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의 문화 활동이든 항상 새로운 영역과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探究)·모색(摸索)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곧 발전의 양상입니다. 시의 경우도 새로운 영역의 확장을 위한 탐구와 새로운 방법에 대한 모색이 어느 시대에나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그러한 새로운 탐색에 대해 늘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성시하고 있는 시의 '정통성(正統性)'이나 '정체성(正體性)'에 혼란을 야기하거나 혹은 오염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통성이나 정체성이란 것이 고정불변한 것일 수는 없으므로, 시를 지키려고 하는 보수적인 폐쇄성은 시의 발전을 저해하는 위험을 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나는 반보수주의적 입장에 섭니다.
그러나 시에 대한 새로운 탐색이 어떠한 방법으로 시도되든지 아무런 규제 없이 너그럽게 다 허용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우선 시라는 언어 예술 장르 자체를 파괴하려는 위험스런 모험은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나는 시가 독자들을 계발하는 도덕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계몽주의자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 시가 필요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효용론자입니다.
따라서 시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고 거북하게 한다면 그런 시는 만들어 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시의 탐색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범주 안에서 시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첫째, 언어 예술의 한계를 넘어서서는 곤란합니다.
언어가 지닌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언어 이외의 다른 매체를 시에 끌어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기호, 도형, 그림, 사진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마지못해 부분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라 할지라도 주매체는 언어여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시가 언어 이외의 다른 매체에 기울게 되면 장르 자체에 대한 부정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심미성(審美性)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시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든지 아름답게 표현한 것이어야 합니다. 심오한 철학적 내용이나 도덕적 주장이나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비평 등도 훌륭한 시적 소재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이 시가 되려면 논설이나 비평문과는 달리 심미적인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시의 계몽성은 심미성 다음에 따른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미성은 시를 예술이게 하는 핵심적인 요건 중의 하나입니다.
셋째, 효용성(效用性)을 지닌 작품이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작품은 독자들에게 감동적으로 가 닿아 정서적 순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할지라도 적어도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든지, 삶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한다든지 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약 읽고 난 뒤에 불쾌감이나 답답하고 골치 아픈 느낌을 준 작품이 있다면 이는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공해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시인은 무분별한 테러리스트거나 혐오감의 생산자여서는 곤란합니다. 도대체 그에게 세상을 괴롭혀도 된다는 권리를 누가 허락했단 말입니까.
넷째, 새로운 정신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시가 재미있는 장타령이나 단순한 언어놀이에 그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언어 조립공(組立工)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신선한 정신 세계에 바탕을 둔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는 시인을 구도자(求道者)의 대열에 놓습니다. 시는 구도자의 내면 세계에서 우러나온 고귀한 노래입니다. 오늘의 시단 풍토를 놓고 어떤 시인은 '시는 많아도 시인은 없고/ 시인은 많아도 시는 없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이는 곧 시인다운 인격체의 빈곤과 격조 높은 작품의 부재(不在)를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로운 시의 모색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시도된 그 글들이 시의 위의(威儀)를 잃지 않으려면 앞에 지적한 4가지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봅니다. 시는 보통의 글과는 다른, 격조를 지닌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