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은 명징하다. 그러나 문학은 모호하다. 비록 현대의 많은 문학이론들이 문학의 신비로운 측면을 단호히 부정한다 할지라도, 한 편의 놀라운 시 앞에서 독자는, 차가운 분석의 메스를 찔러 넣기 힘든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으리라. 아무리 시가 지적인 조작물일 뿐이라는 모더니즘의 미학을 신봉한다고 해도, 실제로 지성이라는 것이 글쓰기에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시인들은 체득하고 있으리라. 하나의 이미지를 열광적으로 좇아가고, 기진맥진 껴안고, 이상의 말대로 수명을 헐어가며 써내야만 하는 이 불가해한 집념을, 열망이라고, 욕망이라고, 운명애라고, 무엇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고통의 빗장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가열한 싸움 속으로 삶을 밀어 넣는 힘, 미(美)라는 이름으로 어떤 궁극성을 구원처럼 찾아 헤매게 하는 그 힘을 서구의 시인들은 뮤즈라고 옛적부터 표현해왔다. 나는 이 말을 김소월의 시혼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싶은데, 그 말에는 시가 세속적인 인간의 창조물이지만, 살아 있는 고귀한 자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다시 말해 생명을 표현할 만한 무엇이라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서정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서정은 말 그대로 느낌의 실마리가 아닐까? 주요한이 그의 첫시집 『아름다운 새벽』의 발문에서 밝힌 바대로, 사상과 정서와 말이 민주의 마음과 같이 울리는 시를 강조했던 것을 나는, 사유와 느낌이 어우러져 독자에게 강렬한 울림을 가져오는 시로 바꾸어 해석해본다. 내가 생각하기로, 서정이란 무수히 다양한 요인을 통해 다가오는 울림이라는 말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저 공감 정도가 아니라 울림을 가져오는 생명력 있는 시는 정말로 희귀하다.
그러한 생명력 있는 시를 열렬히 갈구했던 낭만주의 시인들은, 글쓰기에 관한 실질적 이론이랄 수 있는 상상력에 관한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적인 시는 상상력의 이론이나 글쓰기 교본 같은 것에 따라 그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이 아니다. 콜리지나 워즈워드가 여러 가지 생동감 있는 운율을 시도하고, 시작에 관련된 온갖 이론을 개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시를 자발적인 정서의 유출로 규정하고, 시의 영감적 측면까지도 인정했던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항이 아닐 수 없다. 낭만주의 시인들이 강조해온 것은 바로 우리의 정수리를 찍어내며 가슴을 살라먹는 프로메테우스의 불, 인간의 의식을 신적인 것으로 상승시키는 창조력의 표지였다. 오직 창조에의 열망만이 몸주처럼 존재를 채울 때, 시인은 무언가를 말하고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논의를 진행시키기 전에 나는 먼저 참으로 내게 강렬한 울림을 던져준, 비탄어린 시편을 소개하고 싶다.
숨을 거둘 때까지
꿈을 비웃으라,
피가 흐르는
나의 배경에서는
까마귀가 날고 있다.
유황처럼 끓고 있는
보리밭 위를
검은 덩어리들이
낮게 낮게 날고 있다.
한 마리의 새가
날기 위해서도
하늘은 바다처럼
일렁이어야 하고
언어는 피 흘리며
보리밭처럼 끓지 않으면
안 된다.
격렬한 일몰에
나의 두 눈은
불타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몸부림치는
누런 보리밭 위를
이 숨 막히는 쓸쓸함 위를
까마귀떼들이 낮게 낮게 날고 있다
―허만하, 「고호의 풍경」 전문
이 시가 내게 울림을 던져준 이유를 나는 단순히 정제된 형식이나 의미론적 국면, 언어의 미감 같은 교과서적 진술로 표현할 수 없다. 고호라는 한 예술가의 생에 강렬하게 공감하고 있는 어떤 강렬한 시혼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또 그것만도 아니다. 이 시 속에서 나는, 창조에의 갈증으로 맹목적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시인이란 존재의 저주스런 아픔을 환기하게 되고, 생의 궁극성에 열렬히 가닿고 싶어 하는 존재의 열망, 비애와 광증의 불길로 숨 막히게 얼룩진 현실의 공포까지도 전달받을 수 있다. 그렇다. 죽음, 언제나 근원적인 죽음이 찾아온다. 세계는 삶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의 탯줄까지도 무참히 잘라놓는다. 근원으로의 꿈 곁에는 늘 죽음의 현실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우리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이 세계의 문제에 무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속 속에서 근원을 보았고, 근원을 알기 위해 인간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인간의 가슴속에 깃들인 아픈 의문을 사랑하고, 동시에 세계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했다. 잘 알려진 대로 낭만주의 운동은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Return to Nature)라는 슬로건을 기치로 내걸면서, 프랑스 혁명으로 대변되는 전제주의에의 저항과 휴머니즘 사상을 문학 속에 투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서구문학에서 낭만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의 정신적 기반에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계기, 그리고 부르주아들의 속물적 사회에 대한 정치적 저항성이 농후하게 깔려 있었고, 우리의 20년대 시인들이 구현했던 낭만주의에도 식민지 인텔리들의 정치적 반응과, 현대문학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게 깔려 있었다(단지 박영희, 이상화, 홍사용 같은 좌파적 낭만주의자들만이 아니다). 여러 사료들을 통해 추적되는 그들의 문학론에서 확인되는 것은, 민족주의, 반식민주의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해방이념이었고 문학의 자유주의 노선이었다.
우리가 환기해야 할 것은 서정을 시의 본질로 보았던 낭만주의 시인들이 언제나 시대적 삶의 발견이라는 명제에 너무도 충실하고 치열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시를 살기 원했지만, 삶 속의 시를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서정은 없고 감상만 난무한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즈음, 우리는 미적 경험이 아무리 주관적인 것에 바탕 한다 할지라도 서정시라는 레테르를 달고는 있지만, 감동을 주는 데 무력한 시를 너무나 많이 접할 수 있다. 서정미라는 것이 인간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낡은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우리 서정시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몇 가지 유감스런 상황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서정을 논의하기 위해 문제점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지만, 이 시점에서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