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능성(綾城)은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의 옛 지명으로 백제시대에 이릉부리현(爾陵夫里縣) 또는 죽수부리현(竹樹夫里縣)·인부리현(仁夫里縣)·연주부리현(連珠夫里縣) 등으로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능성군(陵城郡)으로 바꾸고 무주(武州: 光州)의 영현이 되었으며 부리(富里)·여미(汝湄) 등의 현을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능성(綾城)으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 나주의 영현이 되었다가 1143년(인종 21)에 능성현으로 승격하였다.
1416년(태종 16) 화순을 병합하여 순성현(順城縣)이 되었다가, 1418년 화순이 분리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다시 화순을 병합하기도 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능주목으로 승격하였고 이릉(爾陵)이라고도 불리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의 능주군이었고 1896년 전라남도로 개편되었다. 1908년에 화순군이 능주군에 병합되었으나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능주군을 화순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능주군은 폐지되었고, 능주면으로서 화순군(和順郡)에 편입되었다.
성씨의 역사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는 고려시대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을 지낸 구존유(具存裕)이다. 구존유는 1224년(고종 11)에 송나라가 몽골에 패망하자 신안주씨(新安朱氏)의 시조인 청계(淸溪) 주잠(朱潛) 등과 함께 금성(錦城: 나주의 옛 이름)으로 망명해 왔다. 그 뒤 원나라가 이들 망명객들을 추적하자, 그는 구적덕(具積德)으로 이름을 고쳐 능주(綾州: 綾城)에 숨어 지내다가, 함께 은거하던 주잠의 딸과 혼인하여 능성에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능성을 구씨의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한다.
능성구씨는 시조 구존유 이래로 그 후손이 고려 조정에 계속 진출하여 가문의 명성을 높였다. 2세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구민첨(具民瞻), 3세는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지낸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연(具珚), 4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具藝), 5세는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영검(具榮儉), 6세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문정공(文貞公) 구위(具禕)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구흥(具興)과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구의(具義)가 유명하다. 그리고 7세 문절공(文節公) 구홍(具鴻)은 조선의 개국에 협력하지 않고 은둔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분적종 및 분파
《한국의 귀화 성씨》에 의하면 최근 능성구씨는 창원구씨(昌原具氏)와 합하였는데, 창원구씨는 중국인 구람(仇覽)이 선계(先系)이다. 구람의 후손인 구성길(仇成吉)이 고려 혜종 때 귀화하여 1791년(정조 15) 구씨(具氏)로 개칭하였는데, 고려시대에는 창원구씨가 능성구씨보다 인구가 많았다고 한다.
판서파(判書派), 전서파(典書派), 시랑중파(侍郞中派), 좌정승파(左政丞派), 판안동파(判安東派), 도원수파(都元帥派), 낭장파(郎將派), 감무파(監務派), 임천군사파(林川郡事派), 참판파(參判派), 문천군사파(文川郡事派)가 있다.
주요 세거지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능성구씨는 37,706가구 총 120,50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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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수호천사 작성시간 08.10.06 "분적종 및 분파" 중 최근 능성구씨는 창원구씨와 합하였다....................는 사실과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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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봄내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10.06 성씨 공부방에 이 글을 옮겼습니다, 이 글에 대한 자료를 찾아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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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靑龍 작성시간 12.05.13 창원구씨에 대한 위의 내용은 누구에 의해 작성 된 것인지는 모르나 창원구씨 역사에 대한 내용은 맞지 않고, http://cafe.daum.net/kooci의 내용을 참조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반도의 仇氏는 신라왕성(新羅王姓)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구람(仇覽)과는 한반도의 仇姓과는 삼국초기 이전에 분파 된 방계혈족이다. 아시아의 仇姓는 모두 동족이며, 여려 성씨로 분파되어 씨족이 발달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