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가 너무 지나치게 난삽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건 비단 필자만의 생각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강희근도 <시 읽기의 행복>에서 애초에는 시집을 들고 앉으면 고향 가는 열차를 탄 마음이 되거나 어머니 손을 붙잡고 가는 길에 나서는 마음이 되는 그런 것이 시였기에 시는 설레고 들뜨고 그립고 간절한 그런 것이었으며 부담도 체면도 준비도 치장도 염려할 필요 없이 그냥 맨 얼굴로 함께 숨쉬며 있는 것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낯선 손님처럼 보이기 시작했다면서, 독자와 시를 시나브로 떼어 놓는 시의 오적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
그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시인들의 엄숙주의'이다. 엄숙주의는 "시인들의 말이 필요 이상으로 인상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편하게 풀어도 될 자리에 힘을 많이 주거나 현학으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 시는 쓸데없는 난해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현대시가 소통에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또 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2003 신춘문예 에 응모하여 낙선한 이관희는 현대시에 대한 불평을 시의 형식으로 풍자하고 있다.
요즘 시는 왜 두 번 이상 읽어야 되나?
요즘 시는 왜 세 번 읽고도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 수가 없나?
국어 공부 다시 하자
중학 나온 놈이
제 나라 말로 쓴 시를
한번 읽고 못 알아먹고
두 번 읽고도 못 알아먹고
세 번 읽고도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겠으니
국어 공부 다시 하자
시인들을 위하여!
아, 님아, 김소월 님아
다시 한번 이 땅에 살아 돌아와
한번만 읽어도
무슨 소린지 알아먹을 수 있는
시 좀 써 달라
중학생이 읽고서도
단번에 사랑 병이
듬뿍 듬뿍 들 수 있는
보통 시 좀 써 달라
-이관희, <시론 3. 난해 시에 대한 신경질>
그는 인용한 풍자시와 함께 "현대시가 자꾸 더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되어 가는 까닭은 '낙타를 꼭 바늘구멍으로 지나가게 해야지만' 시다운 시로 대접을 해 주니까 개나 소나 말이나 무작정 '낙타 바늘구멍'으로 쑤셔 박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는 시를 쓴 본인조차도 그게 무슨 뜻이 되는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나의 불평 입니다."라고 노골적으로 현대시의 오늘에 세태에 대해 일갈하고 있다.
2. 변환기의 해체주의
90년대 들어 새로운 시전문지들이 속속 창간되면서 기존의 시단은 재편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전통적인 권위를 구가하던 시전문지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전통적 권위가 해체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90년대 새로운 시전문지로 자리 잡은 서울의 월간 <<현대시>>을 위시하여 대구지역의 계간 <<시와 반시>>, 부산의 계간 <<시와 사상>>, 광주의 <<시와 사람>>, 제주의 <<다층>>처럼 지역에서 발행되는 계간 시전문지가 등이 새롭게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 외에도 다수의 영향력 있는 신생 시전문지가 속속 출현하였다.
90년대는 분명히 변환기였다. 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문학사상>>을 중심으로 정신주의와 해체주의 논쟁이 뜨거웠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문학에 있어서 정신주의란 전통(이성주의, 도덕주의)에 기초한 보편진리를 존중하는 입장이고 해체주의는 기존의 가치들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즉 탈의미·탈 가치의 미적 입장이다.
이 논쟁은 이승훈이 해체시의 이론제공자라는 인식에서 최동호가‘시가 시를 부정하는 자기소멸적 퇴영성’이라는 반론을 제기하면서 촉발된 것이다. 이 논쟁은 정보화 사회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 담론의 새로운 문학적 입장과 전통적 문학정신이라는 기존의 거대 담론과의 부딪침에서 일어난 현상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대세는 해체주의의 득세로 귀결되는 듯했다.
필자도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상성>(<<시문학>> 2002. 5)이라는 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 오늘의 정치, 문화, 사회, 경제, 종교 등 전방위에 걸쳐 광범위하게 포진되어 있는 20세기 후반부터 오늘에 이르는 다양한 풍경이듯이, 포스트모더한 시라는 것도 작금에 와서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이, 일상성을 드러낼 만큼 특정 시인에게 한정되지 않고 이미 폭넓게 유포"되었고, "90년대에는 현실 재현성의 절망감이나 중심부재, 나아가 후기산업사회의 문화적 풍경을 메타시나 문자이탈, 요설 따위의 다양한 방법으로 노래하는 시집들이 속속 출간되었다." 고 지적한 바 있다.
김경복도 <서정과 해체의 대립을 넘어-90년대 시론의 한 반성>(<<서정의 귀환>> 좋은날, 2000)에서 90년대 들어오면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탈정치적 탈이데올로기적 성향이 맞물리고 소비자본주의적 특성이 강화되면서 '일상성'이 주요한 관심사가 되어 문학적 테마로 부상하게 됨을 볼 수 있었는데, 일상성은 바로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욕망의 외피에 젖은 채 무반성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세계를 말해주는 것으로 이러한 사회문화 토대는 문학적 형상화나 현실의식을 이론으로 집약하는 방향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그것은 패러디, 패스티쉬의 기법으로 시의 인터텍스트화, 일상시화, 자연스런 충동의 세계를 보인 박상배, 주체비판과 이성비판의 이승훈, 그리고 동일성을 강조한 이론가에서 해체주의 시학으로 전이한 김준오 등에게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이승훈은 90년대 후반에 <<해체시론>>(새미, 1998)이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이 책의 머리에서 "한마디로 해체는 무슨 중심, 무슨 주의를 부정한다. 시가 건강해야 한다지만 이런 주장은 건강/질병이라는 2항 대립체계를 토대로 하고, 두 항목 가운데 건강만 강조하고, 그런 점에서 도덕의 사유는 사유의 도덕이 아니다. 내가 이런 말하는 해체는 이런 2항 대립체계, 이성중심주의의 모순을 밝히고, 이런 모순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린다. 정신은 순수하고 육체는, 물질은, 일상적 삶은 불순하다는 사유도 위선이고 폭력이다."고 전제하고 "고전적 경험과 현대적 경험과 후기 현대적 경험이 어지럽게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그 동안 내가 관심을 둔 부분은 후기 현대성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다소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인들을 옹호한 셈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같은 이승훈 유의 해체시론에 영향을 받은 신인들은 뚜렷한 명분도 없이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명분 없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시작형태는 결국 언어유희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근원,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시의 본질과 상관없는 비시적인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물론, 시의 본질을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고 그것도 다양한 견해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지만 지나친 실험성과 전위성의 추구는 현대시에 대한 불만만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선이가 <'시적인 것'의 발견 혹은 병합의 미학>(<<현대시>>2003, 7)에서 "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삶과 비가시적인 삶 사이를 오가며 삶의 근원을 탐사한다.
이것은 때로 동일성의 회복, 주관성 혹은 내면성의 포착이라는 이름으로 운명과 의지 사이를 오가며, 그 아슬아슬한 틈새로 언뜻언뜻 비치는 존재의 본질을 이미지로 기억해 낸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우화에서처럼 본질로서의 이데아(idea)를 기억해내는 것은 본질의 이미지인 그림자였듯이."라고 제시한 후 "오늘날 이미지는 시인 보들레르가 '무시무시한 새로움! 모두가 눈요기! (「파리의 꿈」)라고 절규했듯이, 존재의 근원을 떠나 하나의 눈요기로 전락했다. 이미지의 자기분열의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의 우리 시가 존재의 근원을 떠나 하나의 눈요기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는 써서 무엇 하나 횡설수설 시를 쓰고 잡지에 발표하고 발표해서 무엇 하나 잠이 오면 잠이 들지만 잠이 들어 무엇 하고 공부해서 무엇 하고 무엇이 무엇인가 이 시가 속일 뿐이다 글 없는 글, 말 없는 말, 시 없는 시가 있다면 한줌에 들고 그대 찾아 가리라 문을 닫아도 눈이 오고 문을 열어도 눈이 오네
-이승훈, <시>(<<현대시>> 2003년 6월호)
이승훈의 <시>는 일종의 시론시로서 자신의 해체시론의 시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시를 쓰는 행위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기존의 생각, 잠은 건강을 위해서 요긴한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기존의 생각을 해체한 것이다. 즉 의미 있는 일/의미 없는 일, 필요한 일/필요 없는 일 등의 2항 대립체계를 해체하는 것이다.
"시가 속일 뿐이다"나 "글 없는 글, 말없는 말, 시 없는 시가 있다면 그대 찾아 가리라" 등의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런 의도는 견고한 2항대립에서 어느 한 편을 중시하는 모순으로부터의 해방을 노리는 것이다.
그것은 "문을 닫아도 눈이 오고 문을 열어도 눈이 오네"에서처럼 '문'의 경계와 상관없이 눈이 내리는 것을 보여주면서 경계의 무의미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 위의 <시>는 견고한 시론시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이승훈은 <문학도 없고 시도 없다>(<<문학사상>> 1996. 11)에서도 "내가 <시>라는 시에서 '시가 없을 때 시가 태어난다. 아아 시가 없을 때 시가 있다면 시를 쓸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나는 이 시대의 문학이라는 이름의 유령과 싸운'다고 말한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시든 문학이든 무슨 본질, 순수한 기원이 있다고 믿는 건 자유지만 이런 자유가 우리 시의 발전을 억압한다. 그 자체가 문학인 텍스트도 없고 그 자체가 시인 텍스트도 없다. 문학도 없고 시도 없다. 비시가 시이며 시가 비시이다. 시는 부정을 먹고 산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승훈의 위의 인용시는 올 6월에 발표되었단 점에서 그의 근작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수년 전에 발표한 그의 시론시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훈이 수년간 같은 맥락에서 되풀이하는 시적 작업은 이제 더 이상 미적 충격을 주지는 못하고, 이제는 언어유희로 그치는 것 같기도 하다.
이혜원도 그의 앞의 글에서 "자기 방기의 언어와 사변적 요설로 채워진 90년대의 해체시는 정작 해체시의 요체를 이루는 치열한 부정의 정신을 결여하고 있다. 부정의 대상도 목적도 없이 무차별하게 행해지는 배설의 언어는 해체의 진정한 정신을 퇴색시킬 뿐이다."라면서 "요즘의 해체시에서는 부정의 정신은 찾을 길 없고 부정의 몸짓만이 요란한 경우가 많다. 무의미하게 남발하는 자기방기의 언어들이나 거리낌 없이 분사하는 현란한 말장난들은 언어의 파괴에 불과할 뿐 새로운 시적 전략으로 보기 어렵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작금의 우리 시의 해체적 징후는 더 이상 전위성도 지니지 못한다. 박상배나 이승훈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현실 재현성의 절망감이나 중심부재, 나아가 후기산업사회의 문화적 풍경에 대한 미적 대응으로 시를 썼다고 하지만, 근자에 젊은 시인들이 일정한 명분도 확보하지 못한 채 무분별하게 드러내는 해체적 징후는 시를 파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존의 시법에서 무조건 일탈해야만 좋은 시가 되는 줄로 생각하는 신인들이 그만큼 많은 것 같다.
3. 매너리즘 시와 폭발성 아방가르드 시의 지양
문덕수는 91년 8월 한국시문학회 주최 세미나에서 <한국시의 문제점>이라는 주제발표문에서 "오늘의 한국시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현저한 특색은 시작품의 양극 분화 현상인데, 그 하나는 '메시지 편중주의(개념 편중주의, 내용 편중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과격 실험주의'(형식 편중주의, 반언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적, 전위적 성격을 띠고 있는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혁명성과 과격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선전·선동과 형태 실험이라는 차원에서는 상반되지만 예술로서의 시의 가치면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전제하고서, 전통적 서정주의를 비롯한 안이한 매너리즘도 메시지 편중주의와 과격실험주의 양극 사이에 널리 잠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오늘의 한국 현대시가 병균처럼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원칙으로 "시는 모름지기 언어예술이라는 문학주의 또는 시성주의(詩性主義)"를 제시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모든 시도와 실험, 모든 주장과 실천에 우선하는 원칙이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10여년이 지난 후 <<시문학>>(2003. 8) 편집후기에서 "요즘 신진들의 작품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구태의연한, 기성의 재탕삼탕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의 매너리즘에 빠진 시, 다른 하나는 큰 요동을 치면서 시단의 지각 변동을 일으킬 폭발성 아방가르드 시- 일단 이렇게 나눌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오늘의 한국시단이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민중 리얼리즘이니 하는 슬로건의 그늘 밑에서 언제나 위축된 채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문덕수는 신진들이 새로운 한국시의 지평을 열어야 할 것을 강조한 셈이다.
필자가 진단하기에도 오늘 한국시의 심각한 문제점은 매너리즘에 빠진 시와 폭발성 아방가르드 시로 양극화되어 있는 점이다. 오늘의 한국시 특히, 신인들의 시 경우 90년대 해체시론에 영향을 받은 탓으로 지나치게 전위성을 추구하게 되면서 소통불능의 상태에 빠진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불만요인이 아닐 수 없다. 독자 입장에서는 읽을 만한 시가 없는 셈이 아닌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시는 읽혀지기는 하지만 상식적인 넋두리에 불과하고, 폭발성 아방가르드 시는 뭔가 있는 듯한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시금, 시성에 눈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혜원도 그의 앞의 글에서 현실의 모순을 꿰뚫고 존재의 본질에 이르는 시문학 특유의 역동성을 되살리기 위한 詩性의 회복이라는 과제가 막연하게나마 공감을 이룬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시성에 초점을 다시 맞추고자 하는 것은 매너리즘 시와 폭발성 아방가르드 시를 지양하여 앞서 제기한 현대시에 대한 불만 사례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이는 결코 전통회귀나 또 다른 매너리즘에 빠져드는 것은 아니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은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이 작품은 제18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정일근의 수상 작품은 따스하고 편안한 시적인 분위기를 견지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예리한 시각과, 진실을 추구하는 치열한 문제의식 그리고 진지하면서 탄탄한 주제의식이 견고히 내재되어 있다. 또한 활발하고 왕성한 창작혼이 돋보이는 시인으로, 작품 속에 서정시다운 진정한 울림과 리듬이 있어, 독자들을 사유의 여로(旅路)에 빠져들게 한다. 특히 생명존중 사상과 평등정신 그리고 사랑의 철학을 감동적이면서도 아름답게 시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소월시문학상 대상 선정 이유를 밝힌 글이다. 이 글의 요지는 詩性의 본질을 잘 요약하고 있다.
화자는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리운데, 그것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인 세상의 밥상에서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화자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리기도 했다. 이는 오늘의 비인간화된 삶을 반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은 것이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이었고, 그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다 귀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현실의 고단함을 느끼는 이즈음 다시금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 싶은 것이다.
이 시는 오늘의 삶을 반성하면서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환기하는 근원적인 삶 혹은 이상적인 삶의 세계를 꿈꾸면서 삶의 질서회복을 열망하고 있다. 가치나 질서를 무화하고 해체하는 것으로 그치는 해체시와는 달리 오히려 근원의 회복을 추구하면서 보다 이상적인 질서를 꿈꾸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정일근의 시는 서정적 울림과 그로 인한 감흥, 리듬감을 확보하면서 시의 본질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시가 전통서정시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라는 대목에서처럼 오늘 삶의 현장감도 비유구조로 놓치지 않고 있다.
정일근은 수상소감에서 "마당의 벚꽃도 목련도 화사하게 만개한 4월 한낮에 기다렸던 수상 소식을 받았습니다. 제가 '기다렸던'이란 표현을 쓴 것은 제가 서정시인이기 때문입니다. 서정시를 쓰는 시인에게 시인 소월의 이름이 든 이 상이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정일근은 오늘의 서정시인이지만 그는 20년대의 김소월의 이름을 영광스러워하고 있다. 이는 그의 시적 토대가 소월의 서정에 닿아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 현대시는 서정의 원형에 해당하는 소월에서부터 기원하고 있는 詩性의 뿌리를 더욱 견고히 해서 그것을 토대로 현대성의 줄기와 가지를 뻗쳐야 할 것이다.
이 명제가 매너리즘 시와 폭발성 아방가르드 시의 양극화를 지양하는 기본원칙으로 적용된다면 한국 현대시의 심각한 문제점, 곧 오늘의 시가 도무지 읽혀지지 않는다는 독자의 불만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소월시 문학상이 서정시인 정일근에게 주어진 것으로 볼 때 한국시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