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고조부모 능인 덕릉과 안릉은 타타르인의 주 활동지역인 달단동(鍵輯洞)에 있었다고 조선실록은 쓰고 있고, 이성계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영홍에는 성(萬里長城)이 통과하고 있었으며 (쌍성총관)부(府)의 장성근처라고 적고 있다.
이안사가 몽골의 다루가치가 되어 살았던 동녕부는 여진족이 천년 동안 살았던 채달목분지다. 그 후 여진족이 중토로 들어간 후 채달목분지에는 고려인이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한 여진족이 채달목분지로 재차 이주했을 때는 고려인과 같이 살았다.
이자춘이 고려로 귀화한 것은 이성계가 21살 때였다. 이성계도 여진족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이성계의 외가도 여진족이라니까, 이성계는 순수 여진족 혈통이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했을 당시, 동북면이 아니라 서북면의 여진족 천여 명이 밤낮을 달려와 지원했던 것이다.
‘李’는 이자춘에 이르러 공민제로부터 받은 사성이다. 현재 한국에 있는 모든 성씨(姓氏)의 족보는 고려 때부터 기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초기 때부터 이다. 고려 말기는 이미 몽고의 지배 하에 있었고 명나라의 강한 세력에 압박당하고 있었기에 혈통을 중요시한 족보 따위는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왕조가 점차 안정을 찾는 태종(太宗 AD. 1418년)말경부터 세종(世宗 AD. 1419년)초에 이르러 모든 성씨(姓氏)의 씨족(氏族)들이 혈통의 중요성을 느끼고 그때부터 족보(族譜)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족보의 역사를 삼한(三韓)으로 기준하고 高句麗, 百濟, 新羅, 高麗를 거쳐 朝鮮王朝초까지 인맥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족보를 기술할 당시는 한반도에 漢字의 地名이 모두 행정의 편이상 바꾸어진 상태였다.
상고시대 때부터 고려 때 까지는 모계사회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어서 굳이 혈통을 고집하여 똑같은 성(姓)을 지키려 하지는 않았다. 모계사회서 파생된 성씨(姓氏)는 혈통과 관계없이 그때 그때에 따라 성(姓)을 하사받게 되거나 봉작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관직을 받을 경우와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혈통을 고집하고 성을 이어온 것은 조선왕조부터 시작되었다.
태종(太宗 AD. 1401~1418년)말 이후 세종 때 이르러 조선 왕실은 자신들의 불분명한 가문의 족보를 편찬하기 시작했고,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에 태조 이성계의 사당을 지어 영정을 모시는 과정에서 전주를 본관(本貫)으로 했다.
현재 전주이씨 대종보(大宗譜)에는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 AD. 739~761년)때 사공 벼슬을 하였던 이한이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에 실려 있다.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은 1958년 장여화가 편저한 중국지명대사전과 맥을 같이 하는 책이다.
이한은 신라인으로 대륙에 있을 때 사관(史官)으로서 사공의 벼슬을 한 인물이다. 그러기에 중국인명대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주요내용을 요약하면 중국인명대사전 447쪽에는 이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한의 아버지는 이화종(李華宗)이다. 이한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사공의 직급을 받았다. 당나라 천보(天寶 AD. 742~756년)말 때 방관(房琯)의 벼슬을 했다고 적고 있다. 태어난 곳은 휴양이라 했다. 전주이씨라는 것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