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고대문자의 원류를 연구해온 양국 학계가 이제 ‘각필 부호’라는 비밀의 열쇠를 손에 쥐게 됐다. 옛날 사람들이 한문 서적을 읽을 때 메모 용으로 썼던 각필(사슴뿔이나 대나무 등을 예리하게 깎아 만든 펜으로 눌러쓴 필체)은 중국·일본·유럽엔 많은 흔적이 남아있으나 한국에선 그동안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특수기구 없이 육안으로는 찾기 힘든데다 전문가가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지난 7월 일본 최고의 각필 연구자 고바야시 요시노리 도쿠시마 문리대학 교수가 한국의 11세기 문헌에서 각필로 새긴 부호·문자를 처음 찾아낸 것을 시발로 곳곳에서 발견이 잇따르고 있다. 나아가 가설로만 제시돼온 일본 가나(假名) 문자의 한반도 유래설이 입증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고조되고 있다.
지난 넉달새 고바야시 교수와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 등의 한국 연구자들이 각필 흔적을 확인해낸 문헌은 50건에 달한다. 11세기 고려대장경 이후 다양한 문헌에서 각필로 새겨진 ▲훈점(조사를 표시한 점)이나 ▲구결(우리말 토씨 문자) ▲절박사(불경의 가락을 표시한 선) ▲합부(복수의 한자를 하나로 묶는 부호) 등이 발견됐다.
가나 문자의 한반도 기원설은 과거에도 오쿠라 신페이 경성제대 교수 등에 의해 제기된 바 있으며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고바야시 교수의 주장은 양국 문헌 자료의 비교를 토대로 한 실증적 분석의 결과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고바야시 교수가 제시하는 많은 근거중 핵심은 두가지다. 첫째, 이번에 각필 흔적에서 발견된 구결 문자의 고안 방식이 일본 가나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초조대장경 유가사지론 등에서 15종류의 구결 문자를 찾아냈는데, ▲한자의 일부 획을 생략하거나 ▲한자 초서체를 더 단순화시키거나 ▲한자를 그대로 갖다쓰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예컨대 은(隱) 자의 오른쪽 획을 잘라내 주어 다음의 조사 ‘은’을 표시하거나, 의(衣) 자를 단순화시켜 장소의 조사 ‘에’를 표시하는 식이다. 이는 한자 아(阿)에서 ‘ア’를, 지(之)에서 ‘し’를 만들어낸 일본 가나의 고안 수법과 똑같다고 고바야시 교수는 말했다.
둘째, 한국과 일본의 고대 훈점이 거의 일치하는 점이다. 11세기판 한국 화엄경에서 발견된 각필 흔적의 훈점은 9세기 일본 정창원 소장 화엄경에 찍힌 훈점(일본에선 오토코점이라 부름)과 놀랄 만큼 유사했다. 예컨대 한국에선 한자의 왼쪽 옆에 점을 찍어 목적격 조사 ‘을(를)’을 표시하는데, 이는 일본 화엄경도 마찬가지다.
한편 두나라 화엄경의 훈점을 보면 전체적으로 유사한 체계지만 한국 것이 복잡하고 완성도가 높은 반면 일본의 오토코점은 소박하고 원시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먼저 발달해 일본에 영향을 주었음을 뜻하는 단서라고 그는 말했다. 일본 가나 문자의 완성 시기는 통상 12세기 경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