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를 지피며
남 명희
잎새들은 때때로 뿌리를 잊어버린다.
여름을 덮던 무성한 나뭇잎이 태양조차 막을 듯 위세를 떨칠 때, 뿌리는 땅속 깊이 아픈 발을 내리며 자양분을 빨아 올려 아낌없이 나눠 준다.
나는 지금 오십여 년 전의 어린 잎새가 되어 뿌리를 찾아 떠난다.
불의 변화와 더불어 세상이 변해 가는 길을 따라서.
한반도에 불의 시대가 최초로 열린 것은 9000만 년 전이라고 추측한다지만 나는 내가 경험하고 느낀 불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내가 처음으로 본 불씨는 짚불이었다. 화르르 마른 짚불은 금방 타오르고 사그라졌다. 잇달아 짚을 넣어줘야 하기 때문에 밥이 다 될 동안 아궁이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밤새 엄마 품을 파고들던 어린 딸이 엄마를 부르다가 부엌으로 내려왔다. 딸의 두 손을 꼭 쥐어 아궁이의 불을 쬐어주는 엄마의 얼굴이 불빛에 익어 발그레하니 참 고왔다. 이윽고 가마솥의 밥물이 잦아지고 구수한 밥 냄새가 나면 짚불을 화로에 꼭꼭 눌러 담아 다독여서 시아버지 방에 넣어 드렸다.
동란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시자 신 새벽 첫 두레박의 물로 아들의 무사귀환을 비시던 할머니가 우물가에 쓰러져서 두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마저 병환이 들어 자리보전을 하고 누웠다. 가세가 기울고, 나무를 해 올 사람이 없어서 장작은 땔 엄두도 못 냈다. 짚으로 밥뿐만 아니라 잿물을 내려 빨래를 하고 군불을 넣었다. 짚불은 타고 남은 재가 사방에 새까맣게 날려서 뒤처리도 만만찮았다. 병든 시아버지와 어린 딸을 키우고 사는 청상의 어머니 가슴에도 새까만 재가 쌓였으리라.
지루한 장마철이 되면 젖은 짚불에서 나는 매캐한 연기로 모녀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치마를 뒤집어 딸의 얼굴을 닦아주며 눈물을 흘리고 나면 속이 좀 시원해진다던 어머니. 드러내 놓고 울지도 못하고 마른 날보다 젖은 날이 더 많았을 삶의 애환을 불씨처럼 속으로 다독이며 삭혔을까.
60년대 말쯤 짚불에서 해방되었다. 연탄이 들어 온 것이다. 연탄불은 악마의 불이라고도 했다. 밥을 할 때나 군불을 넣을 때마다 아궁이 앞에 장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는 불편과 번거! 로움이 없어진 대신 연탄가스를 마시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모녀도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비바람이 몹시 불고 전기가 나간 어느 날, 칠흑 같은 어둠속에 누웠을 때, 염소우리에서 염소가 죽는 소리로 울부짖고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우리 모녀는 부들부들 떨며 손에 땀이 날 정도로 부지깽이를 꼭 쥐고 우리로 다가갔다. 머리를 산발한 미친 듯한 여자가 추워서 염소를 끌어안으려고 하고 염소는 달아나려고 발버둥을 치며 내는 소리였다. 그 여자를 방에 데려와 어머니 옆에 눕게 했을 때 나는 싫고 무서워서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한참 단잠이 들었을 한밤중에 가려움을 참지 못해 일어나니 머리가 아프고 구토가 나려했다. 방에서 안 나오려고 떼쓰는 여자를 겨우 마루로 데려 나와서 우리는 동치미 국물을 한 사발씩 들이마시고 마루에 쓰러졌다가 깨어났다. 그 여자가 옮긴‘이’란 놈이 우리를 살렸던 것이다. 작은 베풂이 큰 보상을 받은 것이다.
연탄불은 아래위의 구멍을 잘 맞춰야 잘 붙고 잘 탔다. 시간도 잘 맞춰야 꺼지지 않았다. 여유와 멋의 생활에서 맞춤의 시대가 되었다. 옷도 한 벌로 여러 사람이 허리끈이나 옷고름을 당기거나 늦춰서 번갈아 가?! ? 입을 수 있었던 한복에서, 자기 몸에 맞는 교복이나 양복을 입게 되었고, 의복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로 이어 졌다.
바야흐로 핵가족시대 개인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산업화의 물결이 일자 공장으로, 버스차장으로, 학교로 가난을 벗어나려는 꿈을 찾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났다. 처음에는 사흘이 멀다 하고 오던 자식들의 편지가 뜸해 지더니 소식이 없을 때가 많아졌다. 젊은이의 활기찬 소리와 아기의 울음소리,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없는 마을은 추수가 끝난 휑한 들판처럼 찬바람이 불었다. 어버이들은 외로움에 시달렸고, 무겁고 익숙하지 않은 연탄 갈기에 힘든 나날이었다.
70년대 초에 대구로 시집을 왔다. 시어머니는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셨다. 전기 한 등, 물 한 방울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시아버지가 석유회사 중역으로 계셨지만 꼭 필요할 때 외에는 석유곤로를 사용하지 않았다.
연탄불 조절을 못해서 나는 걸핏하면 삼층밥을 지었다. 살림에 서툰 나는 시어머니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세제 대신 쌀뜨물을 이용하는 방법과 음식찌꺼기를 나무 밑에 묻어서 거름을 하는 것, 옷의 종류와 더러움에 따라 순서 대로 빨래를 하는 방법과 헹구고 난 물로 청소를 하는 것, 손님 치르는 방 법이며, 손님이 몇 명이냐에 따라 음식량을 조절하는 법 등등.
연탄재는 모아 놓았다가 비오고 난 후의 질척한 길에 뿌렸다.
매사에 너무 빈틈없는 분이라 사소한 실수에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서 힘들 때도 많았다. 한번은 祭需(제수)에 쓸 문어를 삶으라고 하셨다. 시킨 대로 물에 소금을 조금 넣고 물이 팔팔 끓을 때 문어를 넣고 삶았는데, 설 익을까봐 너무 삶은 탓에 색깔이 곱지 않고 얼룩덜룩해져버렸다.
“이걸 제상(祭床)에 어떻게 올리느냐, 정성이 부족하다. 문어 삶는 구경도 못해 봤느냐? 석유는 또 얼마나 낭비를 했느냐?” 제수에 남달리 신경을 쓰시는 분이라 화가 나셨겠지만, 문어를 볼 때마다 되풀이 하시니, 잘 삶아보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던 터라, 참던 나도 은근히 화가 나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나, 실수나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어디 있다고 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혼을 지나 시집살이에 웬만큼 때가 묻었을 때쯤, 나도 간이 부어서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계속되면 대꾸를 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싸움이 되었다. 싸우고, 화해하고 하는 사이에 차츰 서로에게 길들여져 갔다. 길들여! 져 간다는 것이 예전처럼 위아래 수직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으로 대등한 관계였다. 고부 갈등이 줄어들었고, 시어머니와 같이 시장에 가면 모녀로 보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맞춰가는 관계가 되기까지 10년 세월이 걸렸다.
모든 인간관계가 상대방을 인정해 줌으로서 원만해 진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난방도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뀌었다. 아궁이에서 방구들로 타 올라가던 것이 방바닥에 관을 수평으로 놓는 보일러가 된 것이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라 연탄아궁이가 네 개나 있어서 전에는 연탄 갈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한곳에서만 연탄을 갈아 넣으니 아주 편리했다. 편리하면 더 편리한 것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부엌도 입식으로 바꾸었다. 방에서 계단을 두 개 내려가야 했던 부엌은 비가 많이 올라치면 바가지로 부엌바닥의 물을 퍼내어야 했는데, 그런 불편에서 헤어났다. 일일이 데워 써야 했던 더운 물도 수도꼭지만 틀면 줄줄 나왔다. 주방기구도 발전하여 밥도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가사 일에서 해방된 주부들에게 서서히 자아실현의 꿈이 싹트게 되는 시기였다. 나도 직장을 가지려고 ! 나서다가 집안 식구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주저앉았다. 아이들이 한창 엄 마 손을 필요로 하는 때이기도 했지만 가정의 평화가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90년대에 연탄에서 해방되었다. 기름보일러가 집에 들어 온 것이다. 매일 한두 번 갈아 넣어야 하는 연탄에서의 해방이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한두 달에 한 번 정도 기름차를 불러 기름을 보충해 주면 되었다. 나는 199번 아줌마가 되었다. 기름을 넣어 주는 주유소에서 고객관리 차원에서 부쳐준 번호였다. 경쟁시대에 돌입하여 회원관리에 눈을 돌린 것이다. 주소와 약도까지 번호 밑에 입력해 놓았는지 주유소에 전화해서 199번인데요 하면 위치도 묻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우후죽순처럼 주유소가 생기고, 기름, 보일러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양산(量産)의 시대, 소비자의 선택이 다양해진 만큼 기름장사도 속도와 전략이 필요해진 모양이다. 엄청나게 기름소비가 늘어난 것도 이때다. 집은 없어도 차는 사야하는 마이 카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2000년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는 시대랄까.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주택에서처럼 기름차를 부를 필요도 없고, 스위치만 켜면 되는 가스보일러를 사용하게 되었다. 색다른 반찬을 해먹고 싶어서 인터넷에서 식구들이 다 좋아하는 탕수육을 한글 그대로 탕수육 검색을 했더니, 재료에서 만드는 방법까지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다. 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정보도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볼 수 있다. 안방에 앉아서 세상의 다양한 정보를 다 볼 수 있으나,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선택에 혼란이 생긴다. 지식도 필요하지만 경험과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아파트에 이사 와서 일반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다 차지 않은 채 버려진 규격봉투에 우리 집 쓰레기를 채워 넣으니 봉투 값이 절약되었다. 음식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도 놀랐다. 과일과 고기가 통째로 버려져 있는 것이었다. 상하기 전에 이웃과 나눠먹기라도 할 것이지.
매연이 대기를 오염시키듯 환경이 오염되고 인정도 메말라가는 풍토가 되어 가는가.
바위에 이끼를 감듯 연륜을 휘감고 가는 세월이, 지난날을 돌아보는 나를 안타깝게 한다.
30여년 모시던 시어머니가 올 봄에 돌아가셨다. 그동안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많은 의지와 위로가 되었는데, 내가 며느리를 보고 시어머니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만하니 그만 잠자듯이 가셨다. 내가 이만큼이나마 살림을 꾸려가게 된 것도 시어머니께서 몸소 실천하고 가르쳐주신 것을 보고 배운 영향이 크다. 거실의 가족사진에서 웃고 계시는 시어머니를 뵐 때면 갖가지 추억과 그리움이 밀려오고, 잘못했던 일로 마음이 괴롭다. 아무리 후회해도 돌이킬 길이 없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가 고향에 계실 때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명절이나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만 고향을 찾는 딸을 아픈 허리 감추며 이것저것 챙겨 먹이려던 어머니. 쌀이며 호박, 감자, 감, 콩 등을 싸 주시던 어머니의 굽은 손이 나무뿌리 같았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한 집에 모셔야하는 불편함과 미안함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병이 드신 후에야 어머니를 모셔 온지, 일 년도 채 안 돼서 돌아가셨을 때의 후회와 아픔을 어떻게 말로 다하랴.
얼마 전에 친정어머니의 기일을 맞아서 고향에 다녀왔다. 친정집에는 숙모가 내려와서 살고 있는데, 기름 값이 비싸서 보일러를 끄고 작은 전기장판만 사용하고 계셨다. 그 위에서 대소가 친척들과 옛날처럼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요즘 기름 값이 올라서 난방을 하지 못하고, 전기장판도 없이 추위에 떨며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불씨처럼 우리들의 가슴속에 묻혀있는 인정을 지펴서 겨울 동안만이라도 아래 윗목이 없이 골고루 따뜻한 방에 부모님을 모시고 오순도순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유해물질이 없는 폐자재나 나무를 연료로 할 수 있는 보일러를 더 편리하게 개발해서 보급했으면 좋겠다.
불의 역사는 여자의 역사에 가깝다. 여자 중에서 어머니보다 더 위대한 이름이 있는가. 신이 세상을 만들고 모든 곳에 임할 수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한다. 나부터 아름다운 세상, 공해가 적은 세상을 만들고 가꾸는 일에 일조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