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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빈의 최후

작성자bellar|작성시간10.09.25|조회수2,958 목록 댓글 0

 

숙종 27년(1701) 9월 23일자 <숙종실록>에 따르면, 인현왕후가 죽자 최숙빈은 왕후의 생전에 장희빈이 주술적 방법으로 왕후를 저주했다는 취지로 숙종에게 보고했다.  사료상의 분위기를 보면, 이때 최숙빈은 숙종에게 별다른 증거를 제출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소문이 있다는 식의 수준에서 장희빈의 비행을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이 보고는 결국 장희빈 처형으로 연결되었다.


이 같은 최숙빈의 행보는, 그의 평소 태도와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소령원(昭寧園, 최숙빈의 무덤)에 있는 숙빈 최씨 신도비에 따르면, 최숙빈은 매우 과묵하고 신중한 여인이었다. 장점이든 단점이든 간에 그는 남에 관해 일절 말하지 않았다. 시녀들에게도 항상 그렇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과묵하고 신중한 사람이 인현왕후 사망 직후에 별다른 증거도 없이 장 희빈을 고발한 것을 보면, 그가 이 시기에 심리적으로 뭔가에 쫓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장희빈의 중전 책봉 가능성이다. 이대로 상황을 방치했다가는, 세자의 모후이자 전직 중전인 장희빈이 중전 자리를 되찾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처럼 다급하고 신속하게 장희빈 제거에 나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최숙빈 역시 중전 자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최숙빈이 장희빈의 비행을 보고한 지 보름 정도 지난 숙종 27년(1701) 10월 7일에 숙종이 발표한 하교에서 그 같은 정황을 포착할 수 있다. 10월 7일은 장희빈이 죽기 하루 전날이었다. 장희빈의 죽음이 이미 예정되어 있던 때였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도 장희빈을 더 이상 견제할 필요가 없는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 날, 숙종은 향후 관습법이 될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렸다.


"이제부터 나라의 법으로 삼노니, 빈어(嬪御, 후궁)가 왕비에 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는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이 하교는, 중전과 후궁들이 뒤얽혀 유혈을 부른 지금의 사태가 다시는 재현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와 반성의 메시지를 후대의 왕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것이 이 하교의 표면적 메시지다. 


이 하교가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는, 이 하교로 인해 가장 피해를 입을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 하교 때문에 가장 피해를 입을 사람은 당연히 최숙빈이었다. 인현왕후가 죽은 마당에 장희빈까지 사라지면 최숙빈이 가장 유력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를 고려하면, 이 하교가 다름 아닌 최숙빈의 중전 책봉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가로막는 입법조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최숙빈의 중전 책봉을 가로막는 법을 제정했다는 사실은, 숙종이 최숙빈의 심리상태를 간파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숙종은 최숙빈이 중전 자리에 무심한 여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숙종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최숙빈을 중전 자리에 앉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필 그 시점에 그런 하교를 발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숙종이 최숙빈의 욕심을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욕심을 실현시켜줄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취한 후속 조치에서 보다 더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숙종 27년(1701) 10월 이후 어느 시점엔가 최숙빈을 왕궁에서 내보내고, 숙종 28년(1702) 9월에 세 번째 정실부인인 인원왕후를 맞아들였다. 당시 숙종의 나이 42세, 인원왕후의 나이 16세, 최숙빈의 나이 33세였다. 이후 최숙빈의 기록은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숙종은 세 번째 왕후 책봉 직후 대대적인 후궁 진봉식을 가졌다. 왕자 훤을 낳은 귀인 박씨(숙종 25년 11월과 숙종 28년 9월 사이 숙의에서 귀인으로 진급했으나 기록이 없다)는 정1품 명빈이 되었고, 숙의 유씨는 소의가 되었으며, 귀인 김씨는 영빈이 되었다.


귀인 김씨는 21세 나이에 인현왕후 폐위에 앞서 숙종의 동향을 친정에 알렸다는 죄목으로 폐서인 되어 사가로 내쫓겼던 여인이었다. 역시 인현왕후 복위되던 해에 먼저 복위되어 다시 김귀인이 되었던 그녀가 이제 34세의 나이로 영빈이 된 것이다.        


박명빈은 빈을 받은 지 1년도 못되는 1703년(숙종29년) 7월 15일 사망하였다. 왕의 사랑을 받은 것은 15년 이며, 어렵게 낳은 아들은 고작 5세의 어린 아이였다. 숙종은 어린나이에 어미를 잃은 막내아들을 안타까이 여겨 항상 곁에 두고 보살폈으며, 그해 9월 3일 전례 없이 일찍(본래 왕자명호는 7세 무렵에 내려진다) 어린 아들을 연령군에 봉하였다.        


다음해인 1704년(숙종30년)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11세의 나이에 서종제의 딸 달성서씨와 길례를 올렸다. 달성군부인 서씨의 나이는 13세였다. 연잉군이 길례를 올리자 출합의 문제가 대두 되었다. 출합이란 길례를 올린 왕자나 왕녀를 궁 밖으로 이사 보내는 것을 말하는데 새집을 짓거나 헌집을 개보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숙종 말년에 왕실의 재정이 넉넉하진 않았던 듯하다. 숙종은 유씨를 후궁 삼을 때도 거금을 써 중신들을 한숨짓게 하더니 왕자를 출합 보내면서도 거금을 들여 집을 지어 주려 하니 중신들이 남몰래 탄식 하더라는 기록이 실록에 있는데 그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숙빈 최씨는 이현에 크고 너른 집이 있는데 임금이 또 왕자를 위해 별도로 저택을 짓고자 하였다.” 최숙빈에게 크고 좋은 집이 있는데 거기 놔두고 또 새집을 지어 준다는 사실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최숙빈은 어느 순간 그러니까 인원왕후가 간택된 숙종 28년 10월 이후부터 연잉군이 길례를 올린 숙종 30년 4월 사이 궁 밖에 처소를 두게 되었다. 자연히 궁 안에 거소하는 숙종과 아들 연잉군을 자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숙종이 왜 10세도 안된 어린 아들과 어미를 떼어 놓았는지는 의문스럽다.        


최숙빈이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 허락 된 것은 1711년(숙종37년) 6월 22일이다. 이날의 실록을 보면 숙종이 연을 타고 이현궁 옆을 지날 때 마다 저 크고 넓은 집에서 최숙빈 혼자 사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며 거처를 아들이 사는 창의궁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한다고 기록 되어 있다. 최숙빈은 마흔둘이 된 이 해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들과 함께 며느리의 효도를 받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아쉽게도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47세 되는 숙종 42년부터 병에 걸려 자리보전하게 되었고, 2년의 투병 끝에 숙종 44년(1718) 3월 9일 4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연잉군의 나이 25세로 이미 많은 추억을 함께 했을 것이다.        


한편 연잉군이 출합한 다음해인 1705년(숙종31년) 숙종은 새로운 후궁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궁인 김씨로 5월 1일 숙원이 되었다. 그녀가 회임을 한 것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왕의 총애가 깊었을 뿐이었다.  숙종은 새 후궁에게도 넉넉한 은사를 베풀었는데, 사관이 왕이 색을 밝히고 있으나 아무도 간하지 않는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김씨는 어느새 숙의가 되었고, 1710년(숙종36년) 귀인으로 진봉 하였다. 귀인 김씨는 1720년 숙종이 향년 60세로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인 숙종의 마지막 여인 이었다.        


숙종은 평생에 걸쳐 세 명의 정궁과 여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그 중 왕후 두 명과 후궁 두 명은 숙종 생전에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8명의 자녀 중 6명을 생전에 잃었다. 왕후와 후궁을 폐하고 복귀시키기를 정치적인 이유로 일삼았고, 총애하던 후궁 하나는 저주의 누명을 쓰고 사사 당했으며, 총애 하던 다른 후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궁 밖에서 죽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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