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건성이나 광동성은 원래 중국이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지금의 호북성에서 일어난 초(楚)와, 절강성에서 일어난 월(越)도 말레이계인 민족이 세운 왕조였고 오(吳)도 - 마치 북위가 타브가츠(탁발선비)족과 한족의 연합 왕조인 것처럼 - 말레이계의 문화와 주족(周族)의 문화가 섞여서 태어난 왕조였다.
비록 유목민족이 세운 진(秦)나라가 초나라를 무너뜨렸고 진나라를 이어받은 한(漢)이 옛 초나라 땅을 손에 넣긴 했지만, 절강성 내륙에는 삼국시대 말기까지 산월(山越)이라고 불리는 원주민이 오나라를 괴롭혔고 지금의 호남성/호북성에는 서기 219년 촉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만이(蠻夷)’라고 불리우는 이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무릉부(武陵部)종사 번주(樊伷)가 여러 오랑캐들을 끌어들여 무릉을 한중왕 유비에게 귀부시키려고 했다.”―『자치통감』
이들은 서기 222년 촉(蜀)이 오나라와 싸울 때 유비의 용병이 되었다.
“촉한(蜀漢)의 사람들이 항산(호북성 장양)에서 무릉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게 되자 양양군 사람인 시중(侍中) 마량(馬良)에게 명하여 황금과 비단을 갖고 가 오계(五溪. 호남성과 귀주성의 경계에 있는 다섯 계곡)의 모든 만이<(蠻夷)>들에게 상으로 나눠 주고 관작도 주도록 했다.”―『자치통감』
“육손(관우를 생포한 오나라의 장수)이 전군을 이끌고 일제히 나아가 촉한의 장수인 장남(張南)과 풍습, <호인(胡人)>의 왕 사마가(沙摩柯)등의 목을 베고 촉한군의 영채 40여 채를 모두 무너뜨렸다.”―『자치통감』
세월이 흘러 유비가 손권을 친 지 42년이 흐른 서기 263년에도, 오나라는 촉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호남성의 원주민들이 들고 일어날까봐 두려워한다.
“오나라는 무릉군 5계의 이인(夷人)들이 촉과 맞닿아 있어 촉한의 멸망으로 그들이 반기를 들까봐 두려워했다.”―『자치통감』
이들은 서기 231년 반준(潘濬)이 이끄는 오나라의 5만 대군과, 오나라를 도우러 온 촉의 군사와 맞서 싸울 정도로 강했다(『자치통감』에는 오나라의 무이장군撫夷將軍인 고상高尙이 “이전에 반태상[반준]이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와 5계의 이인을 토벌했는데 그것도 당시 유씨劉氏[촉한]와 연합하고서야 겨우 이인들을 귀복시킬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옴).
서기 280년 서진(西晉)이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통일한 다음에도 중국의 중심지는 여전히 낙양과 장안 일대였으며 한족(漢族)은 서기 316년 서진이 무너진 다음에야 장강 일대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그나마 서기 318년에 세워진 동진 중앙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지역은 동남지방의 8개군에 불과했고, 강남의 논밭이 늘어난 시기는 송나라가 세워진 서기 420년부터이기 때문에 중국 남부는 이때에야 비로소 한족의 땅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따라서 장강 일대인 상해, 절강성, 남경, 강서성(江西省), 호북/호남성보다 더 남쪽에 자리잡은 복건성이나 광동성은 남북조 시대 이후에야 한족의 땅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통계 자료와 연구결과는 이 생각이 옳음을 입증해준다.
“우선 660년에 멸망한 백제(남부여)유민들부터 추적해 보자. 즉『신/구당서』에 의하면,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은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서는, 백제 의자왕과 태자 융(隆), 왕자 효인(孝仁) 및 장수 58인을 당경으로 압송했으며, 이 때 압송되어 간 백제유민은 백제본기에 12,807인으로 되어 있다.
… (중략) … 문무왕은 동왕 10년(670) 7월을 기하여 웅진도독부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고, 다음해인 문무왕 11년(671) 7월에 공주에 인접한 부여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이 지난『자치통감』권 202 의봉 원년(676) 2월조에 이르러 ‘웅진도독부를 건안고성(建安故城)으로 옮기면서, 이미 서주(徐州 : 강소성 팽성彭城)와 연주(兗州 : 산동성 곡부曲府)로 옮겼던 백제호구를 모두 건안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소멸(671)된 웅진도독부는 5년이 지난 676년에 다시 중국의 건안고성에 재건된 다음, 서주와 연주에 이주되었던 백제유민 12, 807인을 건안고성으로 재이주시켰던 것이다.
그리고『구당서』권 5 고종본기 의봉 2년(677) 2월에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도독 대방왕으로 봉하여 백제유민을 관할하게 하였다.’ … (중략) … 일본학자 쓰다씨는 … ‘건안에 두었던 백제인을 다시 신성(요령성에 있던 옛 지명)으로 옮겼다.’고 보았다. … (중략) … 그러나 웅진도독부를 요동지역으로 옮겼다면 전연 생각할 수 없는 사태가 된다.
당시의 요동지역은 당나라 정규의 행정구역이 아니라 잠정적인 군사적 점령지였으며, 더더욱 고구려 유민들에게 쫓기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던 불안지역이었다. 따라서 웅진도독부를 요동지역으로 옮겼다면 서주와 연주에 일단 정착시켜서 당나라 국적까지 취득시켰던12, 807명의 백제 유민을 적지에 갖다 버린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태이다
(김성호 박사는 이렇게 주장하나, 나는 이들이 노비가 되었지 양인이 되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시 남부여와 고구려는 동맹을 맺고 있었으므로, 만약 당나라가 남부여 유민들을 요녕성 신성에 ‘내다 버렸다’면 이들이 반기를 들고 고구려 유민과 손잡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나는 김성호 박사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다).
또한 요동지역에 있어서 안동도호부의 후퇴기록은 있어도 웅진도독부의 후퇴기록은 전무하다. 이것이야말로 웅진도독부가 요동으로 이주되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결정적 근거이다.
이도정책(移徒政策)이란 원래 그들의 고국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진 오지로 보내는 것이 원칙이며(그래서 삼한도 신라 사람들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충청북도나 전라북도로 옮긴 것이다 - 옮긴이), 백제인들을 고향에 가까운 요동으로 이주시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중략) … 그러면 웅진도독부가 옮겨진 건안고성은 과연 어디였을까. 건안(建安)이란 지명은 요동 건안성 외에도 복건성/운남성/광서성(광서장족자치구)/하남성(河南省)/감숙성 등등 곳곳에 널리 분포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민인(閩人)들이 거주하는 복건성 건안으로 지목된다.
즉『통전』권 182 주군 건주조(建州條)에 ‘건안성은 한나라 때 다스리던 현이며, 오나라가 설치한 건안현은 무이산(武夷山)에 있다.’고 했다. 또한『독사방여기요』권 97 복건 건안조에는, 오나라 건안성은 복선산(覆船山) 아래이고 당나라 건안성은 약 3리 가량 떨어진 황화산(黃華山) 아래로 되어 있다.
따라서 당나라가 포기했던 오나라 때 건안성은 자연 ‘건안고성(옛날의 건안성)’이 된다. 오늘날의 복건성 건양지구(建陽地區) 건구현(建甌縣)이며, … 즉 서주와 연주로 이주시켰던 12, 807명의 백제인들을 강회/강남운하로 항주까지 남하시킨 다음 육로로 무이산맥의 선하령을 넘어 민강상류의 건안고성으로 재이주시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를 답사하지 못한 터여서 더 상세한 자료를 찾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복건지역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이다.
즉 복건성의 인구추이를 보면, ‘수나라(581~617) 때 고작 14,020호(戶)였던 것이 당나라 개원연간(713 ~ 741)에 무려 150, 900호(戶)로 증가했다(시촌찬차랑市村瓚次郞의 연구결과)’. 바로 이 시기에 웅진도독부가 이동(676) 되었다. 그리고 다시 ‘당나라 중엽에서 북송(960~1126) 중엽까지 또 11배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인구팽창의 최대 원인은 실버 러시, 즉 은광개발 붐 때문이었다고 한다(장곡천성일長谷川誠一의 연구결과).
복건성은 수나라 때까지 중국영토 내에서 가장 개발되지 않은 오지(쉽게 말해, 수나라 때까지도 한화漢化하지 않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였다가 은광이 개발된 당나라 중엽부터 대대적으로 인구를 투입하고 또한 몰려들어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유민을 복건성의 건안고성으로 재이주시킨 것은 곧 은광개발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이는 19세기까지는 캘리포니아나 콜로라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미국 백인들이 금이 나온 다음부터 대거 이주한 사실과 비슷하다. 단, 나는 김성호 박사와는 달리 은광 개발은 처음에는 당나라가 백제 유민들을 노비로 부리는 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남쪽으로 내려온 한족들이 품삯을 받고 광부 겸 농부로 일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한편 복건성은 지형적으로 무이산맥(武夷山脈)에 둘러싸인 산악지역이어서 농경지가 지극히 희소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버 러시가 본격화된 당나라 중엽부터 북방의 한족들이 대거 남하하여 토지를 대대적으로 겸병했다(금광을 찾아서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미국 백인들이 금이 바닥난 다음부터는 직업을 상인이나 농부로 바꿔 아예 눌러 앉은 사실을 떠올려 보라).
아마 이러한 정세의 변화로 당나라 때 복건성 내륙의 건안고지에 정착했던 백제유민들은 점차 해안으로 밀리어 (생업을)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해상활동으로 전환한 것 같다.”―『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1』에서
따라서 백제 유민들은 수가 많았고 한족과는 다른 곳(복건성 바닷가)에서 살았기에 송나라 중기까지 동화되지 않았지만, 신라현의 신라인들은 수가 너무 적었고 한족 이주민처럼 내륙에서 살았기 때문에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한화(漢化)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나는 복건성이 당나라 중기까지 사실상 한족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라인이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