제 눈앞에 나타난 겁니다. 얼마나 황홀한지….”라며 흥분했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은 검의 몸체가 좁고 가늘다고 해서 이름 붙은 청동 칼이다. 기원전 4세기~기원전후 주로 한반도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한국식 동검’이라 일컬어진다. 갈동 출토 세형동검은 기원전 2세기 유물로 판단됐다. ‘전 영암 출토 거푸집’이 한반도에 없다던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알리는 정황 증거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100년 이상 계속된 한국고고학계의 오랜 갈증이 해소된 것이다.
2000년대초 갈동 인근 지역이 전주 혁신도시 예정부지로 선정됐다. 대상 부지에 대한 발굴 결과 갈동 유적과 비슷한 초기철기시대(기원전 2~1세기)의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갈동에서 불과 600m 떨어진 전주 원장동에서는 세형검 5점과 칼자루끝장식(검파두식) 3점, 고운무늬 거울 2점 등 각종 청동제품이 출토됐다. 또 완주 신풍에서는 무려 81기의 초기철기시대 무덤군이 노출됐다.
특히 고운무늬 거울이 10점이나 출토됐고, 청동투겁방울(간두령·장대의 머리에 끼운 방울 모양의 청동기)이 한 쌍 확인됐다. 이 지역 수장급 지도자가 옥수수 모양 청동방울을 흔들며 하늘신·조상신과의 접신을 시도했을 것이다. 또 신풍유적에서는 청동기 보다는 철기가 유독 많이 보인다. 이 역시 청동기-철기의 과도기를 드라마틱하게 증거해주는 무덤 양상이다.
이렇게 갈동·원장동·신풍 등 인근 지역에서 무려 200기가 넘는 초기철기시대(기원전 2세기 무렵)의 무덤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집계됐다. 갈동유적의 현장책임자였던 한수영씨는 “당대의 도시 유적을 발굴한 느낌이었다”고 밝힌다. 이와 같은 초기철기시대 발굴성과가 쏟아지자 새삼 각광을 받게 된 유적·유물이 있었다. 바로 1975년 학계에 보고된 완주 상림리 유적이다.
그해 11월30일 전북 완주 이서면 상림리 주민이 묘목을 옮겨 심다가 수상한 유물더미를 발견한다. 그것은 26점이 묶인 채 발견된 청동검 더미였다. 이상했다. 무덤도, 주거지도 아닌 곳에 덜렁 이 동검 더미만 묻혀있을까. 더욱이 형태나 기법상으로 보아 중국 산둥(山東)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제나라 동검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파악됐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제작된 제품으로 판단됐다. 크기가 중국산보다는 다소 작고, 또 두께가 얇아서 비실용적이었다. 사용한 흔적도 없이 달랑 이 26점 꾸러미만 매납해 놓았다. 하지만 ‘중국풍’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이상의 화제를 뿌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갈동 등 전북 지역에서 상림리(기원전 3세기)보다 늦은 시기(기원전 2세기 무렵)의 무덤이 쏟아지자 새삼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기원전 3세기는 중국의 대격변기였다. 진시황이 6국을 통일(기원전 221)했지만 12년만에 죽은(기원전 210) 뒤 단 4년 만(기원전 206)에 멸망한다. 이 무렵 수많은 난민이 살 길을 찾아 한반도로 피란했다. 그중 상림리 동검의 본향이라 할 수 있는 산둥 반도에 웅거했던 제나라의 전횡(기원전 250~202) 관련 설화가 눈길을 끈다. 전횡은 진시황(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에 의해 멸망한 제나라의 왕족 출신이었던 인물이었다.
전횡은 제나라를 재건하려다가 실패한 뒤 한나라 건국(기원전 202) 후 산둥성 칭다오(靑島) 전횡도에 숨어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횡 문하의 빈객 500명도 따라 죽었다. 이들을 ‘절개를 떨친 전횡오백사(田橫五百士)’라고 한다. 그런데 전북 군산에서 가장 서쪽 섬인 어청도에서 바로 전횡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전횡과 500의사가 죽지 않고 망명길에 올라 3개월만에 어청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청도 마을의 한가운데는 전횡을 모시는 치동묘(淄東廟)가 자리 잡고 있다. ‘치’는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를 가리킨다. 치동묘는 임치의 동쪽에 있는 사당이라는 의미이다. 어청도는 산둥반도와 약 300km가량 떨어져 있다. 이 설화는 기원전 3세기 미증유의 혼란기를 겪던 중국 대륙에서 수많은 유이민이 한반도로 건너왔음을 상징해준다. 그들이 바로 고향인 산둥풍의 청동검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갈동 등에서 쏟아진 기원전 2세기 유적·유물은 어떻게 설명할까. 고조선은 천하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그 시점에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있었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한 후 고조선이 복속은 했지만 진시황을 알현하지는 않았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사가 그걸 말해준다. 진시황의 서슬 퍼런 치하였음에도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진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을 타 조선에 망명의사를 타진한 연나라인 위만을 받아준 것이 화근이 됐다.
고조선의 준왕은 “제가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겠다”는 위만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중책을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반란을 일으켰고, 준왕은 결국 망명길에 오른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기원전 194년 무렵) 고조선의 준왕이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땅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했다”고 했다. 준왕이 망명했다는 그 시기가 바로 기원전 2세기가 아닌가.
전북 지역에는 준왕의 망명과 관련된 설화가 여러편 전해진다. 군산의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원나포(나리포 혹은 나시포)는 준왕의 첫 상륙지로 알려져 있다. 그곳의 공주산(公主山)은 망명한 준왕의 공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공주산의 건넛마을에는 임금(준왕)이 온 곳이라 해서 어래산(御來山)이라 한다.
또하나 흥미로운 착안점이 있다. <후한서> ‘동이전·마한’조 등은 “고조선 준왕이 마한에서 왕이 된 후 그 후손이 멸절되었고, 지금은 마한사람이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한마디로 준왕을 비롯한 고조선의 후손이 오래 가지 못해 끊어지고 토착세력이 다시 임금으로 복귀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갈동을 중심으로 한 전북 지역에서는 기원후 1세기 이후의 문화층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준왕의 후손이 끊어졌다’는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