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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학 강 좌

문학아카데미 6 / 시의 내재율

작성자Jaybe|작성시간05.09.07|조회수131 목록 댓글 0
 

시에는 내재율이 있어야 한다 / 박제천


좋은 시는 그에 걸맞는 가락을 지니고 있다. 그런 시를 소리내어 읽다보면 가슴의 응어리가 확 풀리거나 절로 신바람이 난다. 소리의 길이와 높낮이가 어울려 지어 내는 가락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주자(朱子)의 말을 빌면 소리란 기(氣)의 성질을 지니고 있고, 사람은 기(氣)와 이(理)의 성질로 이루어져 있다 한다. 사람의 기(氣)와 소리의 기(氣)가 어울릴 때 이(理)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쾌감을 자아내는 악음이 되고 물리칠 경우에는 불쾌감을 빚어내는 소음이 된다고 한다.


노래란 바로 이(理)의 받아들임인데, 노래에서 비롯된 시는 이(理)의 바탕을 이루는 정신을 추구한 결과인 만큼, 지금에 와서도 가락이 시의 한 기능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많은 시인들은 그러한 가락을 자아낼 수 있는 시문의 음성적 형식에 주목해 왔다.


사람의 청각기능은 140폰에 지나지 않는다. 140폰은 제트기의 소음에 견딜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100명의 합창대가 빚어내는 소리가 100폰의 상태라 한다면, 사람의 청각기능은 지극히 제한된 상태에 불과하다. 더구나 문자의 발음폭은 60폰에서 30폰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나뭇잎이 흔들리거나 떨어지는 소리가 20폰에서 10폰 사이라 하면 시의 가락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시인들은 처음에 일정한 소리의 강도가 되풀이되는 데서 가락이 발생하는 것을 깨우쳤다. 따라서 문장의 요소요소에 같은 음을 배치함으로써 가락의 효과를 상승시키고자 했으며, 이러한 배치를 운이라고 일컬었다. 두운이니 각운이니 하는 용어는 이러한 음이 되풀이되는 자리매김을 가리킴이고, 압운이란 자리매김의 되풀이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시인들은 나아가, 이러한 운이 일정한 틀 속에서 더욱 효율적인 긴장관계를 조성한다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시문의 길이를 일정하게 유지하자는 것이니 한시의 5언시, 7언시, 서양시의 소네트와 같은 틀이 이로써 발생되었다.


시인들의 운율에 관한 이러한 착안과 연구는 우리가 근대시라고 부르는 자유시의 태동이 있기까지 기본 시형식으로 존재해 왔다. 이때까지의 시문은 곧 운문으로서 산문과 대비된다. 허나 자유시가 발생하면서 운문시는 급속히 세력을 잃고 말았다.


자유시는 정형의 틀에서 시를 해방시킴으로써 자유로운 정신의 추구에 집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종래의 운문시가 내세울 수 있는 가락까지도 내재율이란 형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시가 노래에 견주어 소리로서의 주술성이 떨어진다면, 그 주술성을 강조하는 장치로서 소리에 그림이며 빛이며 향기와 같은 다양한 첨가재료를 개발할 필요가 있는데, 자유시의 형식에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그러한 개발을 추구할 수 있는 장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지훈의 말마따나 ‘눈으로 읽으면 귀에 리듬이 울려오고, 귀로 들어도 눈에 모습과 빛이 떠오르는 시’를 자유시의 시인들은 시의 이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자유시로 넘어오면서 시의 발전은 낙관시되었다. 까다로운 운법이나, 음수율, 음보율 따위의 방해물을 제거했을 뿐 아니라 상상력이라는 발전의 원동력을 가속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상의 변혁은 한국어 시의 발전에 최적의 토양을 제공한 셈이다.


한국어 시는 아다시피, 한국어의 특성으로 인해 구미 시나 한자 시의 운을 발생시키기에 기능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난점이 많았었다. 기능적으로는 구문형식이 달랐고, 시간적으로는 5백 년 정도의 표기기간에 불과했으며 사회적으로는 변두리어로 홀대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어 시는 한글 이전에는 이두문자의 표기나 한자 번역표기로나 맥을 이을 수밖에 없었고, 한글 창안 이후에는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여성이나 일부 관심 있는 소수의 시인들에 의해 다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저간의 실정이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시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정신의 발전은 한자어 시로서 꾸준한 성장을 했으니, 한국의 시는 남의 옷 속에서나마 품위를 지킬 수 있었던 셈이고, 그러한 전통이 지금에까지 이어져 왔기에 한국어 시의 찬란한 개화가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일부 학자에 따라서는 한국어 시가 서구 시의 모방연습이므로 그 발전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러한 주장이야말로 시가 형식상의 것이라는 단견에 불과하다.


형식의 굴레를 벗어 던지게 된 이래 한국어 시가 내재율의 가락을 급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동인은 바로 한시에서나마 내용의 훈련을 지속화하였던데 기인하니, 만해나 청마나 육사와 같은 초창기의 시인들이 별다른 습작기조차 없이 우수한 시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던 예가 바로 그러하다.


한국어 시는 내재율이라는 면에서 또한 구미 시나 한자어 시보다 풍요한 자원을 갖고 있다. 종래의 제약이 도리어 부가가치로 전환될 수 있었다. 운이 사라진 이상 기능적인 구문의 제약은 오히려 허사와 첨가어의 풍부한 활용성으로 기능이 배가되었고, 시간적인 제약은 언어의 자유로운 발전을 약속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바뀌었으며, 사회적인 제약은 그동안 여성이라는 사용계층의 편향적 기반으로 인해 생활어와 감각어의 세밀한 발전을 통해 파생어의 군락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가 언어와 사상의 소산이라면 그 두 가지 점에서 한국어 시는 다같이 그 전도를 보장받았다고 할 수 있다.


내 너를 찾아왔다. 순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鐘路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 순아, 이것이 몇 萬時間만이냐, 그날 꽃喪輿 산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 볼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비만 자꾸 오고…… 燭불 밖에 부엉이 우는 돌門을 열고 가면 江물은 또 몇천린지 한 번 가선 소식 없던 그 어려운 住所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鐘路 네거리에 뿌연이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서도 열아홉살쯤 스무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 속에 들어앉아 순아! 순아! 순아! 너 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서정주 「復活」


이 시에서 누가 3·4조며 7·5조의 음수율이며 2음보 3음보의 음보율을 찾을 수 있으랴. 형태상으로는 산문시에 분명하지만 소리내어 읽게 되면, 감정의 변화와 장면의 변화가 일치되어 절로 소리에 가락이 붙고, 눈에는 종로거리에 서 있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주어나 허사가 생략돼도 좋은 구문, 인칭대명사의 복합개념화, 허사의 변형과 여성어의 다채로운 활용이 「부활」의 내재율로 창조됨으로써 시의 가락은 한국어 시의 무대에 새로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로운 내재율의 흐름은 서정주에서 비롯되어 이른바 60년대 시인이라고 통칭되는 박제천·정진규 등의 산문시를 거쳐 90년대의 신인들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운다.


도장 찍힌 문서들을 쫙쫙 찢어발기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바람은 우루루루루루루루루루 지동치듯 불고, 막도장을 아무 데나 찍어대던 우박이며 벌겋게 짓이겨진 도장밥에 애기똥풀이며 며느리밥풀꽃이며 개부랄꽃 여기요! 저기요! 마구잡이로 피어나더라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초칠로 번들거리는 교실마루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으로 그림물감을 꾹꾹 찍어 도화지에 하늘 한 점 나무 한 점 보이지 않는 별도 너도 한 점 지장을 찍어주다가 빡빡 찢어발긴 어린 계집애, 눈발이 내리시는가, 몸에서 땀이 주루루루루루루루루루 가슴이 벌렁벌렁 어데서 부르는 소리가 얼른얼른 들리는데, 너무 좋구나, 오메, 이 잡년, 등떼기가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큰댓자로 벌렁 누워 내꺼라고 혹은 네꺼라고 도장 찍은 문서들을 마음놓고 찢어발기는구나 이 풍진 세상! 아름드리 고목나무도 뚝.펄썩. 뚝.펄썩. 뚝.펄썩. 잔가지를 쳐내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코를 고는데 춘향아, 月白 雪白 天地白 눈발이 펄,펄, 모두가 백발의 벗이로구나.

―김정아 「月白 雪白 天地白 눈발이 펄,펄」


이 작품의 구어체와 문어체의 화려한 결합은 시의 의미를 확장시킬 뿐 아니라 그 사이를 넓게 함으로써 시의 비의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찌 보면 요설이랄 수 있는 활달한 풀어냄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는 힘은 판소리 가락을 대입시킨 새로운 가락의 창출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아는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상상력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보여주던 첫 시집 「그리움은 약도 없다」 출간 이래, 새로이 고전적 사유를 현대화시킴으로써 시세계의 공간을 새로운 밀도로 증폭시키고 있다.


들고 있던 나무공이를 떨어뜨리면서 어머니는 절구 안에 아이 하나를 낳아 놓았다 어둠이 재빨리 강보를 펴 울고 있는 아이의 알몸을 감싸안았다 절구 안의 수수들이 엎질러졌다 공중으로 무수한 불꽃들이 피어올랐다 그때 너를 감싸안은 것은 밤이었다 어머니는 쭈그리고 앉아 엎질러진 수수들을 주워 담았다 나를 낳은 것은 어둠이었어요 강보에 싸여 아이는 혼자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다시 붉은 수수를 찧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광목 저고리 앞섶으로 흥건히 뽀얀 젖이 흘렀다 너를 낳을 때 그때 내가 본 것은 힘찬 공허였지 밤새 찧어놓은 붉은 수수는 한 겹 불의 껍질을 벗고 있었다 밤과 어둠이 새벽빛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물살 속으로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땀에 젖은 손으로 잘 찧어진 불씨 몇 개를 아이의 입에 물렸다 아이는 한번에 그 불을 삼켰다 지금도 나를 안고있는 것은 어둠이에요 그러나 어머니 밤과 어둠은 저렇게 한 곳으로 가고 있군요.

―류수안 「붉은 수수」


류수안(구명:류숙)의 시에는 놀라움과 아름다움이 가득차 있다. 이 작품의 시어들이 갖고 있는 긴장과 정서는 우리 시에 가해지는 새로운 충격일 수 있다. 화법과 상상력의 낯설음이 삶과 뜨겁게 맞물릴 때 우리 시는 또 하나의 무서운 시세계에 접하리라는 전망을 갖게 한다. 특히나 내재율의 발전은 이러한 관념적인 작품에까지 어우러져 시의 신경과 혈맥을 뻗쳐나가고 있다.

비교적 정형시에 노력한다고 알려져 온 영랑과 목월의 시에서도 이러한 파격의 예증은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박목월 「離別歌」


영랑이나 목월의 경우, 음운의 기본형식인 두운이나 각운, 반복형식의 자취를 찾아볼 수는 있지만, 그러한 운율을 밟아나가다가 깨뜨려버릴 때 오히려 시의 가락에 신명이 붙는 새로운 현상을 찾아 볼 수 있다. 더구나 한국어의 특질이랄 수 있는 발달된 경어체와 대화체, 생략체의 구사로 말미암아 시가 언어 예술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더욱 실감케 한다.


이들 광복 전의 시인들과 한 세대의 거리를 둔 시인들의 시를 견주어 보면, 시의 가락이 더욱 다양해진 것을 보아 낼 수가 있다.


배추를 뽑아 보면서 이렇게 많은 배추들이 제각기

제 뿌리를 데리고 나옴을 볼 때

뿌리들이 모두 떠난 흙의 숙연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배추는 뽑히더라도 뿌리는 악착스러울이만큼 흙의 血을 물고 나온다.

부러지거나 끊어진 배추 뿌리에 묻어 있는 피

이놈들은 어둠 속에서도 흙의 肉을 물어뜯고 있었나 보다

이놈들은 흙속에서 버티다가 버티다가

독하게 제 下半身을 잘라 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정권 「根性」


70년대 시인의 한 사람인 조정권은 산문을 적절하게 행으로 갈라 놓은 형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읽다 보면 무엇인가 강한 쇳소리의 가락이 들리는 것 같다. 시인의 분행이 의도적이고, 스스로의 내재율에 맞추어 혹은 사유형 혹은 설의형을 바꿔 쓸 뿐 아니라, 호흡을 추스리기 위해 중복형을 첨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에 따라 문장형식을 마음대로 바꾸고, 용어 또한 비속어와 상형어를 섞어 쓰고 있다.


포천 현리에서 북한강 상류 깊숙이 들어간 길을 되짚어 나온 밤, 감자탕집 뜨뜻한 구들에 앉아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두터운 껍질들을 자꾸 허물어 버렸다 카키색 바바리, 모직 스웨터, 하얀 브래지어, 47KG에 담긴 살이며 뼈며 그런 것들을 뜨거운 불길 속에 하나씩 던져 넣었다 죽은 영혼을 위해 축제를 벌이는 아프리카 토인처럼 60년대 유행가를 목청껏 불러제끼며, 타고 있는 나의 껍질들이 풀풀 재를 날리며 상을 뒤덮는 것을 바라보았다. 잿더미였을까,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 밑으로 스며들고 살을 태우고 남은 뼛가루는 잔잔한 강물에 흘려 보내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날, 두 병째 소주를 비우고 기어들어간 어둠 속에서 만난 것은……

―송정란 「불의 시집 4」


시의 내재율이란 바로 시인의 내재율인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쓰고자 하는 내용을 최대한으로 전달할 수 있는 언어형식으로서 시의 음악적·회화적·사유적 제기능을 망라해야만 한다. 시인의 내재율은 바로 개개 시인의 개성이 창조한 가락이다.


90년대 시인인 송정란은 조정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숨죽이고 있는 정신을 꺼내어 피와 살을 주고 입성을 입히는 일까지 시의 몫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장자가 말하듯 이름과 실질의 뒤바뀜을 시인의 힘으로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실례를 명쾌하고도 힘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역동적인 상상력과 절제된 시정신의 맞물림이 너무도 팽팽하여 오히려 부담을 줄 정도이지만 그 부담을 해소하는 힘이 다름아닌 물이 흘러가듯 거침없이 이어져가는 내재율의 흐름이다. 가히 모범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리 와 봐 이리 와 봐

미류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흰 배때아리를 뒤채는 속잎새들이나 널어넣고

낯간지러운 서정시로 흥타령이나 읊으며

우리들처럼 어깨춤이나 추며 깨끼춤이나 추며

이 강산 좋은 한 철을 너는 무심히 지나갈 거냐고

미류나무 끝 바람들이 그런다.

―宋秀權 「미류나무 끝」


내려다보면 열 坪 남짓의 마당, 그 언저리엔 삭발당한 고만고만한 알머리를 떨구고 잔디들은 우두커니 잠들어 있다.


귀앓이꽃 두엇이 그들 틈에 깨어 있을 뿐, 모든 것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뇌파검사실 쪽으로 멍하니 흐려서 뜬 하늘, 그친 눈 몇 개가 신음처럼 가늘게 죽지 않고 있다.

―盧香林 「겨울 病棟」


강한 바람에 꺾이지 않는 풀잎보다는

차라리 참나무가 되겠어

살겠다고 비굴한 허리를 굽히느니

도끼에 찍혀 차라리 참숯이 되겠어

내 몸에 남은 생명을 활활 태우며

정신만 남아 맑은 공기가 되겠어

―김용범 「木强則折」


70년대 시인들인 이들의 시에서도 한국어의 특질을 바탕으로 한 개성의 창조는 가열하기 짝이 없다. 송수권의 구어체, 노향림의 시각화, 김용범의 사유형이 두드러질 뿐 아니라, 문법파괴조차 허용되는 한국어 시의 외연성을 볼 수 있다. 나아가 90년대 시인 몇 명의 작품을 수록한다. 필자와 함께 시의 내재율과 상상력을 공부한 시인들이다.


얼음덩이를 물에 던지니 쨍! 하며 물이 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섭씨 영하 30 후리져에 들어가 냉기로 굳어버린 머리 허리 팔다리가

순한 물에 안겨서는 몸을 뉘인다 기지개를 맘껏 켜보인다

이윽고 한 마음 한 몸으로 어울렸는지 저희끼리 깊게 껴안고 있다.

―고정애 「물과 얼음」


아이와 색종이를 오리면서

도화지에 붙이며 그림을 만들면서

그림 뒤로 사라져버리는 색종이의 뒷면을 생각했다

울긋불긋 빛나는 이 세상도

색종이의 뒷면 같은 무엇이 받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뒷면이 사라지면 그림은 남을 수 있을까

거대한 이 도시는

뒷면에서 뼈를 세운 노동이 맞뻗쳐 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이만큼의 생활도

보이지 않는 이들이 떠받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문에서 종이가 없어지면 글자들은 어떻게 떠오르나

―김용길 「만화경」


성 바울님!

언제나 순결하라 했었지요


호수에 갔었어요

나를 따라 온 푸른 달이

물에 빠진 줄도 몰랐었요

아침에 깨어 물수제비를 뜨며

푸른 달을 찾았어요

눈이 부셔 눈을 부벼야 했어요

그 자리에 하늘이 누워 있었어요


그 하늘 속에 나도 누워 있었어요

내가 호수에 흔들리고 있었어요

나는 흔들리면서

새로 태어나고 있었어요

그 뒤로 달마다

푸른색 월경을 해요

성 바울님!

당신의 반지에 입맞춤해요

―김진 「사파이어」


이들 새로운 시인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역동적인 말의 힘이 어울려내는 시세계의 다양성은 곧 우리들 앞에 펼쳐질 한국시의 가능성이다.


특히나 이들이 구사하는 말의 세련도와 가락은 그 깊이를 얻게 될 때 우리 시를 더욱 풍요롭게 하리라 믿는다.


시란 문자의 표기이지만, 근본은 언(言)의 옮김에 다름이 아니다. 한자의 언(言)에는 모두 18종의 뜻이 있다. 어(語), 화(話), 담(談), 위(謂), 변(辯), 고(古), 평(評), 고(誥), 회(誨), 논(論), 강(講), 설(說), 의(議), 훈(訓), 간(諫), 경(警), 비(譬), 사(詞) 등. 언(言)은 또한 옛 전문의 표기를 따르면 ‘입(口)에 따르고, 소리’라 한다. 18종의 형성문자이자 회의문자의 뜻을 새기면 시의 비의가 설명될 것이다. 그 소리의 울림과 높낮이를 가슴에 옮김으로써 사람과 자연의 감응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새삼 한국어 시의 가락을 생각해 보자니, 주어진 말로 새 가락을 만드는 것이 곧 시인의 몫임을 깨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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