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로 간 유민들
우선 그들이 살던 지역인 황해도와 강원도 북부 등지가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신라에 자연스럽게 귀속된 사람들이다. 또한 고구려가 망하기 직전인 666년에 연정토가 성읍 12개와 백성 3,5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할 때 참여한 사람들과 669년 안승이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항복할 때 함께 간 자들이 있다. 이들은 670년 안승이 보덕왕에 봉해지면서 신라의 당나라 축출 과정에서 신라를 도와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신라 수도인 경주에 주둔한 군부대인 9서당에도 참여하여 황금, 적금, 벽금, 서당이라는 고구려 출신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만드는 등 나름대로 신라에서 고구려 출신의 독자성을 인정받았다. 대개 이들은 신라 한산주(漢山州)에 속했으며, 독자세력을 구축하여 신라에 대항하기보다 일반 백성으로 편입되었다. 고구려 부흥군이 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당군에게 패하자 평양 일대의 유민들이 대거 신라로 들어가면서 부흥운동이 일단락되고 고구려 유민의 신라유입도 마무리 된다.
당의 내지 깊숙한 곳으로 옮겨간 사람들
이들은 만리장성보다 훨씬 이남 지역으로 옮겨간 집단이다. 당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고구려 사람들을 끌고 갔다. 첫번째는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당이 패배하여 퇴각할 때 요동지방의 고구려인 7만 명을 강제로 당으로 끌고 간일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 당으로 끌려온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나라 각지로 분산되어 거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 중 당에 항복한 고구려 장수들인 고연수, 고혜진, 손대음 등은 당에서 높은 벼슬을 받고 고구려 침입에 앞장서는 배신 매국행위를 하기도 했다. 또 고구려군 지휘관급 3천여 명은 개별적으로 당나라 군대에 다시 배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노예로 전락되는 등 비참한 대우를 받으며 전쟁포로로 끌려갔다.
두 번째는 고구려 멸망 직후인 669년, 당이 강력한 토착 기반을 가진 고구려의 반당세력을 제거하고자 고구려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2만 8,200호의 사람들을 육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강제로 당나라 내지로 옮겨가는 조치를 단행한 일이다. 주된 대상은 평양과 국내성. 한성. 봉황성 및 요동일대의 주민이었을 것이다. 양자강과 회수이남 및 산서성 , 하남성 일대 및 보다 서쪽지역으로도 이주되었다. 이들은 고구려의 핵심계층이었다. 이들의 강제 이주는 고구려문명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
세 번째는 676년에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669년에 당나라 내부로 옮겼다가 한 때 요동지역에 재배치되었다가 이 때 당나라 내지로 다시 옮겨가게 된다. 이러한 고구려인의 당나라 이주는 처음에는 고구려에서 가까운 영주(營州)지역으로, 다시 산서성 등의 변경 지대나 그 이남 지역으로 옮겨진다. 이들 고구려 유민집단의 동향과 이들에 대한 당의 정책에 관해서는 전해지는 기록이 드물다. 단지 당나라에서는 자국에 끌려온 이민족들을 그들의 원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고립시켜 반란의 소지를 없애고 당나라 사람으로 동화시켜 가는 정책만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 유민들 중에서는 출세한 인물들도 많이 생겼다. 대표적인 인물은 고선지 (高仙芝)와 이정기(李正己)가 있다. 고선지는 감숙성 지역에 거주한 고구려 유민이었다. 그는 무인으로 성공하여 747년에는 멀리 서역으로 원정을 가서 사라센 제국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이정기의 경우는 영주지역에서 성장하여 군대를 이끌고 산동지역으로 옮겨가 기반을 잡아 스스로 평로치청절도사가 되었고, 당나라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55년간 반독립국가를 이루기도 했다. 이들 외에도 왕모중(王毛仲)은 당나라 현종(玄宗)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왕사례(王思禮)는 무장으로 성공하여 관서병마사가 된다.
이 밖에도 고구려의 귀족으로 당나라에 항복했던 남생. 남산, 고자 등도 높은 벼슬에 오른다. 그러나 이들은 극소수였으며, 당에서 높은 벼슬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당에 동화되는 길을 걷는다. 대다수의 고구려 사람들은 당의 정책에 의해 멀리 변경지대로 흩어져 고구려인의 뿌리조차 잊어버리고 당나라사람으로 동화되어 갔다.
요동 방면에 거주했던 사람들
이들은 당나라의 지배하에 일단 들어갔으나, 뒤에 변동이 있었던 집단이다. 670년, 당은 요동 지역을 당나라의 통치조직인 주현으로 구획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여 유민사회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도모했다. 이러한 당의 정책은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와 검모잠 일파의 부흥운동과 안시성 등지에서 반당 봉기가 일어났다. 또 신라와 고구려 고연무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의 적극적인 공세로 부흥군은 진압되었고, 한반도지역에서 쫓겨난 당의 안동도호부가 요동반도에 옮겨온 이후부터 이 지역은 당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당은 신라의 진출을 저지하고, 말갈 등의 세력확대를 방지하며 다시 한반도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써 요동지역을 안정시키고,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676년 보장왕을 내세워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도록 했다. 따라서 당의 요동 지배는 보장왕에 의한 고구려인의 자치와 당나라 관리에 의한 안동도호부의 지배로 나누어진 이원적인 지배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보장왕은 당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독립운동을 기도하다 실패했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당나라는 다시 요동의 고구려 구지배층을 다시 당의 내지로 옮겨버렸다. 이에 따라 가난한 백성들만이 요동에 남게 되어 유민사회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발해의 건국을 계기로 당의 요동지배는 한계에 이르렀다 8세기에 들어서 당의 요동지배는 명목상에 불과했다. 8세기에 들어서 요동지역의 유민들은 소고구려국을 세워 실질적인 독립 소국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이곳은 발해에게 병합되었고. 그들은 발해인이 되었다. 요동지역의 유민들은 끝까지 당에 동화되지 않고 자치와 독립을 실현했으며. 결국 발해에 귀속되어 고구려인의 계통을 올바로 이어갔다.
돌귈 등 유목민 사회에 투항한 사람들
고구려인은 오래 전부터 유목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특히 돌궐과의 첫 접촉에서는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수·당에 의해 중국 세력이 통일된 이후에는 대림에서 상호 협조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돌귈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당에 공동으로 저항했다. 돌궐에 간 고구려 유민 중에 특이한 사례는 고문간(高文簡)이 돌궐의 묵철가한(默 可汗)의 딸 아사나씨(阿史那氏)와 결혼하여 돌궐의 부마가 된 것이다.
고문간은 고구려에서 막리지 벼슬을 했던 귀족이었고 유민집단의 지도자였다. 그 외에도 고정부(高定傅)와 고공의 (高拱穀)는 고려대수령(高麗大首領)이라 불렸다. 이들은 각기 자기 세력을 가지고서 일정하게 돌궐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으며 유민들을 이끌었던 것 같다. 돌궐은 이들을 통합하지 않고 고구려인의 고유한 생활과 조직을 유지하도록 하면서 집단별로 간접적인 통치를 했다.
돌궐은 고구려 유민집단에게 공납과 군사적 도움을 받는 정도였다. 돌궐로 간 고구려 유민들은 대개 고구려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사람들로 같은 생업을 가진 돌궐로 옮긴 것이라고 보아진다. 돌궐은 690년경 다시 강성해져 당나라와 잦은 전쟁을 했는데, 고구려 유민집단들도 당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 때 고문간 집단 등이 당에게 굴복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당나라에 속한 이후에도 당으로부터 일정한 벼슬과 자치권을 부여받으며 존속하게 된다. 732년 이후, 돌궐이 약화된 이후 돌궐지역에 들어간 고구려 유민에 대해서 전해지는 자료는 없다. 단지 이들의 영향으로 몽고지역에 고구려를 뜻하는 단어와 고구려 문화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열도로 옮겨 간 사람들
고구려 유민 중에는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안전한 거주지를 찾아 건너 간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고구려가 망한 668년 이 후 684년까지 고구려인이 왜와 교류한 사건을 15회나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들에 대해서 조작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일본열도에 자주 왕래했던 사실을 일정 부분 반영한 점은 사실일 것이며 일부 기사는 고구려 유민의 기록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712년, 지금의 동경지방에 고마군(고려군 - 高麗郡)을 설치하여 고구려인 1,799인을 집단 안치시켰다는 기록이 속일본기에 전해지고 있다. 이들 고구려 사람들은 본래 중부 일본 동쪽의 쓰루가(시즈오까 현) , 가히 (야마나시 현), 가즈사(지바 현) , 히따지(이마나끼 현) 등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동해를 건너와 동해 연안의 일본열도에 거주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동경지방을 개척하기 위해서 이주된 것이다. 이들이 옮겨간 고마군은 1896년 사이다마현 이라마군에 병합되기 전까지 무려 1,180년이나 존재했다. 고마군을 다스린 사람은 고구려 왕족으로 알려진 약광이었다.
그는 고구려가 망하자 일본에 와서 벼슬을 받고 살면서 고구려 유민들을 잘 통솔하고 다스렸으며, 대대로 제사를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고마신사에서는 약광에게 제사를 올리고 있다. 약광을 비롯한 고마군의 고구려 유민들 외에도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인이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이들은 일본 곳곳에 고구려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8세기초, 고구려 양식 고분벽화로 잘 알려진 일본 나라(奈良)현에 있는 다까마쓰는 고구려계 유민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기억할 만하다.
다소 특이한 사례로는 혼슈섬 중부 내륙지방의 시나노 지방에 살던 고구려 사람들이다.「일본후기(日本後記)」에 의하면 799년에도 고구려 후손들이 하부, 전부, 후부, 상부 등의 고구려 5부 행정단위 이름을 성씨로 삼아 살고 있었다. 이들은 7세기 초반에 일본열도로 이주해온 사람들인데 고구려가 망한 후에도 오랫동안 고구려 방식대로 살고 있었다.
발해의 건국과 함께 발해인이 된 사람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계속 자신들의 거주지인 만주지역과 함경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과, 영주지역에 끌려갔다가 대조영 등과 합께 다시 되돌아와 발해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요동지역에서 발해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전체 고구려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발해가 고구려인의 후손에 의해 세워졌고,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발해로 계승되었고, 발해가 멸망하고서도 발해부흥운동은 200년 이상 지속된다. 그것은 고구려의 생명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