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ng | Jazz 뮤지션 2004/12/21 18:32
http://blog.naver.com/bohe15/100008720970
1920년대를 들어서면서 재즈는 그음악적 내실적인면과 대중들에대한 친숙도양쪽면에서 괄목상대한 발전을 하게되면서 그장소도 뉴올리언즈와 시카고를 그쳐 1920년 중반 부터 중심지는 뉴욕과 캔사스 시티로 옮겨지게 된다. 이 시기의 재즈는 거의가 10인조 이상의 인원으로 편성되어 있어 '빅 밴드' 시대라고 일컫기도 한다.
당시의 빅밴드들은 캔사스 시티에서 주로 활략하던 카운트베이시 밴드를 제외하고는 임프로비제이션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셈세한 편곡을 바탕으로한 무드음악과 무도회의 흥을 돋구는 춤곡위주의 연주였다고 할수있다. 이런 연유로 당시의 재즈는 감상을 위해 청중을 모아두고 연주를 경청하는 요즘 시대의 대중음악들과 달리 그저 악단은 춤을 추는 사람을 위해 흥을 돋구는 역활이 주된 연주 목적이었다. 이런 빅밴드들의 성향은 재즈의 대중화를 이끌어 스윙이 재즈의 황금기라고 불리어지게 만들었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스윙재즈는 단지 귀와 몸을 즐겁게 하는데 치우친 나머지 지나치게 퇴폐적이고 상업주의적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한다. 그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윙재즈 시대는 유래없는 재즈의 황금기였고, 또한 이시대의 많은 연주 형식과 연주자들의 연주기술은 모던재즈의 초석이 되었고 그런연유로 스윙은 재즈의 가장 중요한 역사의 한부분이 되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이럴테면 '콜맨 홉킨스'가 없었다면 '존 콜트레인'이 존재할수 있었을까? 하는것이다.
듀크 앨링튼 (duke ellongton) 1899.4.26 - 1974.5.24
"자기 혼자 높은 산에 올라가 다른인간을 내려다 보는 인간이 되려고 하지않았다. 미치광이 음을 내건 바보의 비웃음을 노래하건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쓰건 그것은 나의 음악이며 나는 내가 원하는 음악을 할것이며 이것은 나의 권리이다" 스윙시대 작곡자이자 편곡자였고 피이니스트이자 밴드의 리더였던 듀크앨링튼의 위에말은 그의 자유롭고 끝없는 창작에대한 욕구를 단적으로 나태내어주는 말이다. 작곡자로서, 실제로 그는 레코드회사의 편집앨범을 제외하고도 그의 음반은 150여장이나 되며 천오백 여곡을 작.편곡하였는데 그중 많은 곡들은 스탠다드 넘버로 자리잡으면서 후배 연주자들에게 사랑 받는 레파토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satin doll, solitude ,moood indigo, in a mellotone, black and fantasy등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이고 또한 paris blues, anatomy of mother asphalt jungle 등의 영화에서는 자신이 곡을 쓰고 그의 악단이 연주 하기도 했다. 재즈에서 다른 장르의 대중음악과의 가장 큰 차별점은 임프로비제이션 즉 즉흥연주이다. 그런 관점에서 편곡이라는 것은 재즈와 전혀 무관하게 생각될수도 있자만 스윙시대의 빅밴드들에게서의 편곡은, 즉흥연주 보다도 더 휼륭한 연주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는것을 생각하면 앨링튼의 명편곡자로서 재능과 업적 또한 간과 할수없다. 그의 편곡 스타일은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이였는데, 악기 위주의 파트 편성이 아니라 연주자들의 개성과 실력에 맞게끔 적절한 파트 편성을 하였는데 그런 그의 편곡은 연주자 한사람 한사람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미리 계획된 연주 였지만 실제로 연주자들은 아주 자유로운 상태에서 연주할수 있어 그런점이 그의 악단의 연주는 임프로비세이션 부분과 편곡 부분이 거의 식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스타일은 jungle sounds라 불리우며 뉴욕의 커튼클럽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게되었고 후일, 우디허맨, 길에반스 마일즈 데이비스,찰스 밍거스등의 모던재즈 편곡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빅밴드의 리더로서 1923년 밴드 결성후 74년 그가 사망할때 까지 한번도 밴드를 해체한적이 없을정도로 인품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40여년 그의 밴드의 역사속에서 그는 우수한 연주자를 발굴하고 그들을 최고의 연주자로 완성시키기도 했는데 그 예로 쟈니 호지스(ts), 벤 웹스터(ts), 지미 블랜튼(b), 바니 비가드(cl), 클락 테리(t) 등이 있다. sir duke, duke'choice, he loved him madly, the duke 이노래들은 각각 스티비 원더, 찰스 밍거스, 마일즈 데이비스, 데이브 부르벡의 곡들인데 공통점이 있다. 바로 다름아닌 듀크 앨링튼에 대한 헌정곡이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오스카 피터슨, 셀로니어스 몽크, 케니 버렐, 디지 길레스피, 사라본등 수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곡으로 앨범을 만들며 끈임 없이 그를 존경했고 이는 그가 왜 백작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운트 베이시 (count basie)
임프로비제이션과 함께 재즈의 가장 멋진 매력은 '스윙' 한다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캔사스시티의 최고 인기밴드 베니모튼 악단은 베니 모튼의 사망이후 카운트 베이시라는 새로운 리더가 악단을 이끌게 된다. 그후 그는 40여년간 최고의 스윙이 무엇인가를 수많은 재즈팬들에게 보여준다. 그의 밴드는 곧잘 '스윙의 왕'이라는 자리를 놓고 베니 굿맨 악단과 비교 되기도 하고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에서는 듀크 앨링튼 악단과 비교 되기도 하였다. 전자를 보면 베니굿맨이 백인 이었다는점 그리고 왕성한 순회공연을 펼친이유로 대중들의 지지도 면에서는 굿맨 악단에 다소 떨어지지만 진정으로 스윙하는 밴드로서는 베이시악단의 적수가 되지못하였다.(뮤지션들은 상상 베이시 밴드를 최고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밴드를 이끌면서 항상 변화와 발전을 꾀하였는데 30년대 당시 단순한 12마디 블루스 형식의 곡들이 주 레파토리로 등장 하던것과 달리 4,5십년대를 거치면서 어니윌킨스, 퀸시존스, 베니카터등의 휼륭한 편곡자를 영입하면서 한층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초창기 소편성의캄보 스타일이던 그의 밴드는 4,5십년대를 거치면서 그런 굴레도 벗어난다. 그렇지만 40여년 이밴드의 역사속에 변하지않는 연주 성향도 있었다. 다른 스윙밴드가 다소 의도적인 편곡에의한 파트간의 앙상블을 최고의 무기로 삼는 밴드였다고 볼때 베이시 악단은 앞에 언급 한것 처럼 캄보 밴드의 스타일인, 솔로 위주의연주 성향을 지닌 밴드였는데 (퀸시 존스나 베니카터 등의 편곡자들을 영입 하였을때 조차도 이런 성향은 여전히 짙게 남아 있었다.)이런 이유인지 유난히 베이시 악단에는 레스터 영 같은 휼륭한 솔리스트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빅 밴드에서는 피아니스트로서 연주를 최대한 자제하였지만 실제로 스트라이드 주법으로 무장(?)한 휼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자신의 캄보 밴드였던 '캔사스 시티 파이브'의 음반을 들어 보면 잘 알 수 있다.
베니 굿맨 (Benny Goodman)
베니 굿맨은 1909년 시카고 출생으로 국내에도 모 방송 씨에프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sing sing sing을 비롯 많은 히트 곡이 있을 정도로 재즈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밴드를 이끈 밴드의 리더이자 훌륭한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어떤이는 그의 밴드 너무 인기에 편성하였다는 이유로 다소 평가 절하 하는 경우가 있는데 위험 천만한 발언이 아닐수 없다. 실제로 베니 굿맨 악단은 천재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찬과 피아니스트 테디윌슨등 뛰어난 솔로 연주자를 영입해 연주력 또한 여타 다른 악단에 손색이 없었고 굿맨 자신 또한 당시 클라라넷이라는 악기를 최고의 인기 악기로 부상시킬만큼 탁월한 테크닉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베니 굿맨 밴드의 장점은 혁신성에 있다고 볼수 있다. 무엇보다도 흑인 밴드들이 네임밸류로 플레이어를 채용한데 반해 그는 젊고 유능한 플레이어를 과감하게 채용 하면서 스윙계의 새바람을 일으킬수 있었다는 것(앞에서 언급한 찰리크리스찬외 드러머 진 크루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리듬섹션을 들수 있겠다)과 당시 무도회 장의 들러리(?) 수준에 불과 했던 재즈의 위치를 감상하는 재즈로 격 상 시키는대 지대한 역할을 했던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carnegie hall jazz concert)이 바로 그런것이다. 40년대 중반이후 비밥이 재즈의 주류가 되면서 그는 자신의 빅밴드를 해체하는등의 슬럼프를 마지하지만 1978년 그가 카네기홀에서의 공연을 펼친지 꼭 40년만에 다시 돌아와 청중들로 눈물젖은 갈채를 받기도 했다.
글렌 밀러 (Glenn miller)
글렌 밀러 빅 밴드 오케스트라의 리더이자 트론본 연주자인 글렌 밀러는 1904년생으로 그의 오케스트라는 솔로 연주자의 테크닉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심플한 멜로디의 곡들을 가볍게 스윙하였고 특히 여러 싱어들의 흉륭한 반주등으로 1939년에서 42년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베니굿맨 밴드 못지않은 많은 인기를 누렸었다.
In the Mood," "At Last," "Stairway to the Stars," "Tuxedo Junction," "Pennsylvania 6-5000," "Chattanooga Choo Choo," "A String of Pearls," "Elmer's Tune," "Don't Sit Under the Apple Tree," "American Patrol," "I've Got a Gal in Kalamazoo," " Serenade in Blue" and "Jukebox Saturday Night." 등의 무수한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특히 in the mood, moonlight serenade 같은곡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하게 알려진 밀러 밴드의 최고 히트곡이라고 할수 있다.)그의 밴드의 인기는 식을 줄몰랐다. 그러던중 그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망설임 없이 밴드를 해체하고 해군 장교로로 참전 위문 공연을 펼치던 중 불의의 헬기 사고로 사망해 30년이 채 되지 못한 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해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레스터 영 (Lester Young)
콜맨 홉킨스가 테너 색스폰의 아버지라 불리운 반면 레스터영은 대통령(pres,prez)이라 불러웠다. 그만큼 그둘은 스윙시대 최고의 테너 색스폰 연주자로서 자주 비교되곤 하였다. 콜맨 홉킨스는 음색은 무겁고 진지하였고, 레스터 영은 깔끔하고 세련되었고 콜맨은 다소 복잡하고 급격한 코드 체인지를 활용해 임프로바이즈했다고 하면, 레스터 영은 그 반대로 심플하면서도 기발한 멜로디로 듣는이의 귀를 즐겁고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임프로바이즈를 했다. 결론적으로 볼때 레스터 영의 깔끔하고 세련된 톤과 심플한 솔로 멜로디는 후일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의 연주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수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그런 연주만을 했던것은 아니다. 덱스트 고든이나 소니 스티트 처럼 콜맨 홉킨스와 레스터 영모두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모던재즈 전체에 영향을 준 연주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앞에 언급한대로 역시 그의 연주는 많은 음들을 나열해서 화려한 연주를 하는것이 아니라 최대의 절제로 최소의 음들만을 사용했는데 마치 10년이후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의 탄생(birth of coll) 의 예고편을 보는듯하다. 그의 멋진연주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40년대 이전의 앨범을 들으면 언제든지 확인 할수있다.
쟈니 호지스 (johnny hodges)
스윙시대에는 라이벌(?) 이라고 불릴수 있는 연주자가 많았다. 듀크 앨링튼과 카운트 베이시, 베니 굿맨과 카운트 베이시, 콜맨 홉킨스와 레스터 영 그리고 자니 호지스와 베니카터가 아닐까 한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라하면 베니 카터보다는 자니 호지스가 한층내실있는 연주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위 다른 사람들과의 비유가 좀 다르 다고 할수있겠다. (물론 베니 카터를 과소 평가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혀둔다.) 듀크 엘링튼과 쟈니 호지스는 40년을 함께 연주 했다. 그는 자신의 연주 인생의 대부분을 듀크 엘링튼 악단에서 보내었고 캄보 형식의 앨범도 대부분 듀크 엘링튼과 함께한 앨범이었다. 그는 듀크의 악단에서 다른 색스폰 주자들을 리드 하였는데 이는 편곡 위주의 엘링튼 악단에서 큰힘이 되었다. 그는 하드 밥 알토 색스폰 주자 케논볼 에덜리가 그러했던것 처럼 때때로 테너 색스폰으로 오인 받을 정도로 깊고 무거운 색스폰 음색을 자랑 했었다. 또한 그의 강점은 항상 안정적인 연주력에 있었는데, 때문에 컨디션에 따라 연주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1970년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는 항상 듀크 엘링튼과 연주 하였고 그중 그 어떤 앨범을 들어도 그의 훌륭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출처: 폴링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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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를 들어서면서 재즈는 그음악적 내실적인면과 대중들에대한 친숙도양쪽면에서 괄목상대한 발전을 하게되면서 그장소도 뉴올리언즈와 시카고를 그쳐 1920년 중반 부터 중심지는 뉴욕과 캔사스 시티로 옮겨지게 된다. 이 시기의 재즈는 거의가 10인조 이상의 인원으로 편성되어 있어 '빅 밴드' 시대라고 일컫기도 한다.
당시의 빅밴드들은 캔사스 시티에서 주로 활략하던 카운트베이시 밴드를 제외하고는 임프로비제이션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셈세한 편곡을 바탕으로한 무드음악과 무도회의 흥을 돋구는 춤곡위주의 연주였다고 할수있다. 이런 연유로 당시의 재즈는 감상을 위해 청중을 모아두고 연주를 경청하는 요즘 시대의 대중음악들과 달리 그저 악단은 춤을 추는 사람을 위해 흥을 돋구는 역활이 주된 연주 목적이었다. 이런 빅밴드들의 성향은 재즈의 대중화를 이끌어 스윙이 재즈의 황금기라고 불리어지게 만들었지만 또한 같은 이유로 스윙재즈는 단지 귀와 몸을 즐겁게 하는데 치우친 나머지 지나치게 퇴폐적이고 상업주의적이라는 지탄을 받기도 한다. 그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윙재즈 시대는 유래없는 재즈의 황금기였고, 또한 이시대의 많은 연주 형식과 연주자들의 연주기술은 모던재즈의 초석이 되었고 그런연유로 스윙은 재즈의 가장 중요한 역사의 한부분이 되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이럴테면 '콜맨 홉킨스'가 없었다면 '존 콜트레인'이 존재할수 있었을까? 하는것이다.
듀크 앨링튼 (duke ellongton) 1899.4.26 - 1974.5.24
"자기 혼자 높은 산에 올라가 다른인간을 내려다 보는 인간이 되려고 하지않았다. 미치광이 음을 내건 바보의 비웃음을 노래하건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쓰건 그것은 나의 음악이며 나는 내가 원하는 음악을 할것이며 이것은 나의 권리이다" 스윙시대 작곡자이자 편곡자였고 피이니스트이자 밴드의 리더였던 듀크앨링튼의 위에말은 그의 자유롭고 끝없는 창작에대한 욕구를 단적으로 나태내어주는 말이다. 작곡자로서, 실제로 그는 레코드회사의 편집앨범을 제외하고도 그의 음반은 150여장이나 되며 천오백 여곡을 작.편곡하였는데 그중 많은 곡들은 스탠다드 넘버로 자리잡으면서 후배 연주자들에게 사랑 받는 레파토리가 되었다. 예를 들면 satin doll, solitude ,moood indigo, in a mellotone, black and fantasy등 이루 헤아릴수 없을 정도이고 또한 paris blues, anatomy of mother asphalt jungle 등의 영화에서는 자신이 곡을 쓰고 그의 악단이 연주 하기도 했다. 재즈에서 다른 장르의 대중음악과의 가장 큰 차별점은 임프로비제이션 즉 즉흥연주이다. 그런 관점에서 편곡이라는 것은 재즈와 전혀 무관하게 생각될수도 있자만 스윙시대의 빅밴드들에게서의 편곡은, 즉흥연주 보다도 더 휼륭한 연주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는것을 생각하면 앨링튼의 명편곡자로서 재능과 업적 또한 간과 할수없다. 그의 편곡 스타일은 매우 독특하고 창의적이였는데, 악기 위주의 파트 편성이 아니라 연주자들의 개성과 실력에 맞게끔 적절한 파트 편성을 하였는데 그런 그의 편곡은 연주자 한사람 한사람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미리 계획된 연주 였지만 실제로 연주자들은 아주 자유로운 상태에서 연주할수 있어 그런점이 그의 악단의 연주는 임프로비세이션 부분과 편곡 부분이 거의 식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그의 스타일은 jungle sounds라 불리우며 뉴욕의 커튼클럽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게되었고 후일, 우디허맨, 길에반스 마일즈 데이비스,찰스 밍거스등의 모던재즈 편곡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빅밴드의 리더로서 1923년 밴드 결성후 74년 그가 사망할때 까지 한번도 밴드를 해체한적이 없을정도로 인품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다. 40여년 그의 밴드의 역사속에서 그는 우수한 연주자를 발굴하고 그들을 최고의 연주자로 완성시키기도 했는데 그 예로 쟈니 호지스(ts), 벤 웹스터(ts), 지미 블랜튼(b), 바니 비가드(cl), 클락 테리(t) 등이 있다. sir duke, duke'choice, he loved him madly, the duke 이노래들은 각각 스티비 원더, 찰스 밍거스, 마일즈 데이비스, 데이브 부르벡의 곡들인데 공통점이 있다. 바로 다름아닌 듀크 앨링튼에 대한 헌정곡이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오스카 피터슨, 셀로니어스 몽크, 케니 버렐, 디지 길레스피, 사라본등 수많은 연주자들이 그의 곡으로 앨범을 만들며 끈임 없이 그를 존경했고 이는 그가 왜 백작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운트 베이시 (count basie)
임프로비제이션과 함께 재즈의 가장 멋진 매력은 '스윙' 한다는 것이다. 1930년대 후반 캔사스시티의 최고 인기밴드 베니모튼 악단은 베니 모튼의 사망이후 카운트 베이시라는 새로운 리더가 악단을 이끌게 된다. 그후 그는 40여년간 최고의 스윙이 무엇인가를 수많은 재즈팬들에게 보여준다. 그의 밴드는 곧잘 '스윙의 왕'이라는 자리를 놓고 베니 굿맨 악단과 비교 되기도 하고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에서는 듀크 앨링튼 악단과 비교 되기도 하였다. 전자를 보면 베니굿맨이 백인 이었다는점 그리고 왕성한 순회공연을 펼친이유로 대중들의 지지도 면에서는 굿맨 악단에 다소 떨어지지만 진정으로 스윙하는 밴드로서는 베이시악단의 적수가 되지못하였다.(뮤지션들은 상상 베이시 밴드를 최고로 인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밴드를 이끌면서 항상 변화와 발전을 꾀하였는데 30년대 당시 단순한 12마디 블루스 형식의 곡들이 주 레파토리로 등장 하던것과 달리 4,5십년대를 거치면서 어니윌킨스, 퀸시존스, 베니카터등의 휼륭한 편곡자를 영입하면서 한층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었고 초창기 소편성의캄보 스타일이던 그의 밴드는 4,5십년대를 거치면서 그런 굴레도 벗어난다. 그렇지만 40여년 이밴드의 역사속에 변하지않는 연주 성향도 있었다. 다른 스윙밴드가 다소 의도적인 편곡에의한 파트간의 앙상블을 최고의 무기로 삼는 밴드였다고 볼때 베이시 악단은 앞에 언급 한것 처럼 캄보 밴드의 스타일인, 솔로 위주의연주 성향을 지닌 밴드였는데 (퀸시 존스나 베니카터 등의 편곡자들을 영입 하였을때 조차도 이런 성향은 여전히 짙게 남아 있었다.)이런 이유인지 유난히 베이시 악단에는 레스터 영 같은 휼륭한 솔리스트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는 자신의 빅 밴드에서는 피아니스트로서 연주를 최대한 자제하였지만 실제로 스트라이드 주법으로 무장(?)한 휼륭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자신의 캄보 밴드였던 '캔사스 시티 파이브'의 음반을 들어 보면 잘 알 수 있다.
베니 굿맨 (Benny Goodman)
베니 굿맨은 1909년 시카고 출생으로 국내에도 모 방송 씨에프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sing sing sing을 비롯 많은 히트 곡이 있을 정도로 재즈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밴드를 이끈 밴드의 리더이자 훌륭한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어떤이는 그의 밴드 너무 인기에 편성하였다는 이유로 다소 평가 절하 하는 경우가 있는데 위험 천만한 발언이 아닐수 없다. 실제로 베니 굿맨 악단은 천재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찬과 피아니스트 테디윌슨등 뛰어난 솔로 연주자를 영입해 연주력 또한 여타 다른 악단에 손색이 없었고 굿맨 자신 또한 당시 클라라넷이라는 악기를 최고의 인기 악기로 부상시킬만큼 탁월한 테크닉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베니 굿맨 밴드의 장점은 혁신성에 있다고 볼수 있다. 무엇보다도 흑인 밴드들이 네임밸류로 플레이어를 채용한데 반해 그는 젊고 유능한 플레이어를 과감하게 채용 하면서 스윙계의 새바람을 일으킬수 있었다는 것(앞에서 언급한 찰리크리스찬외 드러머 진 크루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리듬섹션을 들수 있겠다)과 당시 무도회 장의 들러리(?) 수준에 불과 했던 재즈의 위치를 감상하는 재즈로 격 상 시키는대 지대한 역할을 했던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carnegie hall jazz concert)이 바로 그런것이다. 40년대 중반이후 비밥이 재즈의 주류가 되면서 그는 자신의 빅밴드를 해체하는등의 슬럼프를 마지하지만 1978년 그가 카네기홀에서의 공연을 펼친지 꼭 40년만에 다시 돌아와 청중들로 눈물젖은 갈채를 받기도 했다.
글렌 밀러 (Glenn miller)
글렌 밀러 빅 밴드 오케스트라의 리더이자 트론본 연주자인 글렌 밀러는 1904년생으로 그의 오케스트라는 솔로 연주자의 테크닉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심플한 멜로디의 곡들을 가볍게 스윙하였고 특히 여러 싱어들의 흉륭한 반주등으로 1939년에서 42년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베니굿맨 밴드 못지않은 많은 인기를 누렸었다.
In the Mood," "At Last," "Stairway to the Stars," "Tuxedo Junction," "Pennsylvania 6-5000," "Chattanooga Choo Choo," "A String of Pearls," "Elmer's Tune," "Don't Sit Under the Apple Tree," "American Patrol," "I've Got a Gal in Kalamazoo," " Serenade in Blue" and "Jukebox Saturday Night." 등의 무수한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특히 in the mood, moonlight serenade 같은곡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하게 알려진 밀러 밴드의 최고 히트곡이라고 할수 있다.)그의 밴드의 인기는 식을 줄몰랐다. 그러던중 그는 2차대전이 발발하자 망설임 없이 밴드를 해체하고 해군 장교로로 참전 위문 공연을 펼치던 중 불의의 헬기 사고로 사망해 30년이 채 되지 못한 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해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레스터 영 (Lester Young)
콜맨 홉킨스가 테너 색스폰의 아버지라 불리운 반면 레스터영은 대통령(pres,prez)이라 불러웠다. 그만큼 그둘은 스윙시대 최고의 테너 색스폰 연주자로서 자주 비교되곤 하였다. 콜맨 홉킨스는 음색은 무겁고 진지하였고, 레스터 영은 깔끔하고 세련되었고 콜맨은 다소 복잡하고 급격한 코드 체인지를 활용해 임프로바이즈했다고 하면, 레스터 영은 그 반대로 심플하면서도 기발한 멜로디로 듣는이의 귀를 즐겁고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임프로바이즈를 했다. 결론적으로 볼때 레스터 영의 깔끔하고 세련된 톤과 심플한 솔로 멜로디는 후일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의 연주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수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그런 연주만을 했던것은 아니다. 덱스트 고든이나 소니 스티트 처럼 콜맨 홉킨스와 레스터 영모두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모던재즈 전체에 영향을 준 연주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앞에 언급한대로 역시 그의 연주는 많은 음들을 나열해서 화려한 연주를 하는것이 아니라 최대의 절제로 최소의 음들만을 사용했는데 마치 10년이후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의 탄생(birth of coll) 의 예고편을 보는듯하다. 그의 멋진연주는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40년대 이전의 앨범을 들으면 언제든지 확인 할수있다.
쟈니 호지스 (johnny hodges)
스윙시대에는 라이벌(?) 이라고 불릴수 있는 연주자가 많았다. 듀크 앨링튼과 카운트 베이시, 베니 굿맨과 카운트 베이시, 콜맨 홉킨스와 레스터 영 그리고 자니 호지스와 베니카터가 아닐까 한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라하면 베니 카터보다는 자니 호지스가 한층내실있는 연주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위 다른 사람들과의 비유가 좀 다르 다고 할수있겠다. (물론 베니 카터를 과소 평가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을 밝혀둔다.) 듀크 엘링튼과 쟈니 호지스는 40년을 함께 연주 했다. 그는 자신의 연주 인생의 대부분을 듀크 엘링튼 악단에서 보내었고 캄보 형식의 앨범도 대부분 듀크 엘링튼과 함께한 앨범이었다. 그는 듀크의 악단에서 다른 색스폰 주자들을 리드 하였는데 이는 편곡 위주의 엘링튼 악단에서 큰힘이 되었다. 그는 하드 밥 알토 색스폰 주자 케논볼 에덜리가 그러했던것 처럼 때때로 테너 색스폰으로 오인 받을 정도로 깊고 무거운 색스폰 음색을 자랑 했었다. 또한 그의 강점은 항상 안정적인 연주력에 있었는데, 때문에 컨디션에 따라 연주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1970년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뜨기 전까지 그는 항상 듀크 엘링튼과 연주 하였고 그중 그 어떤 앨범을 들어도 그의 훌륭한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출처: 폴링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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