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북쪽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스타기라에서 의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에는 부유한 생활을 하였으나 10세 전후에 부모를 잃고 친척의 보살핌에 자랐다. 18세 때에 그는 아테네로 와서 플라톤의 문하에 들어가 플라톤이 죽을 때 까지 20여 년간 그의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을 존경하였으나 진리를 더 사랑해야한다는 생각에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비판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체계를 확립하였다.
플라톤이 죽은 후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왕의 초청을 받아 알렉산더의 개인교사가 되었고 아테네를 떠났다. 알렉산더는 거칠고 사나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광채에 기가 죽어 그에게는 난폭하게 대하지 못했고 알렉산더는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존경했다고 한다. 후에 대왕이 되어 인도 원정길에 오를 때에는 그에게 배운 책과 노트를 가지고 다녔으며 그가 정복한 곳 어디에서나 진기한 동식물을 채집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내 그가 동식물학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고 또한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도시에 도서관을 세우고 학문을 숭상하며 그리스 문화를 널리 보급시켰는데 이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후 필립포스 왕이 죽고 알렉산더가 대왕이 되어 세계정복의 길에 오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49세의 나이에 아테네 근교에 리케이온이라는 학원을 세웠다. 이 학원은 아테네의 4학원중 두 번째로 세워진 학원이며 이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학파가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학원에서 오전에는 논리학, 형이상학, 정치학, 시학 등을 강의하고 오후에는 제자들과 더불어 가로수가 울창한 거리를 거닐며 토론을 즐겼는데 그의 학파가 소요학파(아리스토텔레스가 학원안의 나무사이를 산책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는데서 붙은 이름)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의 가정교사로 있을 때 마케도니아는 아테네를 점령했고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의 통치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33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아테네에서는 반 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고 아테네 시민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 왕가의 깊이 연관되어있고 알렉산더의 개인교사라는 점들 들어 법정에 고소하였다. 그는 아테네를 떠났고 그의 어머니 고향인 카루키스로 갔다가 그 다음해인 기원전 322년에 62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모든 학문에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저서 속에는 천상천하의 모든 문제가 나열되어 있을 정도로 그의 학문분야는 다양했다 정치학, 형이상학, 윤리학, 논리학, 심리학, 시학, 천문학, 의학, 동물학, 식물학 등 그의 학문적 관심이 미치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을 정도이며 그의 저서들은 400여 종이 넘는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형이상학, 논리학, 정치학, 니코마스윤리학, 자연학 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냉철한 이성과 논리적인 판단력의 소유는 경험주의 철학의 효시가 되었다 고 할 수 있다.
인생의 궁극 목적:행복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주의 윤리학을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계를 합목적적인 존재로 파악하였는데 그는 자연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을 합목적적인 것으로 보았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반드시 어떤 목적을 내포하고 있으며 모든 운동과 변화도 목적 지향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안의 모든 존재가 어떤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유용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운동과 변화가 목적지향이라 함은 그것이 단순히 기계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목적이 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 속에 내포되어있는 목적성은 인간의 인식이나 가치판단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는 무관하게 모든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자체가 합목적성을 지니며 자연의 모든 활동은 합목적적인 활동이다. 이와 같이 자연의 모든 활동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듯이 인간의 모든 행위도 목적 지향적이다.
인간의 행위는 그것이 무의식적인 행위가 아닌 한 반드시 어떤 목적을 가진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행위들의 목적들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목적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침에 운동을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 이유는 건강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한다. 왜 건강을 유지하려 하냐고 묻는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한다. 이 경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산에 오른다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왜나 하면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은 산에 오르는 목적이 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에 대해서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묻기를 왜 열심히 공부하는가? 왜 성공하기를 원하는가? 이와 같이 계속 물음을 던져나가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행위의 목적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최고의 궁극적인 목적에 이르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행복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개별적인 행위는 보다 높은 목적을 위하며 이루어지는 수단적인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거슬러 올라갈 때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는 최후의 단계가 곧 행복이요 이것이 곧 인생의 궁극목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 목표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행복이 무엇인가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한다. 흔히 쾌락, 부, 명예, 건강, 성공 등을 행복이라 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행복에 이르는 수단이나 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어떤 단계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활동으로 보았다. 행복이란 무엇을 획득하거나 성취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는 인간의 삶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다는 것은 인간이 잘 사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이 잘 산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자신의 본성을 만족시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는 활동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능이 있다. 첫째는 무의식적인 신체기능으로서 영양을 섭취하고 생식하는 기능을 말하며, 둘째는 지각의 기능으로서 감각하고 욕구하며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기능을 말하며, 셋째는 이성적 기능으로서 사유하고 반성하는 정신적 기능을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간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기능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키는 원만한 활동이란 곧 이성적 기능을 잘 발휘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즉 이성에 합치되는 활동이야말로 인성에 맞는 활동이며 이것이 곧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적인 삶이란 곧 중용의 삶이라고 보았다. 중용이란 우리의 이성이 감정이나 충동에 의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망을 통제하고 조화를 찾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양극단으로 치우치기 쉬운 감정이나 욕망을 제어하여 중용을 얻게 하는 힘이 곧 이성이다. 따라서 행복이란 곧 중용의 덕을 통해 얻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용의 덕은 이성의 기능에 의하여 단숨에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덕적인 덕은 본성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교육에 의해 형성된 것도 아니다. 덕은 인간의 행위와 실천을 통한 올바른 습관에 의하여 얻어진다.
만일 우리가 겸손의 덕을 갖기를 원한다면 겸손한 행위를 반복해서 실천에 옮겨야 한다. 그러한 겸손의 행위가 습관이 될 때 까지 지속된다면 자연히 우리는 겸손의 덕을 소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태어날 때부터 겸손의 덕을 갖춘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며 교육을 통해 겸손한 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겸손한 행위가 몸에 스며들 때까지 반복해 나간다면 그 때야 비로소 우리는 겸손의 덕을 소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덕적 덕이란 오랜 기간에 걸친 도덕적 훈련의 소산이다. 인간은 단시일 내에 덕스러운 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순간에 행복해 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덕스러운 인격을 소유하며 참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쩌면 일생이라는 긴 시간이 요구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