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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학 강 좌

리얼리즘에서 미메시스로 / 이문열

작성자노을|작성시간08.11.01|조회수299 목록 댓글 0

 

언어와 종족은 달라도 같은 도구로 시간의 파괴력과 삶의 덧없음에 어렵게 맞서고 있는 동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언제나 내게 감동이다. 거기다가 이렇게 많은 세계의 동료들 앞에서 한국의 문학과 나 자신의 문학 세계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단순한 감동을 넘는, 영광이면서도 두려움이다.


한국 서사 양식의 역사는 동북아의 국가들 중에서도 비교적 긴 편에 속한다. 우리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그 시대의 서사 구조로서는 짜임새 있는 민담과 전설들을 축척해 왔고 그것들이 문자로 정착하는 시기도 다른 문화권에 비해 그리 늦지 않다.


논자(論者)에 따라 다소 달라지지만 한국인에 의해 기술된 가장 오래된 서사 구조로는 보통 <삼국유사>를 친다. 동양의 전통대로 역사와 연관된 서사 구조이고 한문으로 기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올림푸스와 영웅들이 있고 베울프와 롤랑이, 원탁의 기사들과 신비의 여왕들이 있다. 지은이는 고려의 승려 일연으로 책이 편찬된 시기는 대략 13세기 중엽이다. 그 뒤 15세기에 한글이 창제되고 16세기가 되면 벌써 한글 소설들이 선을 뵈는데 지금 전해지는 것만도 수백 종이 넘어 한 전통을 이루기에 넉넉하다.


학자들이 엮는 한국 소설사는 보통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상 위에다 현대 소설을 놓는다. 곧 우리의 그 같은 서사 전통이 근대까지 이어오다 개화 이후 서구의 충격을 받아 오늘날의 소설 novel이 출발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만만찮은 반대설도 있다. 그들은 묻는다. 수레는 한국에서도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지만 한국의 현대 자동차를 바로 전통적인 수레가 서구 과학의 충격을 받아 변형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라고.


하기야 현대 소설을 전통적인 서사 구조의 연장선상에 놓는 이들에게도 강한 반론의 근거는 있다. 그것은 그 둘 사이에 신소설이란 중간 형태의 서사 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신소설을 변형 과정 혹은 연결 고리로 삼아 전통과 현대를 어려움 없이 잇는다.


작가로서의 내 개인적인 체험은 왠지 전통과 현대를 단절하는 쪽으로 기운다. 나는 소설을 익힐 때 솔직히 의식적으로는 우리의 전통 서사 구조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내 종족의 문화이고 언어적 산물이라 타고 나거나 은연중에 몸에 밴 요소는 있겠지만 습득이란 측면에서 보면 나는 처음부터 우리의 전통과 분리된 서구의 현대소설을 전범(典範)으로 삼았다.


또 우리의 현대소설 초기 작가들의 견우에도 그들이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애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에 대해 최소한의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은 듯한 작가가 많고 때로는 철저하게 무시한 인상까지 준다. 어떤 작가에게는 시기와 주장을 달리하는 서구 문예 사조가 서넛씩 겹쳐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도 일방적 습득의 한 징표일 것이다. 오히려 전통적인 서사 양식에 대한 관심이나 존중은 우리 현대 소설이 상당히 세련된 뒤의 일이 된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현대 소설도 출발은 그 공리적 효용, 다른 말로 바꾸면 계몽적 효과에 대한 지식인들의 주목에서 비롯된다. 현대 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광수 이래 한국의 이른바 <진지한 소설>의 전통은 언제나 사회 정치적 계몽성을 염두에 두었다. 거기다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이 처한 정치 사회적 상황은 그 계몽성의 방향을 두고 첨예한 대립을 일으켜 때로는 바로 정치와 결합된 투쟁으로 대치되기도 했다.


흔히 한국 사람들 대부분도 그렇게 믿고 있듯이 한국의 문학적 논쟁을 순수와 참여로 대별하는데 내가 보기에 그런 논의는 사태의 본질을 바로 파악한 게 못 되는 듯하다. 본질은 대부분의 경우 방향을 달리 하는 계몽성의 충돌이었고 그 핵심에는 리얼리티의 해석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한국 소설을 이해하는 데는 리얼리티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주로 서구를 중심한 전개이기는 하지만 지난 세기 이래 리얼리즘은 미메시스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소설 기법으로 승인되어 왔다. 많은 작가들은 리얼리즘을 통해 진실 혹은 진리를 포착하고 전달할 수 있다고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러나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문학에서의 리얼리즘은 너무 많은 화물을 실은 배처럼 기우뚱거리고 때로는 난파의 징후까지 보이고 있다.


서구에서 작가들이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자기들이 진실 혹은 진리를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단초는 아마도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과 결합된 기독교의 이원적 세계관에서 이탈하면서 사람들은 새롭게 세계와 인생의 진상을 비추는 박명(箔明)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불가지론, 회의론의 안개를 헤치고 나온 근대의 철학적 리얼리즘에서 찾는 편이 옳다.


방법도 과정도 판이하게 달랐지만 비슷한 시기에 두 갈래의 사고가 세계와 인생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주관적인 사유를 통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경험과 객관화를 통해 나와 세계의 존재를 아울러 승인하고 나아가 어떤 법칙성까지도 찾아내려 했다. 문학적 태도로서의 리얼리즘도 그런 서구 철학의 전개와 함께인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도 세계와 인생의 진실을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신에서 우러난 기술방식이다. 하지만 철학이 확보한 그 두 리얼리티는 기실 방법과 과정뿐만 아니라 내용물도 달랐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적 사유가 확보한 리얼리티와 베이컨적 추론이 확보한 리얼리티는 어떤 면에서는 처음부터 함께 묶기 어려운 실질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리얼리즘의 개념이 받고 있는 관념의 과부하 내지 착종(錯綜)의 징후는 바로 거기에 연유하는 듯싶다.


문학에 수용된 경험적 리얼리티는 때로 관념적 리얼리티와 뒤섞이기도 하지만 주류는 뉴턴주의의 지원 아래 객관화와 법칙성의 길을 찾아 나름의 발전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문예 이론가들이 말하는 형식적 리얼리즘 혹은 외면적 리얼리즘을 경험적 리얼리티의 전개로 이해한다. 다만 그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배후에 있는 철학적 리얼리티의 차이에 문예 이론가들이 유의하지 않은 탓일 것이다. 그러다가 문학에서의 형식적 리얼리즘은 철학적 리얼리즘의 또 다른 전개인 사회주의를 만나 이론으로서든 도그마로서든 그 절정에 이른 것으로 나는 추측해 왔다.


냉정히 따져보면 <가변적인 서계와 범속한 주인공>이라거나 <하향 모방 혹은 아이러니의 양식> 같은 대상의 규정도 그렇지만 <객관화의 법칙> 또는 <심각하고 성실하게>라는 태도의 설정 같은 것 또한 다만 한 시대가 총애한 미메시스의 양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형식적 리얼리즘 이론은 그것들을 어겨서는 안 되는 철칙으로 추켜세워 여린 작가들의 마음을 몽마처럼 칫눌렀다. 양심적 리얼리즘으로 이름표를 바꾸어 달아본들 그것이 특정 이데첨慣袖?역사 법칙성과 결합되어 도구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은 어쩌면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귀결인지도 모른다.


한편 관념적 리얼리티의 문학적 전개는 자연 과학의 성취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세기에는 그리 활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험적 리얼리티와 뒤범벅이 되어 특징을 드러내지 못하기도 하고 철학의 한 계보 속에 잠복해 문학적 발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자연 과학의 성취란 게 소문처럼 대단한 게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 세기에 들어와서야 내면적 혹은 주관적 리얼리즘이란 이름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보면 그 역시 한 시대의 유형적인 사조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한때 그 성취는 먼저 번성해 온 배다른 형제를 압도하는 느낌까지 주었다. 실존주의 문학이나 <의식의 흐름>이 이룩한 성취는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관념적 리얼리티의 문학적 전개인 내면적 혹은 의식적 리얼리즘은 그 필연이기도 한 인상주의 주관주의 경향으로 거의 해체적인 분화에 직면해 있다. 근년 들어 리얼리즘에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낸 문예 이론은 주관주의가 빚어낸 리얼리티의 대책 없는 다양성에 바탕한 것이 많다. 그리고 역시 그 진지한 추구자로 출발했음에 분명한 일파의 <리얼리티는 다만 있을 뿐 잡을 수도 규정할 수도 없다>는 선언에서 마침내는 리얼리즘의 종언을 듣게 된다.


한국에서 참여와 순수의 구분은 대개 서로 내용을 달리 하는 리얼리티의 충돌을 잘못 공식화한 것이 된다. 객관적 법칙성에 의지하든 주관적 세계관에 바탕한 것이든 한국의 진지한 문학은 그 성향에 있어 거의가 참여적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옳다. 드물게 순수로 분류할 수 있는 예외가 있다 해도 한 세력으로 묶을 만큼 다수했던 적은 없었다. 구분이 있다면 다만 그들이 추구하는 리얼리티의 실질일 뿐이다.


또 한국에서의 순수와 참여는 정치적 관심의 방향을 구분하는 편의적 용어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바꾸면 진보와 보수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 역시 앞서 말한 리얼리티의 두 방향과 연관을 가진다. 대부분의 서구 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진보는 좌파가, 보수는 우파가 대표하며 그들의 리얼리티 또한 객관적 법칙성(우파에게는 이데올로기적 도그마)과 주관적 역사 인식(좌파가 보기에는 역사적 허무주의)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어느 쪽은 참여, 어느 쪽은 순수라고 쉽게 구분지어진다. 한 예로 얼마 전에 타계한 원로 작가 한 분은 순수파의 대명사처럼 불리웠는데 참여를 행동과 연관짓는 논점에서 보면 그처럼 참여적인 사람도 없었다. 그는 좌우 대립 시기에는 민족주의 휴머니즘의 맹장으로 사회주의 문학 이론과 싸웠고 그 뒤로도 <지금, 여기>를 우호적으로 해석하는 논리로 <미래, 거기>에 성급한 젊은이들을 견제했다.


반대의 예는 1970년대 참여파의 선봉이며 아직도 참여파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알려져 있는 이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벌써 십 년이 넘도록 정말로 <순수하게> 집필과 강의에만 전념할 뿐 현실에 행동으로 개입하는 법은 없다. 참여의 정의에 따라 그렇게 참여의 논객을 길러내는 것도 참여일 수 있겠지만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 간다.


한국 서사 문학의 미래도 앞서 간 나라들에게는 다소 구식이 되겠지만 리얼리즘의 자리매김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외면적 형식적 리얼리즘이 규정하던 여러 원리들이 억지스러웠음을 이제는 안다. 그 어떤 객관적 규정 아래서도 리얼리즘은 결국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설령 일생을 허비한다 해도 우리는 꽃 한 송이가 가진 리얼리티를 온전히 포착하지는 못한다.


세계와 인생을 둘러싸고 있는 리얼리티의 대책 없는 다수함(무한성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때문에 우리의 리얼리즘은 어차피 선택적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또한 그 선택의 주관성이 갖는 위험도 알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이해하고 싶은 것만 이해하는 것은 참된 포착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보지 않으면 안 되고><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리얼리티인지도 모른다.


주관적인 믿음만이 리얼리티의 유일한 근거라는 주장에도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은 무엇보다도 인류가 문학에 가지고 있는 공유 지분을 치명적으로 축소시킨다. 그것은 문학을 극소수 연결 통로를 가진 주권들 사이의 암호 놀이로 바꾸어가다가 마침내는 저 바벨탑 꼭대기에서처럼 작가 자신을 유일한 독자로 만들면서 끝장을 보고 말 것이다.


하지만 리얼리즘에 대한 우리의 이가 같은 지식과 경험이 만족할 만한 대안을 찾아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기실 이 문제는 우리 한국 만학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표현을 달리 해도 리얼리즘 이후에 대한 세계의 관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표명되어 왔으며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여러 형태의 대안도 제시된 바 있다.


말한 것도 없이 그들의 경험이나 주장은 우리에게 좋은 참고가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특수성이 규정한 방향이 있을 수 있다. 나는 그 모색의 출발을 리얼리즘의 탈색화에서 시작할 것을 제안해 놓고 있다. 지난 세기 리얼리즘은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미메시스에 대치되었으나 이제 리얼리즘은 무색(無色)한 미메시스로 환원되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그 무색의 미메시스의 대지 위로 새로운 문학의 지평이 떠오를 것이다. 그 새로움의 내용이 우리 경험에 전혀 없는 것이든 혹은 너무 낡아서 오히려 새로움으로 비치는 것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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