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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학 강 좌

이시영 시인의 시 세계

작성자Jaybe|작성시간09.03.01|조회수993 목록 댓글 0

“집 앞 공터엔 다행히도 몇 그루 감나무와 대추나무 그리고 잡다한 풀숲이 있다. 깊은 밤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저 여름의 무성한 수풀을 지내온 벌레들이 다시는 울지 못할 것처럼, 마지막인 것처럼 요란스레 울어 젖히는 소리를 듣는다.


생명 가진 것들의 그 찬란한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을은 혹 종언의 계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 그리고 거기엔 견고한 인간의 집이 들어서리라.” ― 산문 《기쁨의 마음으로》에서



이시영 시인의 세계를 보는 눈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의 산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집을 짓는다. 측량을 하고 경계말뚝을 박고 이윽고 나무를 베어내고 바위를 치워내고 풀을 걷어내고 터를 닦는다. 그런 과정 중에 아무도 나무의 목숨을, 바위 밑의 귀뚜라미, 지렁이 등의 곤충을, 풀숲의 여치 방아깨비를 생각하지 않는다. 신(우주)의 안목으로 본다면 그 땅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결코 소유권 등기가 되어 있는 그 인간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자연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람, 부단히 세계를 감시 관리 수정하여 평화를 구축하려는 사람,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이시영 시인이었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馬山面) 사도리(沙圖里) 하사(下沙). 이시영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 그곳에는 섬진강이 있었다. 마을 앞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발원하여 화엄사 골짜기를 지나 흘러 내려온 맑고 고운 시내를 등에 업고, 아픈 세월도 업고, 한 시절 대처로, 대처로 떠나던 우리네 누님들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도처에서 강물소리 들린다. 또한 괴괴한 달밤 바람에 사운대는 갈대 소리도 들리고 한겨울 쩡쩡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들린다. 간간 수면을 박차고 힘차게 비상하는 물새들의 날개소리도 들린다. 삶 속에 그대로 강이 흐르는 것이다. 그 강은 하류가 아니고 상류도 아니고, 상류를 막 벗어난 중류였다.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은 사시사철 기름졌다. 여름이면 더욱 그러했다. 강에는 ‘섬뜸’이라고 불리는 삼각주가 있었는데 풀이 자라 그곳은 대초원 같았다. 소를 몰고 나온 소년들은 이곳에 소를 풀어놓고 첨벙 강물 속에 뛰어들어 미역을 감으며 은어를 잡곤 했다. 은어는 더운 강물의 중심을 피해 강가의 찬물을 찾아왔으므로 소년들의 손에 쉽게 잡히곤 했다. 해질 무렵 소년들은 그렇게 잡은 은어들을 뀀에 꿰어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 어귀에는 주막이 있었고, 그 주막에서는 어른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으므로 으레 소년들의 은어는 이 어른들의 손에 넘어갔다. 대신 커다란 눈깔사탕이 소년들의 손에 쥐어졌다.


그 소년들 틈에 이시영 소년이 있었다. 이시영 소년은 특히 여름 논일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좋아했다. 안들, 통새미, 사구배미, 우묵쟁이 등의 이름이 붙은 마을 앞 논에 엎드려 초벌 두벌 만벌 김을 메는 어른들의 모습은 소년의 생각을 온통 초록빛으로 채색하곤 했다. 아마도 소년은 그런 모습에서 노동의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배웠을 것이다. 그때의 벌판 가득 울려 펴지던 민요, 소리 가락들을 이시영 소년은 먼 훗날에도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렇게 여름이 남자들의 계절이었다면 겨울은 여자들의 계절. 겨울밤 소년은 미영(목화) 잣는 소리에 살풋 잠을 깨곤 했다. 그리고는 아름답게 그려지는 농촌 겨울밤의 삽화를 듣게 되는 것이다. 물레 돌아가는 소리, 모여 물레를 잣고 실을 감으며 찬 겨울밤을 훈훈하게 데우는 여자들의 웃음소리, 헐벗은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 사랑방 머슴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쇠죽불 가에서 참새 구워먹는 소리, 오줌통에 오줌 누는 소리, 아버지의 놋재떨이에 담뱃대 부딪는 소리. 이 모든 것들은 이시영 소년의 마음에 그대로 스며 뼈가 되고 살이 되어 이른바 농촌 정서의 구체적 모습을 형성해 간다. 유년의 자연 환경이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어서 그러한 소년 이시영은 자라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아름다운 시편들로 그대로 거듭나서 춥고 시린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털옷이 되고 목도리가 된 것이다.


이시영 시인의 유년은 나름대로 풍요로웠다. 머슴을 부릴 정도의 넉넉한 집안의 내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곳엔 강(섬진강)이 있었고 산(지리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강과 산은 상처의 원인으로 시인에게 남기도 하는데 그것은 산업사회의 태동으로 붕괴되기 시작한 농촌과, 6.25가 남기고 간 후유증의 하나인, 시인의 말을 빌자면, 산사람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이 될 것이다.


시인이 중학생이 되던 무렵에 농촌에서는 빈농 계층에서부터 부분 이농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무렵 시인이 겪은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명수라는 학생이 어느 날 시인의 집 깔머슴(꼴머슴)으로 들어온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20명중에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은 고작 7~8명이었으니 당시의 농촌은 그야말로 빈곤했던 것이다.) 그날 아침 시인은 장독대 뒤에 숨었다. (그때 이미 시인에게는 민중에 대한 연민의 무늬들이 자리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로 나설라치면 벌써 일어나 한 짐 꼴을 베어 지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명수, 명수는 어느 날 마당에 대추나무 한 그루를 정성껏 심어두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명수와 같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정님이, 두례 누나의 사연은 몰락해 죽어가던 농촌 사회의 단면과 6.25가 남기고 간 상처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님이, 두례는 자매로서 불타 사라진 지리산의 한 마을에서 내려와 시인의 집 부엌살이를 했던 처녀들이었다. 시인은 이들 두 자매의 이야기를 그대로 아름다운 시편으로 옮겨 놓았다.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어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싯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 <정님이> 전문



시인의 고등학교 시절은 주로 농촌의 붕괴로 야기된 여러 내용들로 얼룩져 있다. 그것은 시인이 다녔던 고등학교가 있는 전주에 이르는 철길을 따라 점점이 나타나다가 기차역에서 하나의 집약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전라선을 오르내리며 분해 되어져 가는 농촌의 여러 단면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특히 구례구역에서 대처로 어린 딸을 보내는 한 어머니의 애절한 모습은 시인의 가슴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디 구례구역 뿐이었겠는가. 그 시절에는 어느 역에서건 어린 자식을 서울로 보내며 눈물 흘리는 어머니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전송을 받는 것은 행복한 축이었다. 부모 형제 몰래 가출을 하는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이 퍽 많았던 것이다. 그런 형태는 나중에는 지방 소도시로 이어져서 작은 도시의 빈민층에서도 무작정 상경이 무슨 유행처럼 번지곤 했었다. 어쨌건 그러한 상황 속에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의 시인에게는 남달리 마음에 각인 된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경우의 하나로 작은집의 형자 누나가 있다. 처음엔 아는 집의 식모로, 다음엔 영등포의 어느 공장으로, 다음엔 술집으로, 이렇게 당시의 처녀들의 일부가 서울 생활을 했듯이 형자 누나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다 결국 서울의 한 유곽에 목을 매고 말았다.


 

“부엌살이 형자 누나는 서울로 간 뒤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가벼운 혼백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마당엔 관솔불이 일렁이고 어른들의 목소리가 두세두세 깊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도 다 들지 못한 채 누나의 혼백은 흰 광목에 싸여 강으로 갔습니다

새벽 강이 시린 등을 내밀어 이 세상 혼자뿐인 누나의 슬픈 영혼을 실어 갔습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이듬해 가을

우리집 정지 뒤란엔 키 작은 코스모스가 가득 피었습니다“

 ― <형자 누나> 전문



다들 서울행 열차를 탔다. 마을의 동급생들 중에 서울행 열차를 타지 않은 사람은 단 셋 뿐이었다. 모두들 서울로 몰렸다. 콩나물 공장엘 다니고 자장면 배달을 하고 조리사의 시다, 상점의 점원, 막 노동꾼, 시장 행상… 그렇게, 오토바이 배달꾼 용준이는 차에 치여 죽었다. 썰물처럼 모두들 서울로 떠나고 마을은 점점 활기를 잃고 빛을 잃어갔다. 시인의 집도 어려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농촌 사정은 남의 손을 빌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인력이 귀했다. 손수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미 시인의 집 노동력은 노쇠한 상태였다. 자가 노동력이 없는 상태에서 시인의 집은 한 해 두 해 급속도로 쇠퇴해 갔다.


시인은 생생하게 목격했던 것이다. 우리의 농촌이 와해 분해 되어지는 과정을, 자본주의의 산업구조 아래 논밭을 일구어야 할 손들이 하나 둘 도시로 빠져나가 묵힌 논밭이 늘어나고 수로가 막히고 빈집이 늘어나 을씨년스러워지는 마을, 예전의 그 생기 넘치고 활기차던 마을 모습을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여수발 서울행 밤 열한시 반 비둘기호

말이 좋아 비둘기호 삼등열차

아수라장 같은 통로 바닥에서 고개를 들며

젊은 여인이 내게 물었다

명일동이 워디다요?

등에는 갓난아기 잠들어 있고

바닥에 깐 담요엔

예닐곱 살짜리 사내아이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야들 아부지 찾아가는 길이어요

일년 전 실농하고 집을 나갔는디

명일동 워디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

나는 안다 명일동

대낮에도 광산촌같이 컴컴하던 동네

스피커가 칵칵 악을 쓰고

술 취한 사내들이 큰댓자로 눕고

저녁이 오면 낮은 처마마다

젊은 아낙들의 짧은 비명이 새어나오는 곳

햇볕에 검게 탄, 향기로운 밭이슬이 흐르는

저 여인의 목에도 곧 핏발이 서리라

집 앞 똘물에 빨아 신긴

아이의 새하얀 고무신에도

곧 검은 석탄가루가 묻으리라

그러나 나는 또 안다

그녀가 모든 희망을 걸고 찾아가는 명일동은

이제 서울에 없다는 것을.

엿장수 고물장수 막일꾼들의 거리는 치워지고

바라크 대신 들어선 크린맨션 단지에선

깨끗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푸른 잔디 위를 질주하고 있음을.

여수발 서울행 밤 열한시 반 비둘기호

보따리를 풀어 삶은 계란을 내게 권하며

젊은 여인이 불안스레 거듭 물었다

명일동이 워디다요?“

― <서울행> 전문



1967년 겨울 시인은 그 한 많은 전라선을 타고 정훈희의 <안개>가 울려 퍼지는 서울역 광장에 이불보따리를 메고 내렸다. 모두가 그랬듯이 시인도 서울행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에 서라벌 예술대학에 입학을 하게 된다. 당시의 서라벌예대는 서정주 김동리 시대의 문단 축소판 같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시인은 모더니즘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이 죄 많고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표현할까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모순의 연속이었다. 시인에게는 이 세상이 너무도 낯익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훌쩍 전라선에 올랐다. 서울발 여수행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당시 완행열차로는 11시간, 급행열차로는 7시간 반정도 가면 구례구역에 닿았다. 시인은 주로 밤 열한시 반에 서울역을 출발하는 진주행 순환열차를 탔는데, 이 열차를 타면 새벽 어스름에 도착할 수 있어서 강이 뒤척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디서 닭 우는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들 가운데에 서 있는 고향 마을의 둥구나무가 보이면 마음이 안온했다. 나는 그 들길을 개구리 잠깨는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아니 개구리들도 내 발자국소리를 알아주는 것만 같았다. 왕시리봉의 높은 이마가 발그레하게 빛날 무렵 대숲의 왁자한 참새들을 젖히고 마당에 들어선다. 늙으신 어머니가 반색을 하며 달려나온다. 그러나 집안 꼴은 말이 아니다. 여기 저기 쇠락의 기운이 창연하다. 머슴들도 없고 이제는 자신이 손수 쇠죽가마 앞에 앉은 늙으신 아버지에게 가 절을 한다. 아버지는 예전처럼 말이 없으시지만 속으로는 지나가 버린 당신의 세월을, 아니 다시 올 수 없는 당신의 세상을 우시고 있는 걸 나는 안다.


떠나올 때 늙으신 어머니가 하얀 머리를 날리며 동구 앞까지 따라 나오신다. 방아다리를 지나 아랫냇가로 내려서서 내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어머니는 오래 거기 서 계실 것이다. 다시 전라선 기차를 탄다. 나는 열차 난간을 붙들고 서서 다짐을 해본다. 고향을 그려보자. 내 숨결로 나의 고향을 재현해 보자. ― 산문, <문학적 자전> 중에서 -



이시영 시인은 이렇듯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고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어머니가 두 분이셨다. 생모이신 작은어머니와 길러주신 큰어머니 이렇게 두 분이셨다. 대를 이을 자식을 얻기 위해 아버지께서 후처를 보신 것이다. 시인은 시인의 아버지께서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 낳은 외아들이다. 독자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시인의 큰어머니에게서 아들 둘 딸 하나를 그리고 작은어머니에게서 아들 넷 딸 셋을 낳았으나 모두 잃고 시인의 위로 누님 한 분과 아래로 두 여동생만 남았다. 흔히 있을 법한 두 어머니 사이의 문제로 인한 갈등은 시인의 삶 어디에서도 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시인이 스스로에게 다짐한 그 고향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학창시절이 다 끝나갈 무렵인 1971년경부터였다. 사실 시인의 작품들 중에는 고향을 사실적으로 옮겨놓은 작품들이 많다. 시만 봐도 시인의 고향과 시인의 유년의 모습들과, 한 시대의 시대적 진실들이 잘 그려진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와 닿는다.


서라벌예술대학 생활을 시작으로 시인의 서울 생활은 막을 올린다. 이곳에서 시인은 서정주 선생을 만난다. 당시 서라벌예술대학에는 자칭 악동 중에서도 상악동들이라고 자부하는 패거리들이 있었는데 그 패거리들 중의 한 사람이 이시영 시인이었다. 이 악동들은 서정주 선생을 모시고 이른바 ‘색싯집’ 이라는 곳에서 야외수업(?)을 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진한 화장을 한 아가씨들이 사이사이에 끼어 앉으면 강의가 시작되는, 문창과보다 한 단계 위인 주창과가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선생님 우선 목을 축이셔야지요” “아하! 그럼 시작해 볼까”로 시작되는 서정주 선생의 이런 강의에는 결코 결강이 없었을 것이다. 향학열이 대단했을 것이다. 물론 학점은 모두 올 에이. 이런 강의는 주로 금요일에 열렸다. 강의실은 북청집.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면 모두들 까닭도 없이 외로워져서 문득 휘파람을 불어대는 것이다. 서정주 선생께서는 악동들이 외롭다는 것을 알아채시고, 시장 통에서 중국반점으로, 중국반점에서 공덕동 선생 댁으로, 그곳에서 다시 중국반점으로 악동들을 끌고 다니셨다 한다. 순진함과 순수함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그런 강의이며 수강이었다.


1968년 늦은 가을 시인은 한 친구와 함께 도봉산 자락의 한 하숙집에 칩거한다. 한 2개월 남짓 신춘문예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12월 24일 오후 시인은 우체부에게서 한 통의 전보를 받는다.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繡>가 당선된 것이다.


서라벌예대에서 시인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송기원 박종철 감태준 신현정 오정희 이동하 김형영… 등등. 그리고 연인이었던 H가 있다. H는 전라도 출신으로 시인보다 한 살이 많았고 1년 선배였으며 친구의 친구 누나였다. 같은 학과에 다녔으며 역시 똑같이 학보사의 기자였었다. 처음엔 좋은 선후배 사이였으나 이들의 사이는 어느덧 연인의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미완으로 끝나고 만다. 물론 슬픔과 아쉬움을 남긴 채… 졸업을 하고 교사가 되어 바다가 있는 고장의 한 학교로 가 있는 H를 시인이 신열(身熱)로 찾아간 것이 이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시인은 서라벌고등학교에서 2년여 동안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1998년 제8회 정지용 문학상 발표지면이었던 《시와시학》에 나와 있는 시인의 연보에는 군데군데 연행, 조사 받음, 구속 등의 단어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시인은 일찍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지지문인 61인 선언’에 서명하여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송기원과 70년대가 끝날 무렵까지 ‘자유실천문인 협의회’의 가방총무(가방 안에 일체의 살림살이가 들어 있었음)를 역임했고, 염무웅 선생의 권유로 1980년 2월 창작과비평사에 입사한 이래,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의 간행으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 받은 일, 그 일로 국세청으로부터 추징금 일천만원을 부과 받은 일, 역시 김지하의 《大說 南》 1권의 판금,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의 게재로 인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된 일, 《창작과비평》의 폐간 복간, 등등 오늘날까지 근 2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어 왔다.



<시 평>


이시영이 조선미의 본질인 침묵의 미학, 여백의 미학, 자연스러움의 미학을 획득하려는 어떤 분명한 각성을 가졌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갖는 의미는 두 가지일 것이다. 언어로 환치될 수 없는 것, 표현해서는 안 될 것들을 표현해버림으로써 실체가 훼손되어왔던 무엇을 복원하려는 어떤 것, 이것이 바로 《사이》와 《무늬》의 정신이다. 또 하나는 이 시대에 온통 발기된 (개발과 과학에 대한 절대적 신봉이 빚어낸) 예술형식에 대한 저항형식이요 비판 형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의 시는 내용과 형식에서  ‘동양적 회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영진 《창작과비평》 98년 겨울호 -


이시영의 시는 대개의 경우 객관적인 사건, 사실일 때나 이야기(설화)를 담고 있을 때는 길어지는 반면, 시인 자신의 주관을 토로하거나 자기반성적일 때는 짧아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서사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이 길이에 따라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이 서정 양식의 본령에 일층 다가갈 때 그의 시가 압축된 단형으로 씌어짐을 알 수 있다.

― 김윤택 《한길문학》 91년 가을호 -


이시영은 단순한 자연 예찬론자가 아니다. 그가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시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 시인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 속에 매우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자연은 어떤 형식으로든 거의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이시영이 자연이 인간과 관계를 맞고 있기 때문에만 자연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인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시인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찬탄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인다.

― 김정란 《창작과비평》 94년 가을호 -


좋은 시는 그 자체가 생명과 같아서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며 빛을 뿜고 수런대고 교감하고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존재하는 시, 시인의 별다른 의미부여 없이도 거기 그대로 그냥 피어 찬연히 자기활동을 전개하는 시, … 온갖 의미를 이루려는 충동 혹은 욕망을 탈각한 채 참된 무의미의 경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의 소용돌이가 피워낸 한 송이 꽃, 혹은 그런 세계.

― 염무웅 《시와시학》 96년 봄호 -


이시영의 시는 선시(禪詩)가 아니다. 이 시는 한편으로 이시영의 시가 선시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시영의 시는 선시같이 짤막하고 간단한 구조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선시는 아니다. 선시는 대체로 오래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애매모호한 화두를 던진다. 그러나 이시영의 시는 애매모호한 화두를 던지지도 않으며 보통 사람이 이해 못할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드물게 화두를 던지더라도 그것은 시인이 던진다기보다는 읽는 사람이 그 시를 통해 느끼게 되는 의문점일 뿐이다.

― 차창룡 《현대시》 96년 11월호 -


이시영의 시는 어떤 계시의 순간에 열리는 마음의 풍경을 담아낸다. 그것은 마음에 묻어있는 흔적과 무늬를 한순간 포착하여 화폭에 옮겨놓는 방식이다. 그의 시는 의미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삶과 자연과 하늘이 그의 마음에 남기고 간 무늬를 하나의 장면으로 그려놓는다. 따라서 이시영 시의 주체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삶과 자연과 하늘이다.

― 오형엽 《현대시학》 96년 7월호 -




<연 보>


1949년 음력 8월 6일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하사에서 출생. 1962년 구례중학교 입학. 1965년 전주 영생고등학교 입학. 시를 쓰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생 시절이며 1968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 선생에게서 수학했으며, 송기원, 김종철, 감태준, 김민숙, 이병희, 신현정, 박양호, 윤정모, 오정희, 김형영, 이동하 등을 만남. 이듬해 1969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수<繡>가 당선, 월간문예 제3회 신인 작품 모집에 ‘채탄’외 1편이 당선됨.

 

1970년 임보 김춘석, 이건청, 오세영, 조정권, 신대철 등과 《六時》 동인 결성. (《六時》는 2집까지 나오다가 이건청 오세영이 《現代詩》로 옮겨감으로써 해체됨) 1971년 염무웅 선생을 알게됨. 1971년 1월 부친 별세, 서라벌예대 졸업. 1974년 1월 “개헌청원지지문인 61인 선언”에 서명하여 중앙정보부에 연행, 3월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입학,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 발표에 참여 연행되어 조사 받음. 1975년 1~2월 “문인. 자유수호격려광고” 운동에 참여, 3월 서라벌고등학교 국어교사 취직.

 

1976년 12월 첫 시집 《滿月》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 1978년 6월 서라벌고등학교 사직, 10월 고은 선생의 주례로 이경희(李景喜)씨와 결혼. 1979년 7월 3일 워커힐의 제4차 세계시인대회장에서 <세계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 시위하다 14일간 구금유치를 받음. 1980년 2월 《창작과비평》 편집장으로 입사, 1982년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의 간행으로 안기부에 연행, 국세청으로부터 추징금 일천만원을 부과 받음, 신동엽 유족과 함께 ‘신동엽 창작 기금’을 제정.

 

1984년 2월 《창작과비평》 주간으로 승진. 1986년 8월 두 번째 시집 《바람 속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 1988년 3월 세 번째 시집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에서 간행, 가을 학기부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로 출강. 1989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황석영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게재, 이 일로 11월 23일 안기부로 연행 집은 압수 수색 당함. 11월 25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 발부, 12월 9일 서울구치소에 수감 때까지 안기부 지하실에서 수사관들과 함께 먹고 자며 집중조사를 받음. 1990년 2월 3일 보석으로 출감. (이 사건은 공민권의 제한을 심하게 받았으며 1심(92년) 2심(93년) 3심(95년)에서 징역8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으로 형 확정 됨. 95년 8월 15일 대통령에 의하여 특별사면 및 특별복권됨.)

 

1991년 5월 네 번째 시집 《이슬 맺힌 노래》 들꽃세상에서 간행. 1993년 8월 중국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초청으로 <중국조선족 문학예술 국제학술연구회> 참석. 1994년 1월 《창작과비평사》 상무이사 겸 주간이 됨, 5월 다섯 번째 시집 《무늬》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 제4회 서라벌문학상(시부문) 수상. 1995년 2월 (주)창작과비평사 대표이사 부사장에 취임, 5월 첫 산문집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 한양출판에서 간행, 추계예술학교 문예창작과 한 학기 출강. 1996년 3월 여섯 번째 시집 《사이》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 7년간 시간강사로 나가던 중앙대 문예창작과 강의를 그만두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객원 교수로 출강, 제8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1997년 10월 일곱 번째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솔 출판사 간행. 동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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