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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이야기

영산(靈山) 신씨(辛氏)

작성자봄내인|작성시간08.04.13|조회수113 목록 댓글 0
본관 연혁

영산(靈山)은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영산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서화현(西火縣)이라 불리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상약(尙藥)으로 바뀌어 밀성군(密城郡: 密陽)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산현으로 개칭하고, 밀성군으로 병합하였다가 1274년(원종 15)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394년(태조 3)에는 계성현(桂城縣)을 병합하였고, 조선시대까지 명맥이 이어졌다. 취산(鷲山)·취성(鷲城) 등의 별호가 있었다. 1896년(고종 33) 경상남도 영산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영산군이 폐지되고 일부 면은 함안군에 편입되었고, 읍내면이 영산면으로 개칭되어 나머지 6개 면과 함께 창녕군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신씨(辛氏)의 선계는 중국 농서(隴西: 寧州의 속현) 출신으로 중국의 북송(北宋) 때 8성(張·洪·嚴·郭·慶·李·辛·池)이 의형제를 맺고 이름을 모두 “경(鏡)”으로 정하고 고려에 건너왔다는 8학사(學士)의 한 사람인 신경(辛鏡)이다. 신경의 선대 또한 당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엄시랑(嚴侍郞)과 함께 신라에 왔다고 하나, 그 뒤의 세계가 분명하지 않다. 한편 《신씨성관고(辛氏姓貫考)》에 따르면 영주(寧州)는 중국에 없고, 우리나라 영변(寧邊)의 옛 지명이라 하며 신씨가 귀화한 성씨가 아니라고 하였다. 신경은 1138년(인종 16)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정의(貞懿)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살던 중국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천축산(天竺山)과 산세가 비슷한 지금의 창녕 영취산(靈鷲山) 아래에 뿌리를 내려 우리나라 신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 신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으며, 9세손에 와서 영월(寧越)로 분관하였다고 한다.
즉 영산신씨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신천(辛蕆: 신지화(辛至和)의 장자)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德齋公派)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신혁(辛革: 신지화의 차자)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草堂公派),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렬(辛成烈: 신공근(辛恭近)의 아들)을 파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로 갈라졌고, 영월부원군(寧越府院君)에 봉해진 신온(辛蘊: 신지화의 3자)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府院君派)와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지낸 신한(辛{革+漢-氵}: 신지화의 4자)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분적종 및 분파

영산계(靈山系): 덕재공파(德齋公派)·초당공파(草堂公派)·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
영월계(寧越系): 부원군파(府院君派)·판서공파(判書公派)

주요 세거지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후포리
충청북도 괴산군 화평읍 남차리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수당리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경상북도 월성군 강동면 모서리
경상북도 금릉군 아포면 사대동
함경남도 이원군 차호읍 포항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영산신씨는 26,274가구 총 83,79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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