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아는 생명 (빌립보서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한 인간이 종교적 열심의 정상에서 내려와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을 때 비로소 터져 나오는 영혼의 가장 깊은 탄식이며, 동시에 가장 높은 찬송입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이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미 교회를 세웠고, 옥에 갇혔고, 매 맞았고, 바다와 광야와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을 지나왔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여.” 여기에는 이상한 역설이 있습니다. 이미 아는 자가 더 알고자 합니다. 이미 붙잡힌 자가 더 붙잡히고자 합니다. 이미 은혜 안에 선 자가 더 깊은 은혜의 심연 속으로 내려가고자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한 번 손에 넣고 주머니 속에 넣어 두는 종교적 소유물이 아닙니다. 신앙은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부르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어제 들은 말씀을 오늘 다시 듣고, 오늘 붙든 십자가를 내일 또 다시 붙드는 영혼의 거룩한 떨림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기 인생의 이력서를 펼칩니다. 그는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자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여길 만큼 자기 시대의 종교적 정상에 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쌓을 수 있는 종교적 탑의 높은 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다메섹 길 위에서 그를 찾아오셨을 때, 그 모든 탑은 한순간에 그림자처럼 무너졌습니다. 빛이 임하자 자랑은 재가 되었고, 영광이라고 붙들었던 것은 배설물처럼 보였고, 의라고 믿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의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보이는 것과 시간적인 것에 손을 뻗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사라지고, 시간적인 것은 낡아지고, 손에 잡힌 모든 것은 마침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인간은 자기 이름을 기념비처럼 세우고, 자기 의를 면류관처럼 쓰고, 자기 열심을 제단 위에 올려놓지만, 하나님의 빛이 비치는 순간 그것들은 모두 무가치의 법칙 아래로 들어갑니다. 영원의 한 방울이 시간의 바다보다 무겁고, 은혜의 한 줄기 빛이 인간 업적의 천 개 탑보다 높습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한다”고 말할 때,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γνῶναι, 그노나이라는 말은 머리의 지식만이 아니라 인격적 만남, 생명을 건 사귐, 존재 전체가 상대 안으로 들어가는 깊은 앎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더 많은 자료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 자신을 원했습니다. 그는 교리의 외곽을 도는 사람이 아니라, 교리의 심장부에서 피 흘리시는 주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설명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영원한 마음에 삼켜지고 싶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지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시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인간의 완전한 응답으로 서시며,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최종 대답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부록이 아니라 삶의 전복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새 창조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손에 들 수 있는 가능성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끝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열어 주신 불가능한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를 이용하려 합니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주님을 통해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말하면서도 십자가를 우회하여 더 많은 것, 더 높은 것, 더 편안한 것, 더 풍요로운 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높인다고 말하지만 그 높임의 중심에 은근히 자기 자신을 세워 둡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도 자기 의가 숨어 있고, 우리의 봉사 속에도 인정받고 싶은 목마름이 숨어 있으며, 우리의 경건 속에도 남보다 낫다는 은밀한 교만이 그림자처럼 따라옵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위로하기 전에 먼저 폭로합니다. 은혜는 달콤한 장식품이 아니라, 인간의 거짓된 의를 십자가 앞에서 해체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인간의 어떤 의도 자기 안전의 보증서가 될 수 없습니다. 율법적 행위는 우리에게 마지막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도리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영과 육 사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깊은 심연 앞에 우리를 세울 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심연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건널 수 없는 곳을 주님이 건너오셨습니다. 우리가 오를 수 없는 거룩의 산을 주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심판의 불을 주님이 자기 몸으로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며, 하나님께 올라가신 완전한 인간의 순종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진 사이에 세워진 은혜의 다리입니다. 그 다리는 인간의 공로로 놓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놓였습니다. 그 다리 위에는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어린양의 상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모든 자랑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자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의는 빛나는 옷처럼 보여도 결국 죽음 앞에서 찢어지는 천 조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시는 창조적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하늘이 갈라지고, 무덤이 입을 벌리고, 어둠은 물러가고, 죽음의 법정 안에 생명의 판결이 울려 퍼집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할 뿐 아니라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권능은 헬라어 δύναμις, 뒤나미스입니다. 이것은 단지 강한 감정이나 종교적 흥분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질서를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능력입니다. 부활은 봄날의 상징이 아니라 역사의 중심을 갈라 놓은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부활은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막연히 계속 존재하기를 바라는 희미한 소망이 아닙니다. 부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음을 이기시고,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꺾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첫 열매로 일어나신 사건입니다. 부활 가운데 성령의 새 세계가 육의 옛 세계를 접촉합니다.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고, 생명이 무덤 안에서 꽃피고,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의 상처 난 자리 위에 빛처럼 내려옵니다.
우리는 죽음을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죽음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현장에 와 있습니다. 죽음은 인생 끝에만 서 있는 낯선 손님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의 시간 속에 이미 깊이 스며 있는 가장 무거운 법입니다. 젊음 속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있고, 성공 속에도 사라짐의 냄새가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슬픈 예감이 마음 한편을 적십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유한성을 어느 날 반드시 경험합니다. 죽음은 우리의 시간을 박탈하고, 우리의 계획을 중단시키며, 우리의 자랑을 침묵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죽음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만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죽음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은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라는 현상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참으로 소망해야 할 것도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시고, 썩을 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죽을 것을 죽지 아니할 것으로 입히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권능은 장례식장에서만 필요한 진리가 아닙니다. 부활의 권능은 오늘 낙심한 마음이 다시 일어나는 능력이며, 죄에 매인 영혼이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 능력이며, 실패 속에서 자기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십자가 앞에서 다시 시작하는 능력입니다. 부활은 먼 훗날의 위로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새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종교적 심리요, 우리의 설교는 아름다운 언어의 비극이며, 우리의 예배는 죽음 앞에 잠시 켜 두는 촛불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기에 우리의 눈물은 헛되지 않고, 우리의 회개는 길을 얻고, 우리의 고난은 의미를 얻고, 우리의 죽음은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합니다. 부활의 아침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기에, 성도는 아직 밤을 지나면서도 빛을 품고 걷습니다.
바울은 놀랍게도 부활의 권능을 말한 뒤 곧바로 “그 고난에 참여함”을 말합니다. 우리는 대개 부활의 능력은 원하지만 고난의 참여는 피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영광의 면류관은 원하지만 가시관의 길은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능력은 십자가를 우회하여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없는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빈 무덤은 골고다의 피를 통과한 뒤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고난에 함께 연합되는 것입니다. “참여함”이라는 말에는 헬라어 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의 깊이가 배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멀리서 동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나누고, 함께 속하고, 함께 짐을 지는 사귐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속을 완성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단번에 완전한 구속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피를 보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었기에, 세상이 미워한 주님의 길을 우리도 사랑으로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의미 없는 불행이 아닙니다. 그 고난은 때로 우리의 교만을 꺾는 은혜의 손이 되고, 때로 우리의 거짓된 의지를 녹이는 거룩한 불이 되며, 때로 우리가 붙들던 우상을 놓게 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흔들림이 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얻으신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 우리를 더욱 깊이 그리스도께로 이끄십니다. 고난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그리스도와 더 깊이 사귀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 속에 홀로 던져 두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분이 우리의 눈물 속에 먼저 와 계십니다. 우리가 병상에서 밤을 지새울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우리가 실패와 수치 속에서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때, 그곳은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서 계시는 자리입니다.
어느 목회자가 병원 심방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섬기던 한 성도가 말기 질환으로 거의 말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병실 안에는 기계음만 작게 울리고, 창밖의 저녁빛은 침대 곁으로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목회자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괜찮아질 것입니다”라는 말은 너무 가벼웠고, “힘내십시오”라는 말은 너무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그 성도가 마른 손으로 성경을 가리켰습니다. 펼쳐진 곳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라는 말씀이 밑줄 그어져 있었습니다. 성도는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습니다. “목사님, 이제야 이 말씀이 조금 보여요. 예수님이 나를 이 병상까지 따라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여기 계셨네요.” 그 말 앞에서 목회자는 더 이상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병실은 슬픔으로 가득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슬픔 한복판에서 죽음보다 깊은 평안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성도는 죽음을 낭만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없다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 두려움보다 더 가까운 주님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이것이 고난에 참여하는 성도의 신비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성도는 죽음을 숭배하지 않고, 죽음을 넘어 생명의 주를 바라봅니다.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본받아”라는 표현은 단순한 모방이 아닙니다. 헬라어 συμμορφιζόμενος, 쉼모르피조메노스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형상과 같이 빚어져 간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이것은 겉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틀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의 말투를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 아래서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새 형상으로 새겨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자기 중심의 형상으로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상처를 받으면 자기 방어의 성을 쌓고, 인정받으면 자기 영광의 탑을 세우고, 실패하면 자기 연민의 늪에 빠지고, 성공하면 자기 의의 왕좌에 앉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은 이 모든 옛 형상이 십자가에서 해체되고, 낮아지신 주님의 형상으로 다시 빚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가 장식되는 자리가 아니라 죽는 자리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자기 의를 제출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나는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변명을 멈추게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줍니다. 죄가 가벼웠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피 흘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랑이 작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그 자리까지 내려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심판의 가장 어두운 밤이면서 은혜의 가장 찬란한 새벽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죄를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고, 죄인을 버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곳에서 거룩과 사랑이 서로 입 맞추었고, 공의와 긍휼이 한 몸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은 자기 의를 내려놓는 삶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도 마음속에 작은 계산서를 들고 갑니다. “주님, 제가 이만큼 기도했습니다. 제가 이만큼 참았습니다. 제가 이만큼 봉사했습니다. 제가 이만큼 손해 보았습니다.” 물론 기도와 인내와 봉사와 헌신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 대신 우리의 의가 되는 순간, 그것은 향기가 아니라 연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건한 포장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가면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연출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 거룩한 표정을 지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여전히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있는 마음을 보십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언제나 회개로 시작됩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회개이며,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가난하게 된 사람의 새 방향이며, 예수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의 거룩한 전환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절망이 아닙니다. 회개는 은혜의 문입니다. 자기 의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는 길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비로소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의 영광을 잃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자기 의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었습니다. 자기 성취의 왕좌에서 내려와 십자가 아래 무릎 꿇었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높은 신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복입니다. 세상은 올라가야 산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십자가 아래 내려와야 산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너를 위해 증명하셨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강해야 버틴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 없이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우리의 계획이 중심이 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지만 어느새 행위로 자신을 평가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찬송하지만 작은 손해 앞에서는 분노하고,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작은 실패 앞에서는 인생이 끝난 듯 무너집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이 땅의 인정과 안정과 풍요가 흔들릴 때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이 작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아직도 보이는 세계를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는 허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는 세계가 지나가는 그림자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이 영원한 실재입니다. 한 방울의 영원이 시간의 망망대해보다 더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보이는 세계의 논리에 균열을 내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이 최종 현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간 속을 걷지만 시간이 전부라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만 죽음이 왕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과하지만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을 취소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에 보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성도의 영광을 다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도 아직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의 깊이를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은 눈물로 씨를 뿌리지만, 그날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지금은 무릎으로 길을 찾지만,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주님을 볼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구원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에 떠는 고백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거룩한 갈망입니다. 이미 붙잡힌 사람이 더 깊이 붙잡히고 싶어 하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해 온 존재를 던지는 순례자의 고백입니다. 성도는 부활을 자기 힘으로 쟁취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은혜로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 은혜는 우리를 게으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참 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달려가게 합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졌지만 값싼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의 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였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더 이상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로 죽은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내면의 선함을 조금 닦아 하나님께 도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는 죄로 기울어져 있고, 우리의 지성은 어두워져 있으며, 우리의 사랑은 자기 중심으로 굽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성령께서 죽은 마음을 살리셨습니다. 믿음조차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신 은혜의 손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마치 죽은 흙 위에 봄비가 내려 씨앗을 깨우듯, 성령은 죽은 영혼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우리를 현실에서 도피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이 들어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가정에서 다르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직장에서 정직을 선택합니다. 상처 준 사람을 향한 분노의 칼을 내려놓고, 용서의 길 앞에서 울며 기도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실패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며, 자기보다 약한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모두 은혜 아니면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겸손은 우리를 사랑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수록 우리는 더 부드러워지고, 더 용서하게 되고, 더 진실해지고, 더 낮아집니다. 은혜를 많이 아는 사람은 남의 약함 앞에서 쉽게 돌을 들지 않습니다. 자신도 십자가의 피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권능을 아는 사람은 절망의 언어를 마지막 언어로 삼지 않습니다. 그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픔을 모르는 척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믿음 없는 것으로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눈물 속에서도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저는 지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저는 지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십니다. 저는 지금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덤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믿음은 어둠을 어둠이라 부르면서도 그 어둠보다 깊은 하나님의 빛을 붙드는 것입니다. 믿음은 절벽 앞에서 스스로 날개가 있다고 허세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누구에게나 쉽고도 어렵습니다. 쉬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이유는 그 은혜 앞에서 우리의 모든 자랑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에게도 믿음은 어렵습니다. 자기 지식의 왕좌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에게도 믿음은 어렵습니다. 자기 소유의 안전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사람에게도 믿음은 어렵습니다. 자기 경건을 의로 삼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처 많은 사람에게도 믿음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닫아 두었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업적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새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똑같이 불가능하기에, 하나님께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을 알고자 합니까. 더 많은 세상 지식을 알고자 합니까. 더 많은 성공의 기술을 알고자 합니까. 더 안전한 미래의 비결을 알고자 합니까. 물론 지혜는 필요하고, 성실한 삶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앞에 무릎 꿇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자기 죽음의 문 앞에서는 아무 권한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을 관리한다고 말하지만, 시간 자체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생명을 연장하려 하지만, 생명의 근원을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갈망하지만, 자기중심성의 감옥에서 참사랑을 스스로 생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단지 종교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나의 죄를 위한 십자가임을 알아야 하고, 그분의 부활이 나의 소망의 첫 열매임을 알아야 하며, 그분의 고난이 내 고난의 가장 깊은 위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시간 속에 오신 영원입니다. 그리스도는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심장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언어로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거룩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한복판에 서신 생명입니다. 그분 안에서 심판 가운데 무죄선고가 울려 퍼지고, 시간 가운데 영원이 비치며, 죽음 가운데 새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 모든 복음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터를 두고 있습니다. 복음은 다른 진리들 곁에 조용히 놓인 또 하나의 종교적 의견이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인간의 진리 주장들을 하나님의 질문대 앞에 세웁니다. “너는 무엇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느냐. 너는 무엇을 붙들고 죽음을 통과하려 하느냐. 너는 무엇을 너의 주로 섬기고 있느냐.” 이 질문 앞에서 인간의 모든 대답은 떨립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침묵을 말합니다. 왜 하나님이 내 고난 앞에서 침묵하시는가, 왜 하나님이 이 세상의 불의 앞에서 즉시 말씀하지 않으시는가, 왜 내 기도는 더디 응답되는가.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가장 깊은 침묵처럼 보이는 골고다에서 하나님은 가장 크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처럼 사랑한다. 내가 죄를 이토록 미워한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기 위해 내 아들을 내어준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듯 부르짖으셨지만, 바로 그 부르짖음 안에서 버림받아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깊은 임재입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사랑의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부활을 향한 하나님의 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산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단순한 불편함이나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을 견디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는 주님 때문에 자기중심적 생명을 내려놓는 자리입니다. 자존심이 죽고 사랑이 사는 자리입니다. 욕망이 죽고 순종이 사는 자리입니다. 원망이 죽고 감사가 사는 자리입니다. 자기 의가 죽고 그리스도의 의가 사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한 번에 완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께 나아갑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버틸 수 없습니다. 오늘도 새 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말씀 앞에서 내 마음이 다시 찢어져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나를 다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셔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내 믿음은 너무 식었다. 내 삶은 너무 많이 무너졌다. 나는 너무 오래 하나님을 떠나 있었다”고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너무 늦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 너무 멀리 간 영혼은 없습니다. 탕자가 먼 나라에서 모든 것을 잃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에게 종의 자리를 주지 않고 아들의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가장 어두운 죄보다 깊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가장 오래된 방황보다 오래며,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가장 절망적인 무덤보다 강합니다. 그러므로 돌아오십시오. 핑계의 옷을 벗고, 자기 연민의 방을 나오고, 체념의 무덤에서 일어나십시오. 주님은 아직도 십자가의 상처 난 손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혹시 고난 중에 있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만큼 깊은 밤을 지나고 있습니까. 기도해도 문이 열리지 않고, 기다려도 상황이 바뀌지 않고,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는가”라는 질문이 솟아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지금의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을 취소하지 못합니다. 지금의 눈물이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화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시간표보다 깊은 시간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시간은 조급하지만 하나님의 영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하루는 불안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고난은 성도의 마지막 거처가 아닙니다. 고난은 지나가는 골짜기이며, 그 골짜기에도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함께 있습니다.
혹시 자기 의에 지친 분이 있습니까. 늘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신앙생활을 의무와 성취의 목록으로 만들어 버린 분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무거운 종교적 짐을 얹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질 수 없는 짐을 대신 지시려고 오셨습니다. 물론 그분의 멍에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멍에는 은혜의 멍에입니다. 그분의 길에는 순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종은 정죄받지 않기 위한 두려운 노동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은 자의 기쁨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데려가는 몽학선생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온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은혜는 무질서가 아니라 새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 자신을 증명하라. 너의 가치를 보여라. 너의 이름을 남겨라. 너의 안전을 확보하라.”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 너의 생명은 그분 안에 감추어져 있다.” 이것이 성도의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평화는 모든 이해를 넘어섭니다. 세상이 설명할 수 없는 평안, 상황이 빼앗을 수 없는 평안, 죽음도 무너뜨릴 수 없는 평안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감히 다 파악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그 사랑 안에 기초한 소망이 우리를 일으키며, 그 소망을 자랑하는 성도의 기쁨은 모든 이성보다 높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강함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약한 자를 붙드시는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 설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자랑합니다.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은 모든 시간이 영원 앞에 서는 날입니다. 인간의 숨겨진 마음이 하나님의 빛 아래 드러나고, 세상이 조롱하던 성도의 눈물이 하나님의 손에 닦이는 날입니다. 그날은 역사 속에 또 하나의 장이 열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 옛 질서의 끝이며 하나님의 새 창조가 온전히 드러나는 날입니다. 그날에 우리의 믿음은 눈으로 바뀌고, 우리의 소망은 성취로 바뀌며, 우리의 사랑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완전한 사귐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순종도 헛되지 않았고, 눈물의 기도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고, 십자가를 붙들고 걸었던 모든 어둔 밤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영광을 향해 빚어지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 바울의 고백 앞에 섭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여.”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가 세상의 많은 것을 알기 전에 주님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나 자신을 증명하려 하기 전에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하소서. 내가 고난의 이유를 다 이해하기 전에 고난 중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알게 하소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기 전에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내가 내 의를 붙들기 전에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하소서. 내가 무너진 자리에서 체념하기 전에 성령의 새 능력으로 다시 일어서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결심의 강도가 아닙니다. 결심은 귀하지만 결심만으로는 우리를 살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를 먼저 붙드신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손은 약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흔들립니다. 우리의 사랑은 식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은 약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주님, 무덤을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 성령으로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울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마십시오.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놓지는 마십시오. 길이 어두워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을 잊지는 마십시오.
이제 다시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의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힘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걸으십시오. 우리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십시오. 오늘도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고난의 자리에서, 눈물의 골짜기에서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가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 권능이 여러분의 낙심한 심령을 일으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은혜가 여러분의 상처를 거룩한 사랑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이 여러분 안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사람의 향기를 피워 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그 영광의 날까지,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손 안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시작이시며, 주님이 우리의 길이시며, 주님이 우리의 끝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생명, 그것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그것이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부활의 소망, 그것이 우리의 노래입니다. 오늘도 눈물 속에서 다시 십자가를 붙들고 믿음으로 일어서십시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부활의 영광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