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경
유 종 준
1950-60년대는 우리 모두가 가난했다.
봄이면 양식이 떨어져 영양실조로 얼굴이 붓고, 굶어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파란새싹이 돋고 아지랭이 아른거리며 꽃피고 새우는 호시절의 봄을 보릿고개 또는 춘궁기라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는 밥을 먹지 못하여 배가 고파 결석하는 학생, 영양실조 및 목욕을 자주 못해 얼굴에는 마름버짐, 머리에는 헌디(종기)가 난 학생이 많았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아예 학교에 입학도 못하였고 입학을 하여도 1, 2년 다니다가 머슴살이와 식모살이 가는 아이들이 흔했다.
취업할 곳이란 머슴살이, 식모살이, 여관·이발소·목욕탕·철공소자장면집 심부름 동(童)이로 가는 것이 대부분이요, 머슴살이로 받았던 연봉(年俸)을 그 당시는 새경이라고 했다. 새경이란 요즘에는 생소한 단어지만 40여년 전만해도 우리민족에게는 풍요로움과 기쁨을 주는 명사임에는 틀림없었다.
새경(1년 머슴살이로 받는 벼) 이야말로 지금의 대기업 즉 일류회사에서 현금으로 지급되는 연봉과 같다. 새끼(작은)머슴도 2년 정도 수습기간을 지나 나이가 14세쯤 되면 벼반섬(대두 5말)의 연봉을 받게 된다. 또 1년이 지나면 1섬(대두 10말)을 받는다. 이것은 아주 파격적인 연봉 인상이다.
그때는 월급이나 연봉을 올려달라고 쟁의나 파업을 하지 않았다. 새경을 적게 주면 시무룩한 표정에 소마구(외양간)와 뒷간(변소)을 쳐주지 않고 주인에게 인사를 하는둥 마는둥 자기 집으로 가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리 또래의 어린애들은 부잣집에 밥 얻어먹고 1년동안 옷이나 한 두벌 얻어 입고 소 먹이고 소 풀이나 베는 잔일을 하는 새끼 머슴으로 새경을 받지 못했다.
내 친구 춘식이도 집안이 가난하여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머슴살이를 갔다. 옆집에 살았기에 죽마고우였는데 가난 때문에 우린 어 린시절 헤어져야 했다. 내일이면 춘식이와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아 동짓달 긴긴밤을 별빛처럼 지새웠다. 학교도 같이 가고 물장구도 같이치며 송사리도 같이 잡고 버들피리도 같이 불며 진달래·찔레 순도 같이 꺾어 먹고 소풀도 같이 캐며 잔디 위에서 같이 딩굴며 살아온 내친구 춘식이가 머슴살이 간다니 어린 내가슴에 슬픔이 드리워 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겨울 햇살은 그날따라 일찌기 문구멍으로 새어 들어 왔다. 어머니가 해준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춘식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시래기 밥을 먹던 춘식이가 오늘은 하얀 쌀밥으로 아침식사를 끝낸 모양이다.
춘식이가 모처럼 새 검정 고무신을 신고 주인을 따라 머슴살이 떠나던 날 춘식이 어머니와 누나도 울었고 나도 울었다. 춘식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주인 앞서 빠르게 걸어가다가 산모퉁이를 돌기전 뒤돌아보면서 눈물을 훔치고 손을 흔들었다. 그 해 춘식이는 주인 말을 잘듣고 부지런하다고 새경을 벼 10통 1섬(대두 10말)을 받았다. 첫 새경을 받아 금의환향 하던 날 마을어귀에 들어서자 마자 "어머니 나 새경 10통 1섬 받았어"쾌성을 지르며 달려왔단 춘식이의 늠늠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내가 알기로는 새경을 제일 많이 받았던 사람은 옆 마을의 "권질도"라는 아저씨였는데 10통 10섬(대두 100말)의 연봉이었다. 질도 아저씨는 워낙 일을 잘했기에 별명이 탱크였다. 힘도 세고 부지런하고 일머리도 잘 틀었다. 그 아저씨는 그때 새경을 많이 받는 사람으로 혼인 상대가 많았다고 들었다. 질도 아저씨는 처 자식을 누님 댁 아래채 방(마굿간 채에 붙어있는 방)에 접방살이를 두고 머슴살이를 하였다. 그때 대다수 청년들은 보통 10통 8섬(대두 80말)을 받았다.
우리 마을에 꾀가 많은 풍문 어른은 10통 8섬짜리가 못되면 9통 8섬(대구 72말)을 주어 같은 8섬 받은 기분을 들게하고 같은 대두 80말이라도 8통 10섬을 주게 되면 10섬 받은 샘이니까 머슴이 기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새경은 참 공정하게 정해졌다고 생각된다.
우리집에도 일손이 모자라 머슴을 한사람 데렸다. 가을일을 다마친 동짓달이 되니 아버지께서 할머니, 어머니, 삼촌과 머슴 새경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을 보았다. 가족회의에서 1년 동안의 여러 가지 능력평가를 한 후 10통 7섬(대두 70말)을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저녁식사 후 동네 어른들이 많이 모이는 이웃집 사랑방으로가 우리집 머슴의 새경에 대한 안건을 슬쩍 내 놓게되면 동네 어른들은 아버지께서 제시한 7섬에 대하여 많다 적다등의 의견이 오가다 적당한 결론이 난다.
이렇게 새경에 대해서는 맣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해야 머슴도 불만이 적고 동네 뿐만 아니라 이웃마을에 까지도 인심 나쁘다는 비판을 받지 않는다. 정말 정확한 심사를 거친 성과급 제도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연봉책정이 정확하니까 서로 믿고 사전 연봉계약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시비가 없었다.
그 시절은 새경의 양으로 남자의 능력 여부를 판가름 했기에 혼인도 새경의 량에 따라 높낮이가 정해졌다. 그다음 해에 풍문어른은 홍수라는 24살의 총각 머슴을 두고 있었는데 일머리를 잘 틀고 일 솜씨도 있었으나 힘이 좀 약한 편이였다.
그해 새경을 주었는데 9통 9섬(대두 81말)을 주었다. 실제는 10통 8섬(대두 80말)보다 1말이 많았지만 본인의 기분은 대단했다. 홍수 아저씨는 풍문어른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고 마굿간이랑 뒷간을 깨끗이 쳐주고 떠났다. 그 해 동짓달에 혼인이 성사되어 동짓달 긴긴 첫날밤을 가지게 되었다.
아랫마을의 신호댁에 해식이라는 총각이 머슴을 살았는데 건장하고 일도 잘하며 동네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워 10통 9섬을 받고 그 집에 한 해 더 눌러 있게 되었다. 신호댁 옆집에 순애라는 예쁜처녀가 있었는데 10통 9섬 받은 해식총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파랑새 담배 한 값과 가지베를 색실로 수복(壽福)자를 수놓은 손수건을 몰래 신호댁 돌담 사이에 넣어 전했다.
선물을 받은 해식총각은 순애처녀에게 동동구루모(북을 치며 팔러 다니는 크림)한 통을 선물 했다. 그런데 착하고 예쁜 순애를 오래도록 처녀로 두지는 않았다. 늦가을부터 많은 혼담이 오고 갔다. 우리마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넉넉한 집안의 청년과 혼담이 성사되어 사성(四星)이 오가는 중에 해식 총각은 순애처녀에게 받았던 선물을 자기가 거처하던 사랑방의 장방(벽에 붙어 물건을 넣을 수 있도록 만든 공간)에 간직하여 두었다가 "순애는 나하고 연애했다. 내 사람이다."라며 증거물로 파랑새 담배와 손수건을 내 보이면서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이 아카시아 꽃내음처럼 퍼져나가 결국은 순애처녀 집은 큰 망신과 파혼이 되었고 해식총각과 순애 처녀는 바로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하였다.
하여튼 새경을 9섬 이상 받은 총각이면 늦가을부터 설·보름을 전후하여 중매가 많이 오고 간다. 홍수·해식총각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학벌, 키, 외모, 맏아들, 층층시하(부모와 조부모가 살아 계시는 것) 등을 따지지 않았다. 그때의 청년들은 낡은 옷에 짚신을 신고도 어깨를 쭉 펴고 다녔고 기죽은 남자의 표정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새경이 연봉인 그 시절은 인정이 넘치고 마음의 풍요가 있었으며 자부심도 대단했다.
그런데 농경시대에서 산업시대로 변천됨에 따라 우리의 풍습과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새경을 받는 청년들은 장가 가기가 어렵게 되었고 처녀들은 너도나도 남편 월급받아 연탄불에 냄비밥을 해 먹는 것이 최고의 결혼 목표였다.
내친구 춘식이도 10통 5섬의 새경을 받다가 어느날 부산의 중국집에 취직되어 갔다. 얼마를 받았는지 몰라도 여섯달 지난후 추석때는 통실통실 하얗게 살이찐 얼굴로 옷도 세련되게 입고 말씨도 시골 사투리가 아니었다.
동네 처녀들의 눈빛이 머슴살이 하는 철영이로부터 떠나 중국집의 춘식이에게로 쏠였다. 1970년대 초부터는 새경 받는 머슴살이를 뒤로하고 모두가 도시로 떠났고 "새경"이란 용어도 우리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새경을 받던 그 시절에는 노동쟁의·파업이란 용어가 존재할 수 없었다. 머슴이 마음이 상하면 하루 휴가를 얻어 집에 다녀오거나 몸이 아프다고 하루 일하지 않고 초당방에 누워 있거나 논갈이 하면서 주인네 소를 말 잘 안듣는다고 몇찰 더 때리는 것이 고작이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몇일씩 파업을 하며 머리와 어깨에 붉은 띠를 두르고 고성을 지르며 돌과 몽둥이가 오가니 세상살이가 많이 변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 했지만 마음은 풍요로왔고 물질적으로 주고 받음이 없어도 인정이 넘쳤던 그 시절이 우리에게는 정말 아름다웠고 가슴속에는 언제나 포근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친구 춘식이는 부산에서 중국집 사장이 되어 직원 2명을 거느리고 부인과 함께 분주하게 자장면이랑 우동을 만들고 있다. 제법 성공한 셈이다. 또 해식·홍수아저씨는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지… 혹시 붉은 띠를 두르고 파업을 하고 있지나 않을까 아니면 퇴직하여 옛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10통 10섬의 새경을 받았던 탱크 별명의 질도아저씨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무척이나 보고 싶다. 9통 10섬, 10통 10섬의 새경을 받는 일꾼이 필요로 하는 농촌 들녘에는 숨가쁜 기침 소리의 고령화된 농촌을 슬프게 한다.
우리 다시 모여 찌든 마음을 훌훌털고 "새경"을 받던 그때의 넉넉한 마음의 삶으로 돌아가서 서로 믿고 성실하게 살아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