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 인 문 과 학

왕궁리 유적

작성자十月愛|작성시간09.03.11|조회수231 목록 댓글 0

왕궁리(王宮里) 유적이 위치한 익산시 왕궁면은, 백제가 경기도 일대를 장악하게 되면서 남하할 수 밖에 없었던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곳이다.


백제가 마한을 완전 통합한 후에도 익산은 주요도시였으며, 새로운 도읍지 터로 각광받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 집중적으로 천도계획이 이루어진 것은 제30대 무왕(武王: A.D. 600~641)대에 일이다.


무왕은 익산에 천도하기 위해 미륵사를 창건하여 분위기를 일신시켰으며, 왕궁리에도 천도를 하기 위한 대규모 공사의 일환으로 관궁사지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연차 발굴조사를 진행, 그 동안의 조사에서 백제시대의 담장(宮墻) 및 축대(石築), 대형화장실, 정원(庭園),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지, 공방지(工房址) 등 궁성관련 유구와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 주변에서 금당지, 강당지 등 통일신라시대 사찰유구를 확인했다.


이 유적지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대형 화장실 터이다. 이 화장실은 오늘날의 정화조와 같은 과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3기가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발견되었다. 또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공동화장실로,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화장실이어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아울러 대형 화장실과 관련된 수종(樹種)·기생충(寄生蟲)·토양(土壤)분석을 통하여 화장실 목부재로 굴피·상수리·밤나무가 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했다. 회충(蛔蟲)·편충란(鞭蟲卵)의 발견으로 화장실의 존재를 확증하였음은 물론 과거에 주로 채식을 하였으며 농사에 사용된 거름으로 인분을 사용하였던 것을 확인하였다.


기존 조사에서 백제말~통일신라시대 2시기에 걸쳐 사용된 석축배수로와 연결돼 아래층에서 백제말에 조성된 서벽 암거가 확인됨 으로써 성벽의 축조시기를 백제말(7세기)로 설정할 수 있게 됐다. 구덩이의 길이는 10m내외, 너비 1.8m내외, 깊이 3.4m정도이다. 내부에 직경 10cm전후의 나무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하였는데, 이중 1호 수혈내에서는 다량의 기생충란(회충,편충,간흡충 등)이 토양분석 결과 확인되었으며, 용변 후 뒤처리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길이 20cm내외의 나무막대가 50여점 출토되었다.


또한 왕궁사(王宮寺).대관관사(大官官寺)명(銘) 명문와, 수부(首府)명 인장와, 연화문 와당, 금제 영락(瓔珞), 유리구슬, 뒤처리용 나무막대, 각종 토기 및 중국제 청자편 등 총 3000여점의 중요유물이 출토됐다.


부여 문화재 연구소에서 오랜 기간 발굴한 결과 현재 5층 석탑이 남아 있는 지역 너머 구릉 지대에서는 긴 장방형의 성터가 확인되었는데, 백제 시대 말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발굴중인 지역 중 5층 석탑 주변에서는 관궁사(官宮寺)라는 사찰명이 적힌 명문와가 발견되어, 이 탑이 있던 사찰이름이 관궁사였음이 밝혀졌다. 왕궁리 유적에 있는 국보 289호 5층석탑으로,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이나 그 형태는 백제 전통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재현하고 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탑의 해체 과정에서 백제기와조각등이 나와 , 이탑역시 백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석탑의 해체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 제123호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관궁사지 5충석탑이 고려시대 초기것으로 발혀졌고, 그 하단부에서 선대 유구(건물지, 목탑지)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최소한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백제 양식의 토기나 기와등을 미루어 보아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강왕"이 이곳「지모밀지(枳慕密地)」에 천도했다고 기록하한 무왕의 익산 천도설에 관련된 주장은 매우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


▣ 왕궁리 유적전시관


전북 익산의 왕궁리 유적은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하면서 백제 유산으로는 처음 왕궁의 담장과 내부 구조를 밝혀냈다. 백제 후기 천도설이 주장되는 익산에서의 백제 문화를 이곳에서 발굴한 유적 유물을 통해 보여줄 전시관<사진>이 문을 연다.


전북 익산시가 왕궁 터 바깥 남동쪽 부지에 연면적 2250㎡의 왕궁리 유적 전시관을 완성, 23일 개관한다.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된 건물과 유물들을 전시하면서 백제 왕궁 속으로 안내하고, 왕궁이 사찰로 변화하는 과정도 보여준다.


공방에서 생산된 금·유리 세공품와 왕궁 지붕의 연꽃무늬 수막새, 수부(首府)라고 찍힌 기와, 왕궁에서 쓰던 토기류, 사찰 관련 기와류 등 289점을 전시한다. 영상실·수장고·자료실 등도 갖췄다.


백제인들이 만든 기와의 조각들을 만져볼 수 있고, 주요 유물의 이미지를 새긴 도장을 찍어갈 수 있다. 백제 무왕의 천도를 기록한 중국 고문서 '관세음 응험기' 원문과 왕궁리 5층 석탑의 이미지도 목판에 새겨 찍을 수 있도록 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