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우체통 앞에서/ 신현정

작성자빈하루|작성시간22.07.04|조회수19 목록 댓글 0

 

 빨간 우체통 앞에서 / 신현정

 

 

새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냉큼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 껍데기를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 시선집 『난쟁이와 저녁식사를』(북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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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대전 당시 잘 훈련시킨 새의 발목에 내용을 적은 종이나 작은 메시지 통을 매단 통신수단이 흔하게 사용되었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그런 새나 편지나 모두 먼 아날로그 통신수단인 점에서는 동격이라 굳이 은유라고 할 것 까지도 없겠다.

 

 고전적인 통신수단은 요즘 세상의 즉각적인 통신문화와는 달리 이런 망설임이 자주 개입된다. 밤새 편지를 썼다가도 구겨버리고 머리맡에 둔 간밤의 편지를 아침에 다시 읽으면 또 선뜻 봉투에 넣기가 주저되었다. 긴 사연을 담은 편지를 봉투에 넣고 겉봉에 주소와 우편번호까지 확인한 다음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까지 붙이고서도 우체통 앞에서 한 번 더 머뭇거리게 하는 것이 과거의 편지였다.

 

 그만큼 발효의 공정을 거쳤기 때문에 진하고 또 뜨거웠던 것이다. ‘오후 3시’ 우체통이 한창 빨갛게 달아오른 시간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슴 속 설렘은 한층 더 고조되어 주체할 수 없었고 ‘냉큼 발길을 돌려서’ 그냥 돌아서는 어처구니 없는 결단도 감행되었을 것이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만만하게 소통되는 사이가 아니면서도 절절했던 그대는 아마 '첫사랑'쯤 아닐까 짐작된다. 우체통에 넣어야 비로소 부화되고 새가 되어 날아갈 터이지만 아직은 알일 수도 있는 이 편지를 손에 꼭 거머쥐고 있는 이유는 무얼까. 그 편지에는 그대여 사랑하는 나의 그대여 ‘사랑한다.’라는 뜨거운 첫 고백이 뜨거운 마그마의 핵처럼 담겨있었던 건 아닐까. 

 

 안에서는 ‘알 껍데기를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줄탁동시의 때가 아니라 여겼던 게다. 내 안의 사랑은 우체통처럼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현실화된 욕망으로 모습을 드러내기엔 아직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무장무애 잠복된 그 사랑의 온도가 그래서 더 뜨겁게 느껴진다. ‘그냥 왔다’고 반복해서 내뱉는 말이 그 사랑의 여운을 더욱 넓게 퍼지게 하여 우리들 가슴까지 와 닿는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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