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씨 ( 목천우씨 )
목천 우씨(木川于氏)
목천(木川)은 충정남도 천원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우씨(于氏)는 중국 하남(河南)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가 후에 우(于)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우씨(于氏)는 목천(木川) 단본(單本)이며 고려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우방녕(于邦寧)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후 그의 아들 학유(學儒)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로부터 난을 일으키고 거사에 가담하
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무신이 전권(全權)을 잡아 잘 된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거절
했다. 정중부가 집권한 후 그는 신상이 위태로왔으나 집권층인 이의방(李義方)의 누이와 결혼한
인척관계로 무사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술유(述儒)가 명종(明宗)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판형
부사(判刑部事)를 거쳐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 한편 희정(熙宗) 때 추밀원부사(樞密
院副使)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던 승경(承慶)은 권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
다 되말려 유배당했으며, 필흥(必興)은 공민왕(恭愍王) 때 「옥룡기(玉龍記)」의 도참설을 인용하
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의관과 여자들의 옷을 검은색으로 입게하고, 산에 나무를 심게하여 풍토
(風土)를 순응케 하라는 소(疏)를 올려 이를 시행케하여 명망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 우씨(木川于氏)는 남한에 총, 282 가구, 1,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씨 ( 단양우씨 )
단양 우씨(丹陽禹氏)
단양(丹陽)은 충북 북부, 동단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 혹은 적성현
(赤城縣)으로 신라 때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에 단산(丹山)으로 개칭,
1018년(현종 9)에 원주에 속했다가 충주로 이속되고, 고종 때 고을 사람들이 합단(哈丹)의 난을
물리친 공으로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8년(충숙왕 5)에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에 군(郡)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들어갔다가, 1914년에 군면 폐합에 따라 영춘군(永春郡)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우씨(禹
氏)는 중국 계통으로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후예(後裔)라 전한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우리 나라 우씨(禹氏)의 연원(淵源)은 우 현(禹 玄)이 고려 초 중국에서 건너와 단양(丹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현(玄)은 정조 호장(正朝戶長)을 지냈고,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그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현(玄)의 10세손 현보(玄寶)가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현(玄)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는 단양(丹陽) 외에도 예안(禮安)·영천(榮川)·강주(剛州) 등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세거지(世居地)에 불과하며 현재는 단양 우씨(丹陽禹氏) 단일 본으로 전해진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현(玄)의 6세손인 중대(仲大)가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중대(仲大)의 맏아들 천규(天珪)가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둘째
아들 천계(天啓)가 판서(判書), 셋째 천석(天錫)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는 등 모두 현달하여
가문을 빛냈다. 고려말의 석학(碩學)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역학을 개척한 중대(仲大)의 손자 탁
(倬)은 서릿발같은 기개로 충선왕의 패륜(悖倫)을 극간 하였던 당대의 명신 이다.
그의 호(號) 역동(易東)은「동방에 역학을 처음 들여온 인물」이라는 뜻으로 세인(世人)들이 붙여준 부상함을 다
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고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탁(倬)의 손자 현보(玄寶)는 1355년(공민왕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이 되었으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단양 우씨(丹陽禹氏)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병조 판서(兵曹判書) 등을 지내고 명종(明宗) 때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오른 맹선(孟善)과 선조(宣祖) 때 남인(南人)의 거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전공을 세워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어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성전(性傳),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창적(昌績) 등이 유명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관서(關西) 지방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한 의병장 동선(東鮮), 안중근(安重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덕순(德淳),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만주에 군사학교(軍事學校)를 설립하여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재룡(在龍), 그리고 세계적인 육종학자(育種
學者)로 이름을 날린 장춘(長春)은 단양 우씨(丹陽禹氏)를 빛낸 인물들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남한에 총 36,704 가구, 152,298명이 살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출처 네이버의 지식창에서 kim4767 님의 글 원 출처 : http://www.genealogy.co.kr/soung1.htm
목천 우씨(木川于氏)
목천(木川)은 충정남도 천원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는 목주(木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 태종(太宗)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1913년에 천원군에 속한 면(面)이 되었다.
우씨(于氏)는 중국 하남(河南)에서 계출된 성씨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들이 우(于) 땅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가 후에 우(于)로 고쳤다고 한다. 우리나라 우씨(于氏)는 목천(木川) 단본(單本)이며 고려 중엽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우방녕(于邦寧)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후 그의 아들 학유(學儒)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로부터 난을 일으키고 거사에 가담하
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무신이 전권(全權)을 잡아 잘 된 일이 없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거절
했다. 정중부가 집권한 후 그는 신상이 위태로왔으나 집권층인 이의방(李義方)의 누이와 결혼한
인척관계로 무사했다. 가세(家勢)를 일으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술유(述儒)가 명종(明宗)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으며,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판형
부사(判刑部事)를 거쳐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에 이르렀다. 한편 희정(熙宗) 때 추밀원부사(樞密
院副使)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던 승경(承慶)은 권신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
다 되말려 유배당했으며, 필흥(必興)은 공민왕(恭愍王) 때 「옥룡기(玉龍記)」의 도참설을 인용하
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의 의관과 여자들의 옷을 검은색으로 입게하고, 산에 나무를 심게하여 풍토
(風土)를 순응케 하라는 소(疏)를 올려 이를 시행케하여 명망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
조사 결과에 의하면 목천 우씨(木川于氏)는 남한에 총, 282 가구, 1,2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씨 ( 단양우씨 )
단양 우씨(丹陽禹氏)
단양(丹陽)은 충북 북부, 동단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 혹은 적성현
(赤城縣)으로 신라 때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에 단산(丹山)으로 개칭,
1018년(현종 9)에 원주에 속했다가 충주로 이속되고, 고종 때 고을 사람들이 합단(哈丹)의 난을
물리친 공으로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1318년(충숙왕 5)에 지단양군사(知丹陽郡事)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13년(태종 13)에 군(郡)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들어갔다가, 1914년에 군면 폐합에 따라 영춘군(永春郡)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우씨(禹
氏)는 중국 계통으로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후예(後裔)라 전한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우리 나라 우씨(禹氏)의 연원(淵源)은 우 현(禹 玄)이 고려 초 중국에서 건너와 단양(丹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현(玄)은 정조 호장(正朝戶長)을 지냈고,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그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현(玄)의 10세손 현보(玄寶)가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현(玄)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는 단양(丹陽) 외에도 예안(禮安)·영천(榮川)·강주(剛州) 등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세거지(世居地)에 불과하며 현재는 단양 우씨(丹陽禹氏) 단일 본으로 전해진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현(玄)의 6세손인 중대(仲大)가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중대(仲大)의 맏아들 천규(天珪)가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둘째
아들 천계(天啓)가 판서(判書), 셋째 천석(天錫)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는 등 모두 현달하여
가문을 빛냈다. 고려말의 석학(碩學)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역학을 개척한 중대(仲大)의 손자 탁
(倬)은 서릿발같은 기개로 충선왕의 패륜(悖倫)을 극간 하였던 당대의 명신 이다.
그의 호(號) 역동(易東)은「동방에 역학을 처음 들여온 인물」이라는 뜻으로 세인(世人)들이 붙여준 부상함을 다
음과 같은 시로 남겼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고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탁(倬)의 손자 현보(玄寶)는 1355년(공민왕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이 되었으며, 그의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단양 우씨(丹陽禹氏)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과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병조 판서(兵曹判書) 등을 지내고 명종(明宗) 때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오른 맹선(孟善)과 선조(宣祖) 때 남인(南人)의 거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전공을 세워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이어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한 성전(性傳),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낸 창적(昌績) 등이 유명하였다.
근대 인물로는 관서(關西) 지방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한 의병장 동선(東鮮), 안중근(安重根)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덕순(德淳),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만주에 군사학교(軍事學校)를 설립하여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던 재룡(在龍), 그리고 세계적인 육종학자(育種
學者)로 이름을 날린 장춘(長春)은 단양 우씨(丹陽禹氏)를 빛낸 인물들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남한에 총 36,704 가구, 152,298명이 살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출처 네이버의 지식창에서 kim4767 님의 글 원 출처 : http://www.genealogy.co.kr/soung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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