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9대 숙종은 세자 시절인 현종 12년(1671)에 11세의 나이로 김만기의 딸(훗날의 인경왕후)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현종 15년(1674)에 14세의 나이로 국왕에 즉위했다. 이처럼 일찍 결혼하고 일찍 왕이 되었는데도 그 후 오래도록 그는 왕자를 얻지 못했다. 인경왕후에 이어 인현왕후도 맞이하고 후궁 김영빈(영빈 김씨) 등도 맞이했지만, 등극한 지 10년이 훨씬 지나도록 그는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그런 숙종이 첫아들을 얻은 때는 숙종 14년(1688)이었다. 이때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윤으로서 훗날의 경종 임금이다. 당시 후궁이었던 장희빈과의 관계에서 숙종의 제1왕자가 태어난 것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아들을 얻어서 그랬는지, 숙종은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이윤 중심의 후계구도를 조기에 정착시키고자 했다. 송시열이 이끄는 다수당인 서인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윤의 세자 책봉을 추진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는 정치적 결단까지 내렸다. 이윤의 앞길에 방해가 될 만한 요인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숙종은 결국 숙종 16년(1690)에 만2세가 된 이윤을 세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윤을 세자로 책봉한 데에 이어 같은 해에 장희빈을 중전에 책봉함으로써, 숙종은 이윤의 지위를 한층 강화시켜 주었다.
송시열은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제17대 효종 임금의 왕권강화정책에 맞서 기득권층의 이익을 지켜내고 효종을 사면초가의 궁지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 효종을 상대로 정치적 압박을 강화하다가 효종이 41세의 나이에 갑작스레 사망하자, 송시열은 그 직후에 벌어진 제1차 예송논쟁(죽은 효종의 위상 설정과 관련된 논쟁)에서 효종의 위상을 격하 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사실상 그는 '주군을 잡아먹은 신하'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그만큼 송시열의 권력이 막강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송시열이 효종의 손자인 숙종의 재위기 때에 경종 이윤의 세자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숙종에게 상소를 올려 정치적 압박을 강화했다. 반대당인 남인세력의 지지를 받는 장희빈의 아들이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할아버지인 효종처럼 송시열에게 힘없이 당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지켜내기 위해 송시열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결국 숙종이 승리하고 송시열은 사약을 들이켰다. 송시열이 결국 장 희빈 아들의 세자책봉 문제 때문에 고꾸라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 최근 MBC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동이>를 보면 최숙빈이 이윤의 세자책봉을 저지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송시열이 했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최씨가 숙종의 눈에 띄어 하급궁녀 신세를 벗어난 것은 숙종 18년(1692) 이후였다. 이때는 이미 세자책봉 문제가 마무리되고도 2년가량이나 경과한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이윤의 세자책봉 문제가 논의되던 당시에는 최씨가 그런 문제에 대해 함부로 발언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최숙빈이 이윤의 세자책봉을 저지하려고 동분서주했다는 드라마 <동이>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무한정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과도한 픽션은 대중의 역사인식을 오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공유물인 역사가 드라마 때문에 왜곡된다면, 작가의 상상력을 무한정 허용함으로써 생기는 이익과 역사적 사실을 보존함으로써 생기는 이익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