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무천황의 생모 화신립은 서기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일본 왕실로 건너온 조신 화을계(和乙繼·야마토노 오토쓰구)라는 백제 왕족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신라계의 귀족 여인 하지노 마마이(土師眞妹)다. 화을계는 왜 왕실에 와서 야마토노 아소미(和朝臣)라는 고관으로 우대받던 조정의 신하로서 본래 백제 무령왕 후손이었다. 야마토(和) 성씨는 백제 무령왕의 왕성(王姓)이기에 일본을 상징하는 야마토(和)는 그 옛날의 백제 왕실과의 연고가 드러난다.
교토산대 이노우에 미쓰오(井上滿郞) 교수는 화씨부인은 제 아비가 왜 왕실의 조신이었기 때문에 시라카베(白壁·709∼781) 왕자와 결혼했다. 이 시라카베 왕자가 뒷날의 고닌(光仁·770∼781년 재위)천황이다. 고닌천황이 등극한 것은 그의 나이 환갑이 지난 61세 때의 일. 천황 계승을 둘러싸고 일왕가가 왕권 쟁탈로 극히 험악하고 어수선했던 시대에 그는 늙은 왕자의 몸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윗대에서 일왕들이 폐제(廢帝)되거나 또는 거듭 왕으로 복귀하는 중조(重祚) 등, 그야말로 왕실의 살벌한 정치상황에서였다. 더구나 왕위 계승자가 결정되지 않았던 시대의 여러 왕자들 중의 하나였던 노인 시라카베 왕자. 그 당시 입 한번 벙긋 잘못 놀려 폐왕자 되는 자도 있었다. 그러기에 늙은 시라카베 왕자는 애꿎은 화를 피하느라 때로는 고의로 무능한 술주정뱅이 처신을 하며 남모르게 행방을 숨겼고, 고심참담하게 이리저리 몸을 사려 용케도 재앙을 면하여 끝내 옥좌에 올랐다.
시라카베(제49대 고닌천황)가 왕자 시절에 화신립 왕후와 결혼한 후, 둘 사이에 첫 왕자 야마베(山部·제50대 간무 일왕) 왕자가 태어난 것은 서기 737년. 그러기에 아버지 고닌천황이 등극했을 때 야마베 왕자는 이미 그 나이 34세의 청년이었다. 이 당시 어머니 화신립 왕후는 50세 전후였다고 본다. 화신립 왕후는 뒷날, 아들 간무천황이 등극한 후 8년째였던 서기 7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라카베 왕자는 770년 10월에 천황 자리에 등극하자 서넛을 헤아리던 왕자비들 중에서 가장 나이든 화신립 왕후가 아닌 가장 나이 젊은 이노우에(井上·생년미상∼775) 공주를 첫 번째 왕후 자리에 앉혔다. 이 당시 이노우에 공주는 고닌천황과의 사이에 11살짜리 왕자인 오사베친왕(他戶親王·759∼775)이 있었다. 최초의 왕후가 된 젊은 이노우에 공주는 제45대 쇼무(聖武·724∼749 재위) 천황의 공주였다.
왜 왕실에서의 근친결혼은 다반사였다. 천황이나 왕자도 여러 비빈을 거느렸던 것은 한국 왕실과 진배없다. 고닌천황이 등극한 이듬해인 서기 771년 1월에 이노우에 공주의 몸에서 태어난 오사베왕자(당시 12살)가 여러 왕자 형들을 물리치고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후 이노우에 공주는 황실 여인천하의 독부였다. 젊은 왕후는 고닌천황의 손위 친누이 나니와(難波) 공주를 저주하며 남몰래 그녀를 암살하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저질렀다.
야마베 왕자(간무천황)의 친고모인 나니와 공주는 34세의 친조카 야마베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오래도록 고닌천황과 조신들에게 강력하게 밀어댔던 것. 이에 반감을 품었던 이노우에 왕후는 자신의 친쇼무일왕계 세력과 손잡고 늙은 남편 고닌천황을 닦달하며 제 어린 아들을 끝내 왕세자로 책봉시켰다. 그러나 고닌천황의 옹립자였던 조신 후지와라노 모모카와(藤原百川·732∼779) 참의(參議) 세력은 이노우에 왕후가 나니와 공주를 저주하여 살해한 흑막을 끈질기게 파헤쳐 끝내 그녀의 죄상을 밝혀냈다.
실은 이노우에 왕후는 남편 고닌천황마저 저주하다가 서기 772년 3월에 폐위되었고, 다시 5월에는 왕세자 오사베 왕자도 어미의 대역사건에 연좌되어 폐서인되었다. 이들 죄인 모자는 773년에 멀리 우치군(宇智郡)으로 유배되었다가 775년 같은 날 동시에(독살설) 죽었다. 772년 5월 왕세자를 폐서인한 조정에서는 곧 35세의 야마베 왕자를 왕세자로 책봉함으로써 이노우에 왕후에게 곤혹스럽게 시달려 왔던 화신립 왕후에게 마침내 새 빛이 비쳤다. 간무천황의 생부 고닌천황(袋草子·1156∼58)도 백제인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