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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문 과 학

플라톤의 사상

작성자潭月|작성시간10.05.21|조회수3,233 목록 댓글 0

 

소크라테스는 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졌지 전체로서의 사물의 본성 즉 인간과 인간이 관계하는 세계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넘어서, 인간존재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종합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또한 그것을 해명하고자 노력한 최초의 철학자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인간과 인간이 관계하는 문제 전반에 대해서 관심과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사상이 얼마나 방대한 가를 잘 알려주고 있으며, 또한 후대의 철학사상에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지를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N. Whitehead, 1861-1947)의 주장, 즉 서양철학의 전체는 플라톤 사상의 기반에 있으며 또한 그의 사상의 인용에 불과하다는 표현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존재론(세계관)과 인식론


플라톤 철학의 중심에는 그의 이원론적 세계관인, 즉 세계는 2개로 구분되어 생각되어진다는 사상이 있다. 플라톤의 이원론적인 사고는, 세상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 속에 있다는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44-483)의 사상과 세상은 변화하지 않고 항상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변화를 부정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종합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즉 변화하는 시․공의 세계와, 고정 불변하는 존재의 세계로 구분되어진다. 존재의 세계는 일명 이데아계(idea 可知界)라고 명명되어 진다. 그것은 사고와 정신의 세계라고 할 수 있으며 고정되고 불변하는 항상 참된 세계이다. 반면에 변화하는 세계는 거짓된 세계로서, 보통 현상계(doxa 可視界)라고 불리어지는 감각의 세계이다. 그것은 존재의 세계에 대한 모상으로서 변화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데아계, 존재의 세계를 앎, 보편적인 지식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앎의 세계는 변화되지 않고 고정되고 영원불멸하는 세계에서만 가능하지, 억견이나 현상의 세계와 같이 변화하는 세계에서는 보편적인 앎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파이돈』에서 철학자는 자기의 육체와 감각을 죽여야 절대적 보편적인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진리나 앎은 절대로 감각적 경험적인 것에 의해서 파악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감각적 경험적인 지각은 한결같은 인식이 아니고 순간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한결같은 보편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원론적 세계관)


말하자면, 가시계(현상계)는 감각을 가지고 알 수 있는 것들이고, 가지계는 지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세계이다. 예를 들면, 지금 수학 선생이 삼각형(실물)을 하나 가지고 와서 설명을 한다고 해보자. 학생들은 다시 실물로 된 삼각형을 공책에 그렸다(모상). 선생은 삼각형을 보여 주며 변a와 b가 같고, 변b와 c가 같으면 변a와 c는 같다고 하면서 삼각형의 성질을 설명해 주고, 우리는 그 특징을 알게 되었다(수학적 인식).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삼각형의 이데아(형상)가 필요하고 이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모든 인식이 가능해진다. 즉 선생님이 보여주신 삼각형과 그것을 공책에 그린 삼각형은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차원이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서는 진정한 인식에 도달할 수가 없다. 비로소 지성을 통해서 삼각형의 성질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삼각형의 이데아를 인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인식은 이처럼 모상>실물>수학적 인식>이데아로 갈수록 순도가 높아지고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이며, 가치가 있는 것이 된다. 즉 이데아계는 참된 존재의 세계, 진리의 세계, 앎의 세계, 영원불멸의 세계, 참된 인식의 세계, 정신의 세계이고 현상계는 거짓된 세계, 감각의 세계, 변화의 세계, 물질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인간의 본질과도 연관되어 설명되어질 수 있다. 플라톤은 인간 또한 2개의 세계인 정신과 육체(정신계와 감각계)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진리, 보편적인 지식에 나아가려고 한다면 정신에 힘씀으로서 가능하지, 절대로 육체적 감각적 인식에 의해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이 참된 진리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육신적이며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참다운 모습인 정신(nous), 즉 영혼(psyche)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영혼이 감옥인 육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참다운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며 또한 참다운 의미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영혼만을 지니며, 육체는 단지 영혼의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철학자는 항상 자신의 영혼을 감각적인 육체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 영혼론)


그리고 플라톤은 그의 대화편 『파이돈』에서 정신은 본성적으로 항상 이 진리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고, 지식과 올바른 개념들이 이 인간 안에 깃들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면서, 진리란 인간정신 밖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정신에 이미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정신이 진리를 인식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정신이 진리를 기억(재기억)한다고 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 순수한 진리를 영혼(정신)이 신들 곁에 미리 존재하고 있었을 때에는 직접 보았으나, 이제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감각적인 지각의 자극을 받음으로서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는 진리를 단지 다시 회상(想起 anamnesis)할 수 있을 뿐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진리는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으며, 이런 주어져 있는 그러나 망각하고 있는 진리를 상기하는 것이 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생각은 결국 감각적인 경험에 의해서는 결코 어떠한 지식도 얻을 수 없으며, 우리는 항상 재기억이나 재인식에 의해서만 앎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진리(aletheia)를 망각했던 것을 재기억 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미 있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상기론)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서는 앞에서 거론한 상기라는 개념과 더불어 관여(methesis 참여)라는 개념도 또한 매우 중요하다. 상기라는 개념이 창조된 세상에 대한 해명, 즉 세계창조 또는 존재자들의 근원에 대한 해명으로서의 인식론적인 단초를 제공하는데 반해서, 관여(참여)라는 개념은 세계(존재)가 생성되는 것을 설명하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의 핵심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관여란 우선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과 관계를 하는 것으로서 그것에 닮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것(모상, 원형에 대한 모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단계로서 그것의 원형(原型 paradeigma; 이데아 idea)을 필요로 하고, 그것에 관여함에 의해서, 그것을 닮음에 의해서 존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상으로서의 그 존재자는 다시 원형으로서, 다른 존재자(모상)가 될 수 있는 원인이 되며, 다른 존재자(모상)는 그 존재자(원형)에 관여함에 의해서 존재될 수가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러한 식으로, 즉 모상(보다 낮은 존재자)이 원형(보다 더 높은 존재자)에 관여함에 의해서 세상이 창조되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현상계에는 수많은 이데아(관념, 원형, 전형, 공통점)들, 즉 사물들의 이데아들이 존재할 수 있는데, 이 이데아들은 보다 높은 이데아들에 관여(참여, 닮음)함으로서 존재할 수 있으며, 이 보다 높은 이데아들 또한 보다 더 높은 이데아들에 참여함으로서 존재할 수 있으며, 이러한 단계가 계속되어서 끝으로는 하나의 최고의 이데아이며 선의 이데아(일종의 최고의 존재자 혹은 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음)에 참여함에 의해서 존재 가능하다. 예를 들자면, a) 아름다운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며, 이 아름다움에 참여함으로서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 b) 훌륭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먼저 훌륭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훌륭함이라는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서만 가능하다. c) 선한 것들이 존재하려면, 먼저 선함이라는 이데아가 있어야하며, 그 선함의 이데아에 참여함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러한 아름다움, 훌륭함, 선함의 이데아들은 선함이라는 공통적인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의 이데아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여, 참여)


플라톤은 그의 대표적인 대화편인 『국가』의 제7권에서 서술하고 있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진리와 현상(혹은 이데아계와 현상계, 영혼과 육신의 관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1단계] 우리들은 감옥과 같은 지하의 동굴 속에 갇혀 있고, 태어나면서부터 나무에 쇠사슬로 붙들려 매여 있어서, 뒤돌아 볼 수도 없고 항상 동굴입구의 반대쪽만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큰 바위가 동굴입구를 막고 있지만은 약간의 틈새가 있고, 그 틈새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그리고 이 틈새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의해서 동굴 벽에 비쳐지는 바깥세상의 것들에 대한 그림자만을 볼 수 있다. [2단계] 그런데 이들 중 한 죄수가 누군가에 의해서 풀려나서, 그리고 누군가에 이끌려져서 어둠 속에만 있다가 갑자기 강렬한 불빛이 비쳐지는 동굴입구를 향해서 고통스럽게 나아가고, 처음에는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해서 실제의 세계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 죄수에게 지금까지는 거짓된 모상만을 보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지금은 보다 더 진짜(실재)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한다면, 그 죄수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3단계] 그러나 계속해서 누군가가 이 고통스러워하는 죄수를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서 억지로 끌고 가서 태양[빛]이 있는 실제의 세계에 도달하도록 하였다면, 우선 그 죄수는 놀라움으로 인해서 진짜들 중에서 어느 하나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죄수는 점차적으로 그림자가 아니라 참된 세상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그림자들을 쉽게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물속에 비친 다른 것들의 상(象)들을 보게 될 것이며, 실물은 그런 뒤에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늘에 있는 것들과 하늘 자체를 밤에 별빛과 달빛을 봄으로서 더 쉽게 관찰하게 될 것이다. 낮에 해와 햇빛을 봄으로서 그것들을 관찰하는 것보다도 더 쉽게 관찰할 것이다. [4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죄수는 해를, 물속이나 다른 자리에 있는 해의 투영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리에 있는 해를 그 자체로서 보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태양은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며, 보이는 모든 것을 다스리며, 또한 어느 면에서는 그를 포함한 모든 죄수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임을 알게 될 것이다. [5단계] 그리고 그는 동굴로 돌아가서 자신이 본 참된 진리를 붙들려 있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그의 참된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그가 위의 세계에 올라가서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죽여 버리려고 할 것이다.


우선 이 동굴의 비유가 함축하고 있는 바는 간단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진리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단지 그것의 그림자만을, 사물의 실재는 보지 못하고 그것들의 모상(가상, 허구, 기만)만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결코 진리의 참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이 동굴의 감옥에서 탈출해서 진리의 참 모습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모상의 세계인 현상계로부터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길을 플라톤은 철학의 길, 지혜의 길이라고 하여, 철학자가 나아가고 또한 가르쳐야 할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동굴의 비유)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다섯 개의 단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첫 번째의 단계는 죄수들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 단계는 감각적인 세계로서의 일상적인 삶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는 죄수가 동굴 안의 감옥에서 쇠사슬로부터 풀려나게 되는 단계인데, 인식의 제1단계라고 할 수가 있다. 이 단계는 고통을 수반한 혼란 속에서 변화되지 않는 진리로서의 직접성을 상실하게 되며, 실재적인 것의 모상으로서 지난 것 안에서 참된 것을 찾으려한다. 경험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자 하는 자연과학자들의 태도가 그러하다. 세 번째의 단계는 동굴로부터 완전히 해방이 되는 단계인데, 인식의 제2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인식의 단계는 현실세계에서 참된 것을 보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과 더불어서 감각적인 현상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정신의 눈을 통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갖는 단계이다. 수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한다. 네 번째의 단계는 인식의 제3단계로서 죄수가 더 이상 현상적인 것에 통하여 실재(진리)를 보려고 하지 않고 실재 그 자체(태양)를 직접적으로 보는 철학의 단계이다. 말하자면 모든 존재자들의 근거를 최고의 이데아에서 발견하는 단계로서, 인간 인식능력의 한계이다. 다섯 번째의 단계는 동굴에 있는 죄수들에게 돌아가는 것인데, 이것은 철학의 의무이다.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고 또한 탐구한 바를 알려야하는 의무를 갖는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진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된 진리를 피력할 수 있었던 것처럼, 철학자들 또한 많은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끝까지 추구하고 전파해야하는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다. (인식의 단계)


국가론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론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다. 우선 플라톤은 국가가 이상적으로 잘 구성되어 전체의 안녕과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 세 가지 계층의 집단들이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국가에는 식량과 다른 필수품을 생산하는 노동자계급이 있어야하고, 국가를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군인계급이 있어야하며, 국가를 관리하고 통치하는 통치자계급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국가가 이상적으로 잘 유지되기 위해서 각각의 집단들이 힘써야할 덕행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첫 번째로,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들과 생활필수품을 생산해내는 수공업자들은 무엇보다도 지나친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절제에 힘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플라톤은 국가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고, 아울러 국가 안의 질서를 유지하는 계층의 사람들은 위험 앞에서도 굳건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집단은 항상 용감한 것에 힘써야 한다. 즉 그들에게는 용기라는 덕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플라톤은 국가의 일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성을 사용하여 국가의 정책을 수립하고 국가를 잘 다스려야 함을 강조한다. 즉 국가를 통치하는 데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지혜로움이 필요하며, 따라서 통치자는 항상 지혜(이성)를 갖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를 갖도록 노력하는 자, 즉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철학자들이기 때문에 통치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플라톤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상의 계층들이 추구하는 ‘덕’들, 즉 절제, 용기 그리고 지혜(혹은 이성)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 즉 국가가 이상적으로 잘 유지되는 상태를 플라톤은 네 번째의 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의라고 말한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네 가지의 덕에 대한 견해는 각 개별적인 인간의 본성적인 측면과 윤리적인 측면의 연관관계에서도 이야기되어질 수가 있다. 첫째로, 어떤 인간은 이성적인 행위를 하기보다는 본능에 집착하여 욕구(욕망, epitumetikon)에 지배되기가 쉽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에게는 절제(sophrosyne)하는 것이 필요하며, 절제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만들 수 있다. 둘째로, 어떤 인간은 감정(tumikon)에 치우치거나 또는 어려움이나 두려움 등에 의해서 올바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비겁한 행동 등을 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용감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andreia)가 필요로 한다. 셋째로, 인간은 어떤 것을 행할 때나 선택을 할 때, 이성(logikon)에 올바른 선택이나 행동을 해야 하므로, 항상 지혜(sophia)를 추구하면서, 또한 지혜롭게 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지혜를 갖고자 항상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인간이 이러한 덕행들, 즉 절제, 용기 그리고 지혜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정의(dikaiosyne), 말하자면 이러한 덕목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한에 있어서는 항상 정의로움의 상태에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의 덕이 바로 서양 윤리학의 네 기둥이라고 불리는, 그리고 후에 크리스트교 철학의 윤리적인 디딤돌이 되는 사추덕(四樞德이다. (영혼론, 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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