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신영복 지음/돌베개 펴냄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성선설을 입증하는 근거가 매우 허약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어떤 본성을 전제하고 그 본성으로부터 다른 많은 성정(性情)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도식(圖式)이 너무 단순하고 기계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그 본성에서 규정하고 있다. 원문을 보면 인간 본성보다는 본성의 확충에 무게가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孟子曰: 人皆有不忍人之心. 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之掌上. 所以謂人皆有不忍人之心者, 今人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由是觀之,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 自賊者也; 謂其君不能者, 賊其君者也.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公孫丑 上6)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人皆有不忍人之心). 선왕들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차마 남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손바닥 위의 물건을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사람이 모두 남에게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령 지금 어떤 사람이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 어린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고 하기 때문도 아니며,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반대로, 어린아이를 구해주지 않았다는 비난을 싫어해서도 아니다.
이로써 미루어 볼진대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수치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의 단서(惻隱之心, 仁之端也; 측은지심 인지단야)이고, 수치심은 의의 단서(羞惡之心, 義之端也; 수오지심 의지단야)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단서(辭讓之心, 禮之端也; 사양지심 예지단야)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단서(是非之心, 智之端也: 시비지심 지지단야)이다.
사람에게 이 4가지 단서(실마리)가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4가지 단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선(善)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이 4가지 단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키우고 확충시켜 나갈 줄 안다면 마치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나 막 솟아나기 시작한 샘물처럼 될 것이다. 그 단서를 확충시켜 나갈 수 있다면 그는 천하(四海)라도 능히 지킬 수 있고 그것을 확충시켜 나가지 않는다면 자기 부모조차도 제대로 모실 수 없게 될 것이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장(章)은 맹자의 성선설이 표명된 구절이다. 성선설의 요지는 모든 사람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을 입증하는 예로서 우물에 빠지는 어린 아이의 예를 들고 있다. 단 하나의 예를 들어 성선설을 주장한다는 것이 다소 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검토해보면 모든 사람이 불인인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적인 선언을 먼저 하고 선왕의 어진 정치가 바로 이러한 성선(性善)에서 비롯되었다는 예를 들고 있다. 그러나 선왕의 선한 정치가 불인인지심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것은 성선설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선왕 중에는 포악한 정치를 한 왕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출척측은지심(惕惻隱之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 다음 그 까닭과 내용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러한 측은지심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 아닌 본성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어린 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을사람들의 칭찬과 비난 때문이 아니다, 등의 사회적으로 습득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본성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측은지심으로부터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단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이다. 우물의 어린 아이 이야기로써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측은지심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仁)을 뺀 나머지, 즉 의(義) 예(禮) 지(智) 3단과 어린 아이와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 이렇게 논리적인 비약과 무리를 남겨둔 채 서둘러서 인의예지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매우 선언적 주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맹자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인의예지의 4단과 이 4단의 확충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은 다분히 윤리적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의 천명론(天命論)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천명을 본성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이다. 중용에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말이 있다. 맹자는 공자의 천명론과 예론(禮論)을 계승하되 천명을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화하여 극기에 의한 본성의 회복에서 예(禮)를 구하고 있다. 천명->본성->사회적 질서(禮)라는 체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공자의 천명은 맹자의 천성으로 이어지고 다시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이르러서는 천성이 곧 천리(天理)라는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으로 계승된다.
여하튼 맹자의 성선설은 예가 인간 본성에 순응하는 천리라는 것을 밝히려 하고 있다. 주관적 윤리인 인(仁)보다는 객관적 구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객관적 구조가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보다 효과적인 이론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다름 아니라 4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4지가 있는 것과 같다는 대목이다(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 이것은 도덕적 차원에 있어서의 선언이지만 ‘만민은 평등하다’는 주장으로 매우 중요한 맹자사상의 하나이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