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세기에 걸친 일본 황실의 계보입니다.
제29대 킨메이 천황(欽明 : 539~571)
제30대 비다츠 천황(敏達 : 572~585)
제31대 요메이 천황(用明 : 585~587)
제32대 스슌 천황(崇峻 : 587~592)
제33대 스이코 천황(推古 : 592~628)
제34대 조메이 천황(舒明 : 629~641)
제35대 고오교쿠 천황(皇極 : 642~645)
제36대 고토쿠 천황(孝德 : 645~654)
제37대 사이메이 천황(齊明 : 655~661)
제38대 텐지 천황(天智 : 661~672)
제38대 고오분 천황(弘文 : 672)
제39대 텐무 천황(天武 : 672~686)
제40대 지토오 천황(持統 : 686~697)
킨메이 천황이 백제계라는 분명한 기록이 있었죠. 즉 킨메이 천황의 아드님인 비다츠 천황에 대해서『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은 분명히 백제인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킨메이 천황은 백제계인 것이죠. 따라서 그 형제들인 요메이 천황, 스이코 천황 등도 백제왕족 즉 부여계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찬성씨록』에 "대원진인(大原眞人), 그들은 백제왕의 후손으로 시호가 비다츠인 분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속일본기(續日本記 : 797)』의 내용과도 일치한다."이라는 기록이 있어 비다츠도 백제왕손이며 그의 형과 동생은 자동적으로 백제계 왕손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신찬성씨록』은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필사본만 남아있습니다.
킨메이 천황의 자녀들인 비다츠(敏達)·스이코(推古)·요메이(用明) 가운데 스이코·요메이는 어머니가 같고, 비다츠와 스이코는 부부입니다. 그러니까 스이코와 비다츠는 이복남매인데 결혼하였습니다. 고대 왕실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일본의 고대 통사로 13세기경의 왕조 불교사를 기록한 책인 『부상략기(扶桑略記 : 13세기)』에는 비다츠 천황이 왕궁으로 지은 것이 구다라대정궁[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이라고 합니다. 구다라 즉 백제라는 말이 나오고 있죠.
스이코 천황은 비다츠 천황의 이복동생이자 황후였습니다. 비다츠 천황이 서거한 후 이복동생이자 처남인 요메이 천황(2년간 재위)·스슌 천황(5년간 재위)을 거쳐 스이코 천황이 등극하였습니다.
『일본서기』는 이례적으로 스이코 천황의 용모에 관하여 "단아하면서도 아름다우며 예의가 바르고 절도가 있는 분(姿色端麗 進止軌制)"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군신이 즉위하기를 세 번 청하자 그 때서야 할 수 없이 천황위를 수락했다고 합니다.
스이코 천황은 등극후 친오빠인 요메이 천황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였는데 그가 바로 저 유명한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입니다. 그러나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 천황 29년에 서거하고 말았습니다. 쇼토쿠 태자는 일본에서는 화폐에 나올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자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지나치게 미화된 인물로 그려져 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특히 『일본서기』가 쇼토쿠 태자를 과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본대로 『성예초』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성명왕이 서거한 후 왜왕실의 쇼토쿠 태자로 환생했다고 합니다.
스이코 천황은 킨메이 천황의 둘째 따님으로 그 어머니는 당시 백제 조정의 최고 대신이었던 소가노이나메[소가도목(蘇我稻目 : ?~570)]의 따님인 기다시히메(堅鹽媛)였습니다. 즉 스이코 천황의 모계이자, 킨메이 천황(성왕으로 추정됨)의 황후인 기다시히메(堅鹽媛)가 소가씨(蘇我氏)의 혈족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고대를 대표하는 아스카문화(飛鳥文化 : 592~645)는 스이코 천황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절은 아스카데라(飛鳥寺)입니다. 일본에서 기와와 주춧돌을 놓은 건물이 등장한 것은 6세기 후반의 일이라고 합니다. 시미즈마사지(志水正司) 교수는 아스카 절터 발굴(1956~1957) 당시, 창건할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2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부여의 여러 사찰 터에서 출토된 수키와(圓瓦)와 동일한 계통의 것으로 이것은 백제의 기와가 일본으로 건너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부상략기』에 따르면, "스이코 여왕 원년(593) 아스카노데라 찰주를 세우는 법요식에서 만조백관이 백제 옷을 입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아스카문화는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불교문화의 시대로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 : ?~626)가 불교전쟁(587)에서 토착종교 세력을 물리치고 이룩한 것입니다. 소가노마치는 제21대 유라쿠(雄略) 천황(456~478) 당시에 중용되어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습니. 미즈노 유(水野祐) 교수나 가도와키데이지(門脇禎二) 교수 등도 소가노 가문이 백제계임을 단정하고 있습니다.
소가씨 가문이 천황가의 황위쟁탈전에 본격 개입하데 된 것은 소가노이나메(蘇我稻目)때부터라고 합니다. 소가노우마코의 두 따님은 모두 킨메이 천황의 황후였습니다. 큰 따님이 기다시히메(堅鹽媛 : 蘇我堅鹽媛), 둘째 따님은 오아네노키미(小姉君 : 蘇我小姉君)인데 이로 부터 천황 세 분이 탄생합니다. 즉 킨메이 - 비다츠 - 요메이 - 스이코에 이르는 천황가의 계보에서 백제계의 아버지와 백제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분들이 열도의 지배자들이었죠. 이들을 흔히 소가계(蘇我系) 왕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참고로 요메이 천황 서거후, 소가노우마코는 누나인 오아네노키미(小姉君) 황후(킨메이 6황후의 한 분)의 아드님인 스슌(崇峻) 천황을 등극시킵니다. 그러니까 킨메이 천황 때부터 스이코 천황에 이르기까지 소가(蘇我)씨의 혈족이 열도를 다스리게 됩니다.
메이지 유신(1868) 이후 일본정부는 한반도와의 연계성을 없애기 위해 많은 지명들에서 백제라는 이름을 제거하였는데 그 한 예로 구다라가와(百濟川)를 소가가와(蘇我川 : そががわ)로 바꾸었습니다. 이 당시만 해도 소가씨에 관해서 백제계라는 분석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소가씨의 역사는 백제의 역사와 일본의 역사를 잇는 중요한 고리의 하나입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비다츠 천황의 친손자인 조메이(舒明) 천황은 7세기 초에 나라 지역에 구다라강(百濟江) 옆에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데라(百濟寺)를 지었고 자신은 구다라궁에서 생활하다가 서거(641)했을 때 구다라대빈(百濟大殯)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다라 대빈은 백제식의 3년 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연유로 인하여 사에키아리카요(佐伯有淸) 교수는 조메이 천황은 당대에는 구다라대왕(百濟大王)으로 불리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구다라데라는 현재는 사라졌지만 3만 평방미터의 규모로 당시에는 최대의 사찰이었습니다. 조메이 천황은 구다라데라에 9층탑을 조성하였는데 그 탑의 높이가 무려 80여 미터에 달했다고 합니다.
앞서 본대로 조메이 천황 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백제에서 온 손님들을 조정에서 대접하였다. 상서로운 연꽃이 검지(劍池)에서 피어났다. 한 개의 줄기에 피어있는 두 송이의 연꽃"
이 기록은 조메이 천황 당시에 백제의 사신들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접대하는 과정에서 상서로운 연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기록한 것입니다. 백제와 일본을 하나의 줄기로 보고 있다는 암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조메이 천황은 비다츠 천황의 증손녀(보황녀)와 결혼합니다. 바로 이 보황녀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사이메이(齊明) 천황입니다. 보황녀는 고오교쿠 천황(皇極天皇)으로도 등극합니다. 사연인 즉 조메이 천황이 서거하자 그 아내(황후)가 등극을 하는데 그 분이 바로 고오교쿠 천황입니다. 고오교쿠 천황은 3년 정도 나라를 다스리다가 고토쿠 천황(孝德天皇)에게 선양합니다. 그런데 이 고토쿠 천황이 등극한 지 9년만에 서거하자, 다시 천황에 오르게 되는데 이 때의 묘호가 바로 사이메이 천황입니다.
그러니까 '조메이 천황비(비다츠 천황의 증손녀) = 고오교쿠 천황( 642∼645) = 사이메이 천황(655∼661)'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이메이 천황은 두 번이나 천황에 등극한 매우 특이한 분입니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중조(重祚)'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이메이 천황은 열도의 역사에서 최초로 중조를 한 분입니다. 사이메이 천황 즉위를 전후한 7세기 중반의 일본 국내의 상황은 정치적으로 다소 혼란하고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일본 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이메이 천황에 대해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일본을 건설한 주역을 텐지(天智) 천황 - 텐무(天武) 천황 - 칸무(桓武) 천황 이라고 할 때 이들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바로 텐지와 텐무의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세 분의 천황과 사이메이는 유난히도 백제와의 관계와 왕가의 혈통을 중시한 분들입니다. 특히 사이메이 천황과 텐지 천황은 백제의 부흥을 위해 전 일본의 국력을 동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한 후 쿠데타를 통해 등극한 텐무 천황은 외부적으로는 백제와 다소 소원한 듯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혈통이 백제계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다져나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편찬하게 하면서 자신이 사이메이 천황과 백제마니아 조메이 천황의 아들임을 분명히 하였다는 주장도 있는데 타당한 이야기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은 역사의 정점에서 살아간 시대의 여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친정인 소가씨와 아들 텐지와의 갈등 속에서 한편으로는 친정에 의존하기도 했지만 결국 시대의 영웅이었던 아들 텐지의 손을 들어주어 천황가가 제대로 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이제 사이메이 천황의 일대기를 간단히 요약해 봅시다.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 592~628)에서 쇼토쿠 천황(称徳天皇 : 764~770)에 이르기까지 거의 2백여년 간 특이하게도 여제(女帝)들이 나타나 '여제의 시대'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이메이 천황은 스이코 천황과 비교한다면 천황의 직계 혈통이 다소 약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보황녀(宝皇女)는 다카무카왕(高向王)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아야(漢) 황자(皇子)를 낳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카무카왕이나 아야 황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지금까지 논쟁이 극심한 상태입니다. 즉 이 다카무카는 누구이며 아야황자가 텐지인지 텐무인지 아니면 제 3의 다른 사람인지에 대해서 편을 갈라서 극심히 논쟁중입니다.
보황녀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조메이 천황과 재혼을 하면서 부터입니다. 스이코 천황이 서거하자 비다츠 천황의 손자이자 히코히토(彦人) 황자의 아들인 타무라(田村) 황자와 쇼토쿠(聖徳) 태자의 아들인 야마시로(山背) 황자가 각축을 벌이다가 타무라 황자가 등극하여 조메이 천황이 됩니다. 조메이 천황은 즉위 후에 보황녀를 황후로 영입합니다. 보황녀는 이 때문에 유명해지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문제는 왜 이미 결혼한 유부녀가 황후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메이 천황이 강권으로 아내를 취했을 가능성이 있죠. 아니면 남편과 사별했거나 첫 번째 결혼을 숨겼을 수도 있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 결혼을 준비한 것은 당대의 실력자인 소가노이루카(蘇我入鹿)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어느 경우라도 사이메이 천황이 뛰어난 미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백제마니아였던 조메이 천황이 서거하자 보황녀가 등극하여 고오교쿠 천황(642~645)으로 등극합니다. 이에 야마시로 황자의 불만과 움직임을 주시하던 당시 실권자인 소가노이루카가 선수를 쳐서 야마시로 황자를 비롯한 쇼오토쿠 태자의 자손이 사는 우에노미야(上宮)를 공격하여 일족을 전멸 시킵니다.
아마 이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었던 같습니다. 천황가를 무참히 제거하고 백제계 전체를 위협하는 소가씨의 전횡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던 것이죠. 고오쿄쿠 천황의 아들 나카노에(中大兄) 황자는 이를 심각하게 바라본 듯합니다. 아마 자신도 야마시로의 전철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죠. 나카노에는 외삼촌인 가루(軽) 황자와 불교중심의 소가씨와 적대적인 나까또미노까마따리(中臣鎌足) 등과 의기투합하여 소가노이루카를 제거하기로 결의합니다.
결국 천황의 어전에서 나카노에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소가노이루카는 참살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일본서기』는 매우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일본을 지배하던 '사실상의 제왕'이었던 소가씨의 본가가 멸문이 된 것이죠. 이것이 유명한 을사정변(乙巳の変 : 잇시노헨)입니다.
고오교쿠 천황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친정가와 아들간의 참극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곧 바로 퇴위하여 아들인 나카노에게 천황위를 물려줍니다. 그러나 나카노에는 스스로는 즉위 하지 않고, 외삼촌인 가루황자에게 황위를 추천, 고토쿠 천황(孝徳天皇 : 645~654)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황태자가 되어 실질적인 개혁업무를 총괄지휘하게 됩니다. 이 시대가 바로 유명한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쟁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왜 나카노에가 등극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 다른 하나는 '다이카 개신이 과연 이 신정부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일까?'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다이카 개신의 기본적인 방침은 쇼토쿠태자·소가노에미시·소가노이루카 등이 이미 마련한 것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동향이기도 합니다.
나카노에는 황태자로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라이벌인 후루히토(古人) 황자와 을미정변의 동료였던 이시카와마려(石川麻呂)를 제거합니다. 개신정권이 들어선 후 8년 고토쿠 천황과 나카노오에 황태자 사이에 큰 불화가 일어납니다. 나카노오에는 왕도를 나니와(難波津)에서 아스카로 천도할 것을 제의했으나 고토쿠가 이를 거절하자 나카노오에는 왕족과 귀족, 관료들을 데리고 아스카로 떠났습니다. 그러자 충격에 빠진 고토쿠는 이듬해 서거합니다. 그런데 당시 나이가 29세였던 황태자 나카노오에는 이번에도 또 즉위를 하지 않고 이전의 천황이었던 자기 어머니 고오교쿠를 다시 천황으로 등극시키는데 이 분이 바로 사이메이 천황입니다.
이렇게 나카노에 황자는 고토쿠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도읍을 옮기고 난 뒤 고토쿠 천황이 서거하자 이상하게도 다시 어머니 보황녀를 황위에 모셔 사이메이 천황이 되게하고 자신은 다시 그녀의 황태자가 됩니다[보황녀 = 고오교쿠 천황 = 사이메이 천황]. 그러면서 고토쿠 천황의 남은 자식인 아리마(有間) 황자도 살해합니다. 왜 이 때도 자신이 등극하지 않고 어머니를 다시 천황에 앉힌 것일까요?
이 때가 바로 백제의 멸망기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은 믿음직한 아들인 나카노에와 함께 군대를 모아 규슈에 옵니다. 백제 구원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부흥시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때 사이메이 천황은 이상하게 급서하고 맙니다. 이에 대해서는 항간에는 소가씨의 저주가 내렸다고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도 나카노에 황자는 바로 등극을 하지 않습니다. 나카노에는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의 유해를 수도로 보낸 다음 군대를 지휘하여 백제에 군을 보내지만 백강[白江 : 백촌강(はくすきのえ)]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맙니다.
『일본서기』의 사이메이 천황기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기사가 있습니다.
"(사이메이) 천황이 아사쿠라산(朝倉山)의 나무를 베어 궁궐을 지었기 때문에 신이 노하여 대전을 무너뜨렸다. 또 궁전에는 귀신불(鬼火)이 보였다. 이 때문에 대사인 및 여러 근시중 가운데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황태자(나카노에)는 천황(사이메이)의 상(喪)을 옮겨서 이와세궁(盤瀨宮)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아사쿠라산 위에 귀신이 있어 큰 갓을 쓰고 장례의식을 엿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다소 황당하기도 하지만 이 기사는 『부상략기(扶桑略記)』나 『제왕편년기(帝王編年記)』등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귀신이 원령(怨靈) 소가노에미시로 봅니다. 이 말은 다른 의미에서 사이메이 천황을 옹립한 사람이 소가에미시·소가이루카인데 그들을 참살한 것을 일종의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그러니까 실제로 소가씨를 제거한 것은 사이메이 천황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소가노이루카가 사이메이 천황의 애인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아니면 백제원정의 실패로 피폐해진 국정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일본서기』의 편찬자가 기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