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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東夷)

작성자그네|작성시간10.10.17|조회수245 목록 댓글 0

 

단재 신채호선생은 무정신의 역사가 무정신의 민족을 낳으며, 무정신의 민족이 무정신의 국가를 만드니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라고 하여 한민족의 민족혼이 없음을 강렬하게 질타하였다.


한민족은 모두 단군조선의 후예들이다. 단군조선의 뿌리는 배달민족이다. 배달민족은 바로 ‘광명의 땅 동방에 살고 있는 어진 사람’, 즉 동이족을 일컫는다.


동이의 동(東)은 해가 떠오르는 방위로 광명을 상징한다. 태양의 본질은 광명이다. 따라서 광명사상은 동이족의 태양숭배사상과 연결된다. 태양을 숭배하는 동이족의 봉(鳳) 토템과 삼족오(三足烏)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개 닭의 무리에 속하는 봉조는 원래 긴꼬리 들닭, 혹은 길들여진 집닭을 말한다. 해가 떠오르면 울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태양이 닭을 불러 깨우거나, 혹은 닭이 태양을 일깨웠다고 여겼으므로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고대인들은 태양과 닭류에 대해 숭배하기 시작했고, 양자가 복합된 토템이 탄생되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신화학자 왕대유(王大有)는 봉황은 동이족의 상징 토템이었으며, 그 원조는 삼족오라고 설명하였다. 삼족오는 태양새로서 동이족의 광명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이의 이(夷)는 첫 번째, ‘활을 사용하는 동쪽 사람’의 의미를 가진다. 후한시대 허신(許愼)이 편찬한『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이에 대해 동방지인야 종대종궁(東方之人也 從大從弓)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라는 것은 대(大), 즉 인(人)을 따르고, 궁(弓)을 따르는 것으로, 동이는 활을 쏘는 동쪽 사람이란 뜻이다. 금문(金文)의 夷는 바로 서있는 사람 뒤에 활(弓)이 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당시 동북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기마민족의 문화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신을 대신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신성한 종족을 뜻한다.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에서 ‘이’는 사람이 단정하게 윗사람에게 예를 표하듯 서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상대에 동이는 ‘인방(人方)’, ‘시방(尸方)’이라 불려지기도 했다. 이때 시(尸)는 단지 주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사 때 신이 응감하도록 앞에 세워놓은 시동, 신상으로 ‘신을 대신하는 사람, 신의 대리인’을 뜻한다. 이것은 당시 동이족이 얼마나 신성한 종족으로 비쳤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마지막으로 ‘인(仁)’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동이’는 동방에 살고 있는 ‘어진 사람(仁者)’을 나타냄을 알 수 있다. ‘이’가 ‘어진 사람’을 뜻하고 있음은『후한서「동이열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동이열전」을 보면 동방을 이라 했다. 이는 근본을 말한다. 그 의미는 이가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해 만물이 대지로부터 솟아나오는 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동이족이 군자국의 주체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이’의 ‘이(夷)’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에서 중심적인 의미는 ‘활을 사용하는 동쪽 사람’, ‘신을 대신하는 사람’, ‘어진 사람(仁者)’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동이는 동쪽의 활을 쓰는 어진 사람이란 의미로 우리 민족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동이의 의미 변화


그런데 동이가 어떻게 해서 변방의 오랑캐로 폄하되었을까? 동이가 오랑캐의 호칭으로 불리게 된 배경으로 화하족과 동이족의 정치적 대결을 들 수 있다. 이 대결은 대략 4700년 전 중국 사람들이 그들 민족의 시조로 삼아 온 황제 헌원과 치우천황과의 탁록대전으로 시작된다.


치우천황은 신농씨의 마지막 임금인 유망 때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유망을 추방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쳤다. 이 때 헌원이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치우천황에게 도전하였다. 이에 치우천황은 헌원과 10년동안 73회의 전투를 해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여기서 황제헌원과 그 족속(화하족)은 치우천황과 그 족속(동이족)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물론 그 후손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치우와 동이족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품고 2300여년을 흘러 진시황까지 내려오게 된다.


진시황에 이르러 강력한 힘을 길러 동진을 거듭하여 중국대륙 전체를 그들 화하족의 확실한 터전으로 만드는 전국 통일을 달성하고, 동이족을 변방으로 밀어내거나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동화시켜 통일제국을 이룬 것이다.


특히 한무제 때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를 저술하면서 동이족 역사의 뿌리부터 왜곡하였다. 사마천은 탁록 대전의 역사를 날조하고 치우천황의 존재를 왜곡하였고, 중국이 천자국으로서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관을 만들어 내었다.


한나라 이후 쓰인 사서에 나오는 동이는 전국시대까지 동방족을 뜻하는 ‘동이’와는 달리 ‘동쪽 오랑캐’란 뜻으로 비하되었다. 즉 당시 동이와 같이 사이(四夷)라고 불렸던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같은 오랑캐의 맥락으로 동이라 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우리 역사상에 동이라는 표현이 우리 민족에 대한 표현으로 수용된 것은 조선시기에 이르러서다.『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동이의 의미와 내용은 중국인의 관점에서 중화에 대비되는 오랑캐나 주변국에 대해 폄하하는 표현과 함께 우리 민족에 대한 통칭적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다가 조선중기의 실학자들에 의해서 동이는 화하에 대응하는 동등개념으로 인식하는 상황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실학자들은 동이의 중심거점이 요동지역이었으며 단군으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이 이들 동이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입장은 민족주의사학, 재야사학으로 이어졌다.


삼성조시대


동방의 뿌리시대 국가로 환국-배달-조선으로 이어지는 삼성조시대가 존재하였다. 환국은 전 인류의 뿌리국가이면서 우리 한민족의 뿌리나라이다. 왜냐하면 환국 - 배달국 - 조선으로 이어지는 민족을 보통 동이족의 중심 세력이라 하며, 이들 삼성조는 동이족의 종통을 이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동방의 뿌리국가는 모두 광명사상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환국의 ‘환’은 하늘의 광명을 말한다. 환국의 종통을 이어 받아 새로운 문명을 개척한 국가는 광명의 나라 배달이다. 배달은 광명을 의미하는 ‘밝’과 땅을 의미하는 ‘달’의 합성어로서 태양이 가장 먼저 비추는 밝은 광명의 동방 땅을 의미한다.


배달국은 환웅 18세에 전체 역년은 1565년에 이르렀다. 배달국이 넓은 중원 땅으로 그 강역을 확장하자 결국은 서방의 한족과 동이족은 영토분쟁 및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 헌원과 치우천황은 10년 동안이나 전쟁을 하였고, 결국 치우천황은 탁록 대전에서 황제를 굴복시켜 중원의 패권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단군왕검은 18세 환웅 말엽 나라가 어지럽게 되자 그 혼란을 바로잡고 배달국을 계승하여 고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년 전의 일이다.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이다.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동이족으로 당시 동북아 문명의 주역이다. 단군조선 또한 배달의 광명사상을 이어받아 광명에 비친 동방의 땅을 상징한다. 환국(7대 환인 3301년), 배달국(18대 환웅 1565), 단군조선(47대 단군 2096년), 이것이 동방한민족의 뿌리국가인 삼성조시대이다.


동이문화의 중심무대


동이문화권은 중국 대륙에 폭넓게 분포하는데, 대표적인 지역으로 요령일대와 산동일대의 2대 중심지로 나눌 수 있다. 고대에 있어서 동이족의 활동무대는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좁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동북아 대륙의 문명중심지를 포괄한다. 동이족의 발상지는 지금의 바이칼호 일대로, 그 후 점차 남하하여 요령성 서부에 와서 한 갈래는 동북으로, 다른 한 갈래는 발해를 따라 산동반도로 진출하였다.


요령일대를 중심무대로 삼은 동이족


바이칼호에서 남하한 동이족이 요령성 서부에 정착해 배달국 시대의 홍산문화를 이루어 냈다. 동이족의 종족 중에서 후에 우리 민족을 형성하는데 주류가 된 것은 예맥족와 한족(韓族)이었다. 예맥족은 넓은 의미에서 동이족이며, 맨 먼저 요령 일대에 터전을 마련하여 한층 진보한 문화를 마련했던 민족이다.


예맥족에서 예족은 농경생활을 영위해왔던 선주민들이고, 맥족은 유목적 기질을 지닌 이주민이다. 예맥족은 발달된 농경문화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먼저 홍도 계통의 문화와 그 종족들을 흡수하여 보다 넓은 문화기반을 만들면서 우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예맥족(濊貊族)은 배달국과 후에 고조선을 이룬 중심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산동일대를 중심무대로 삼은 동이족


동이족은 초기에는 구려(九黎)라 하였고, 4700여년 전 배달국 14대왕 치우천황의 전성시대부터는 치우족, 삼묘족(묘만족)이라 불렀다. 오늘날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상고시대 동북아시아에는 화하족(華夏族 또는 漢族), 동이족(東夷族), 묘만족(苗蠻族) 등 3개의 부족집단이 있었다고 본다.


동이족은 산동(山東)성 남부를 기점으로 산동성 북부와 하북(河北)성, 만주지역, 한반도, 일본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하남(河南)성 동부, 남쪽으로는 안휘(安徽)성 중부에 이르며,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했다. 역사의 기록으로 볼 때, 동이족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복희·신농·치우 등이 있다.


먼저 복희는 주역의 창시자이자 인류문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으로 8괘를 그려 역학을 창시했고 인류가 우주의 실체와 변화원리를 알 수 있게 한 분이다. 이 역학이 서양에도 전해졌고 피타고라스에게도 영향을 주어 수학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는 서양학자의 연구결과도 있다. (『낙서의 유산』)


복희는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무늬에서 하늘과 땅의 생명의 율동상을 깨닫고 이를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것이 바로 하도(河圖)이다. 의약과 농경의 창시자인 신농(神農)은 천수(天水)지방에서 출생하여 강수(姜水, 섬서성 기산현) 땅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곳의 지명을 따서 성을 강(姜)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신은 호남성 차능현에 묻혔다고 한다.


묘만족은 호북(湖北)성과 호남(湖南)성을 중심으로 거주했고, 삼묘·구려·형만·요족 등 30여 개의 지파가 있으며 치우는 그들의 지도자이다. 여기서 치우는 동이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묘만족의 지도자이기도 하니, 구려가 동이의 대표 부족이었다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묘만족 연맹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치우가 중원을 개척하여 넓힌 뒤에 그 땅을 청구국이라 불렀는데, 그 중심은 지금의 산동성 지역이었다. 동이족들은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중국 동해안 일대, 남만주. 발해만 일대, 한반도 북부에 걸쳐서 거주하면서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을 형성하고 있었다. 적어도 발해만을 끼고 도는 중국 동북지방, 즉 지금의 산동성, 요령성 지방은 동이문화권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동이족은 대륙의 주요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복희로부터 신농, 치우에 이르기까지 동이족에서 천하를 호령하였던 위대한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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