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 양반 왕자지/ 이대흠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쯤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과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왕자 거튼 사램이었제 시집 - 『귀가 서럽다 』(창비, 2010) ................................................................................................................................................ 오래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야당 총재시절 그의 ‘갱상도’ 사투리가 워낙 유명했던지라 측근 비서들이나 기자들과 이와 관련한 농담을 가끔씩 주고받았다고 한다. 하루는 어느 기자가 물었다. "총재님 경상도 말로 '갑자기'란 말을 뭐라 그러지요?" 김 총재는 한참을 생각해도 그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각중에 물으이까네 나도 마 잘 모리겠네" 이 시에서의 수문댁도 예순 넘어 한글을 배우긴 했지만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하고 ‘쎄바닥’이 여간 엉키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마치 과거 영국인들의 16진법으로 잘 써오던 일상이 10진법으로 갑자기 바뀌면서 겪는 혼란처럼. 그런데 아마도 먼저 간 영감을 겨냥하고 누가 그전에 써놓았지 싶은 변소 옆 낙서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다는데, 그래서 ‘왕자 거튼 사램’이라 읽고 먼저 간 남편을 하늘같은 사람으로 왕자 같은 사람으로 받들어 추억하긴 했는데 실은 그 또한 아름다운 오역이 아니었던가. 익숙하게 써왔던 말이 사투리든 외래어든 바르게 고쳐 사용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벤또’를 도시락으로, ‘다꾸앙’을 단무지로 바꿔 말하기는 그다지 큰 저항이 아니었는데 ‘오뎅’은 어묵꼬치가 아니라 여전히 ‘오뎅’으로 불러야 실감나고 제맛이 난단다. 우리의 김치가 그들에게 ‘기무치’가 아니라 ‘김치’라 불리기를 기대한다면 뭐 그것까지는 이해한다 치자. 하지만 어원도 의미도 모른 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왜색낱말은 좀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18번’ 따위가 그러한데, 이는 에도시대에 일본 고유 연극인 ‘가부끼’를 하던 한 가문의 잘하던 레퍼토리가 18가지인 것에서 비롯된 말로 가장 잘하는 장기의 의미로 통용하고 있다. 적어도 사투리 보다는 그런 말 함부로 쓰는 것을 훨씬 부끄럽다 여겨야 하지 않을까. 권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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