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역사와 성도의 연합
느헤미야 8:1-12
1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된 후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지시대로 제 1 차 포로 귀환 때에 돌아온 계보에 따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각각 원래 위치로 돌아가서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예루살렘 성읍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성벽이 완공된 예루살렘 성으로 이사하여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본문 1절은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중심으로 하여 유다 전역에 영적 부흥을 일으키십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일곱 째 달”이 나오는데 이 7월은 유대 종교력 디스리월을 말합니다. 유대 민간력으로는 1월에 해당합니다. 2절을 보면 “일곱 째 달 초하루”에 모였다고 하는데 이는 유대인에게 신년 초하루입니다. 우리 나라 말로 쉽게 하면 민속 명절인 ‘설날’입니다.
“일곱 째 달” 디스리월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중요한 달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7월 1일은 '나팔절'이며 10일은 '속죄일'이고 15일부터는 한 주 동안 '초막절'로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즉, 유다의 일곱 절기 중에 세 절기가 7월 한 달 동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편, 유대의 일곱 절기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이고, 그 중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이 유대 종교력 7월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 8장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설날이고, 또한 약 5일 전에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된 상태입니다(참조, 느 6:15).
일반적으로 이러한 상황이라면 무엇을 할까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술 퍼마시며 제사하고 놀러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 공동체는 성벽이 완공된 직후 설날에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찾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몇몇 사람들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하며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1절 후반을 보니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다 전역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읍으로 모였습니다. 그들은 몇날 몇주, 심지어 한 달 가량을 여행하며 예루살렘 성읍으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7월 1일, 나팔절에 다 모였는데 예배와 말씀을 위해 모였습니다. 일제히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 성읍으로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모이자 그들은 제사장이며 학자인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세의 율법책을 읽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팔절은 어떤 절기입니까? 이 날은 ‘나팔을 부는 날’인데 숫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불어 대성회로 모이는 날입니다. 그 날 이스라엘 백성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안식하면서 하나님께 번제 및 속죄제, 화제 등, 여러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민 29:1-6; 레 23:24-25).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나팔절이 되자 일제히 모여서 누구를 찾아갔습니까? 그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를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율법책을 가지고 와서 읽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에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학사 에스라는 율법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무릇 알아 들을만한 모든 회중 앞에' 섰습니다. 그는 어떤 특정 계층을 향해 말씀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한편, 학사 에스라는 누구입니까? 학사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에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제사장(스 7:7)입니다. 따라서 아닥사스다왕 20년에 예루살렘에 온 느헤미야보다 약 13년 전에 먼저 귀국한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에 능한 학사로써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했던"(스 7:10) 인물입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깨달은 대로 살며 또한 그 깨달음을 가르쳤던 제사장입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처음 귀환했을 때 그 이전에 포로 귀환으로 돌아와 유다 땅에 자리잡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와 삶은 엉망이었습니다. 에스라서를 보면 그들은 혼합주의에 빠져있었고 불신자와 결혼하였으며 이방 세상의 사상과 문화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회개 운동을 일으켰고 나아가 이방 여인과 결혼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방 여인들과의 관계를 정리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의 통치 하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결을 회복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후 대략 13년 후에 진행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그 동안 에스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였다면 결코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성벽이 완공되니 하나님께서는 다시 학사요 제사장인 에스라를 통해 영적 각성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주의 역사를 일으키실 때마다 반드시 귀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에스라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조예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실 에스라는 수년동안 말씀을 통한 영적 부흥을 간절히 기도하여왔고 또한 주의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넣어달라고 기도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차매 에스라의 기도가 응답되어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에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된 직후 나팔절에 그들은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시 119:72)
그들은 돈보다 명예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달콤하고 맛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
심지어 잘 차려진 정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12)
즉, 그들은 시간이 부족하다면 음식 먹는 것보다 성경을 취하여 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벽이 완공된지 5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읍 내에는 아직 할 일이 산더미 같이 많았습니다. 또한 새롭게 건설된 성읍 내에는 새로 구축해야 할 긴급한 일들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또한 얼마든지 성벽 완공에 대해 기뻐하며 모든 관심을 성벽에 쏟을 수 있었습니다. 허물어졌던 도시 하나를 새로 완공했는데 그 성벽에 대해 자축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 순위 일위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통해 이루어진 업적을 높이기보다, 멋지게 이루어진 결과물에 그들의 마음과 관심을 빼앗기기보다, 이 모든 사역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 그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따라서 설날에 이스라엘 전체 백성이 예배에 집중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역사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건물은 수단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교회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 교회를 찾는 자들을 보면 건물이 큰가,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는가를 점검하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 교회에 있는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수많은 교인들이 유명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명 그리스도인이란 유명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가짜라는 뜻입니다.
건물은 수단일 뿐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넘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됨으로 성령의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며 기뻐하시는 교회 공동체는 온전한 복음이 증거되는 것과 복음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성도들과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만을 높이는 그러한 교회입니다. 그러한 교회에 하나님의 기쁨의 증거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2절을 보면 “남녀노소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은 말이 통하는 아이들까지 다 포함된 것입니다. 이는 아이들까지 다함께 예배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아름다운 예배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아무도 강요하지도 않았고 부담을 주지도 않았는데 어린 아이를 포함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백성들이 나팔절을 맞이하여 수문 광장 앞에 모여 에스라로부터 말씀을 받으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얼마나 컸던지 새벽부터 정오까지 모든
백성이 에스라가 전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6시간 동안이나 흩어지지 않고 말씀을 청종합니다. 지금 그들에게는 성경이 없는 상태입니다.
오직 에스라가 들려주는 율법 책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향해 굶주림을 느끼며 하나님의 은혜를 맛봅니다. 그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말씀에 녹아듭니다.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는 조는 사람도, 문자 보내는 사람도, 하품하는 사람도, 머리 속에 집에 두고 온 떡이나 세상 드라마를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는 대략 45분 정도 설교를 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다른 교회들에 비해 말씀을 향한 공동체의 사모함이 간절하고 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 8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비교하면 1/8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 여러분을 보면 참으로 부러워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누리는 특권을 세례 요한이 본다면 여러분에게 고함을 치며 혼을 낼 것입니다. 그토록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도 그렇게 게으를 수 있느냐 라며 우리의 가슴이 파열될 정도로 큰 소리로 외칠 것입니다. 성경이 완성된 상태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온 인류 역사 및 모든 인류 가운데 가장 큰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그 특권을 제대로 안다면 이렇게 시시하게 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흥분이 우리 모두에게 생겨날 것입니다.
아무튼 그토록 열악한 상황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약 6시간 동안 에스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된 후에 처음 갖는 나팔절에 말씀의 학사인 에스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그 예배의 시간은 얼마나 큰 감격이었겠습니까? 또한 학사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간절히 듣기를 원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집중하기 바랍니다.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2-13).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보람과 가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서기 때문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11).
다른 모든 것들은 헛됩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오락과 드라마도 시간이 지나면 다 헛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헛되게 돌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최고의 유익을 줍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한 얼마나 강력한지 말씀 한 구절 때문에 인생이 크게 변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그 심령이 너무 힘들 때는 그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한 구절이 들릴 때 갑자기 생각이 바뀌게 되면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인생이 크게 바뀌게 됩니다. 단 한 구절인데 그러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저와 잘 아는 목사님들 중에 김용진 선교사님이 계신데 아프리카 말라위 교도소 농장에서 선교하는 분입니다. 그는 <사랑의 곡식 재단>이라고 하여 범죄자들을 감옥에 두지 않고 시골 밭에서 농장을 하게 하여 그들의 노동에 의한 결실로 약 10만명 이상의 어린이가 매일 음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에베소서 4장 28절 한 구절을 읽다가 주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이처럼 성경 한 구절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역사를 일으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성경의 능력입니까?
4절을 보니, 학사 에스라가 특별하게 제작된 나무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에스라 옆에는 그의 사역을 돕는 자들이 함께 섰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단에 올라 율법 책을 펴니 모든 백성이 일어섭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겸손과 경외심을 표했다는 뜻입니다.
미국 의회가 열리면 대통령이 입장합니다. 이때 안내원이 외칩니다. “Arise. Here i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그러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통령에게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모든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법정에서 재판을 열기 전에 판사가 입장할 때 안내원이 선포합니다.
“재판관이 입장하십니다. 전원 자리에서 기립하십시오.”
마찬가지로 에스라가 단에 설 때 사람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을 표시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주의 백성들의 경건한 자세를 보십니까? 에스라를 향한 존경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까?
청교도 시절에는 목사들의 권위가 재판관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구약을 보든 신약을 보든 재판장의 권위나 그들을 향한 존경심은 주의 종들보다 한참 아래였습니다. 심지어 고린도전서 6장을 보면 재판관의 권위는 교회 성도들보다 훨씬 더 낮게 여겨졌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고전 6:2-3).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수많은 목사들은 재판관은 커녕 정직한 공무원만도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며, 교우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고귀함을 망각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목사를 세상 복을 빌어주는 무당이나 또는 잘못 건드리면 재수가 옴 붙는 역술인 정도로 여깁니다. 좀 더 나으면 고작 도덕 선생님 정도로 여깁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참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는 단을 높게 세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로 높이고 그 말씀에 집중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또한 그들은 에스라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듣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를 가졌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7절을 보니 그들은 피곤했지만 다시 앉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말씀 낭독은 6시간 동안 지속되었지만 아무도 자리에 편하게 앉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하며 귀한 자세입니까?
청교도 신앙의 사람들은 느헤미야 8장을 통해 마찬가지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포함하여 다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설교단을 높이 세우고 그 높은 단에서 주의 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의 종이 단에 서면 다함께 일어나서 설교가 마칠 때까지 함께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의 종의 말씀 대언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도 바울이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태도와 마음 자세로 듣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에 대하여 어떤 마음 자세로 듣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 같이 겸손과 두려움과
떨림과 경외함으로 신중하게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영적인 각성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증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흥분과 감사와 기대와 열정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기만 하면 5분도 안 되어 잠이 들거나 잠을 자기 위해 성경을 봅니다. 일주일 내내 성경 한번 펴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또한 설교 듣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고 복음도 전하지 않는 설교자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와 복음에 충성된 주의 종이 설교할 때 졸거나 하품하거나 늦게 오거나 설교를 판단한다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거나 교만 병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내려오는 생수의 강을 마실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사람은 절대로 멍청히 안일하게 있지 않습니다. 예배 전에 미리 와서 기도로 예배와 말씀을 사모하며 마음을 준비합니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와
마음 자세를 지닌 자가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을 통해 영적인 부흥과 각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니,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느 8:6)합니다. 에스라는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힘차게 높이며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합니다. 나아가 몸을 굽혀 여호와께 경배를 돌립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라는 확증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 역시 귀한 반응입니다.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사람은 깊은 마음으로부터 입술로 “아멘, 아멘”합니다.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귀한 주의 말씀 앞에 내 마음에 합한다는 고백입니다. 주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 깊이 아멘하며 그 생수의 강을 마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에스라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할 때 회중들은 손을 들어 반응하였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 63:3-4).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2).
성경에는 손을 들지 말라는 요구는 전혀 없고 마음이 우러날 때 주 하나님 앞에서 손을 들라는 요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손을 들어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감사와 경배로 인하여 손이 올라가면 손을 드는 것은 아름다운 현상입니다.
심지어 땅에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이는 철저한 겸허함을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참으로 회개할 때 어떤 자세가 됩니까? 네. 저절로 무릎이 꿇어지고 코가 땅바닥까지 닿게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지금 이러한 현상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예배 가운데 주의 임재를 느끼면서 말없이 빰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고개를 숙입니다. 그 눈물은 기쁨과 감사의 눈물,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 같이 우리 영혼이 주님의 임재와 주의 말씀을 갈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향하여, 주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를 향하여 경의의 자세를 표하며 동시에 주님의 임재와 영광을 향하여 갈급한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심령에 하늘의 참된 만족과 기쁨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7절과 8절을 보면, 에스라를 통하여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다시 소그룹으로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8-9절).
이는 우리가 주일 예배 이외에도 소그룹으로 나뉘어 성경 공부를 하는 그러한 패턴을 보여줍니다. 소그룹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묻고 답하면서 성경을 바르게 알기 위함이며 나아가 성도의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소그룹 인도자들은 내 생각을 전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단이 무엇입니까? 복음에 있어서 다른 해석을 하는 부류들이 이단입니다. 지금은 작지만 앞으로 우리 교회가 커질 때 소그룹 인도자인 코디는 교회의 생명처럼 될 것입니다. 이때 코디들은 교회와 같은 해석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마치고 에디오피아로 돌아가던 내시가 도중에서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행 8:34-35).
우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는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을 하도록 주께서 맡기시고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코디들은 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공동체로서 복음의 공동체입니다. 한 복음으로 같은 교훈을 받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는 느헤미야 8장의 패턴을 본받아 남녀노소 다같이 공중 예배를 드리고, 각각 알맞게 소그룹으로 나누어 들어가 복음을 중심으로 하여 배우고 가르칠 것입니다. 서로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성도의 교제를 맘껏 나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대는 사방으로 영적으로 독이 든 거짓 교훈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곳 저곳 인터넷을 함부로 다니거나 이단 세력에 호기심을 갖고 기울이다가 독을 마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종교 다원화를 지지하는 독, 거짓 교회 카톨릭을 지지하는 독, 동성 연애를 지지하는 독, 율법주의로 돌아가게 하는 독, 신사도 운동처럼 신비주의를 부추기는 독, 나아가 인본주의 및 세속주의를 외치는 혼합주의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뱀의 독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철저하게 훈련 받아 뛰어난 분별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온전하고 안전한 지도자에게 한참 배워야 합니다. 안전한 교사는 에스더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여 복음을 정확하게 붙잡고 그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적어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을 20-30독은 해야 성경 교사가 될 자격을 가질 것이며 또한 영적 분별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꼴이 되어 다함께 망하게 됩니다. 무서운 사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선생된 자들이 하나님께 받는 심판은 더욱 무섭고 무겁다는 점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그러므로 바른 교사에게 배우고, 그 배운 내용을 스스로 성경을 읽고 훈련하면서 확인하고, 그후에 가르치기 바랍니다. 가르치는 것도 온전한 교회 공동체의 허락 하에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여기서 전파하라는 뜻은 복음을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자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심령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하심의 손길에 대하여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함을 느끼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왜 울었습니까? 율법을 통해 자기의 죄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울었습니까? 그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찾아오신 하나님 사랑 때문입니다. 왜 울었습니까? 이제야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전부’ 울었다는
사실입니다. 온 회중에게 회개의 울음이 임한 것입니다. 감사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한 회개 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을 향한 간절함과 굶주림 가운데 있던 주의 백성들에게 주께서 말씀을 통해 임재하시자 그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엄청난 울음이었습니다. 그 울음은 성령의 감화 감동에 의한 현상이며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역사였습니다.
이때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백성들을 지도하는 레위인들이 울지 말라고 합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괴로워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지금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레위인들이 울지 말라고 한 것은 단지 울음을 그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팔절은 하나님께 번제와 소제, 그리고 전제 및 화제로 “향기로운 냄새”로 여호와께 올려 드리는 날입니다(민 29:2-6). 즉, 하나님과 함께 잔치하는 날이기 때문에 슬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울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지도자들의 부탁을 받은 백성들은 죄로 인한 슬픔과 애통을 멈추고 크게 즐거워하며 서로 음식을 나누며 기뻐합니다. 이는 아무 생각없이 갑자기 눈물을 뚝 그치고 신나게 놀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부인하고 나팔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귀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 끝부분을 보니 이 모든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씀을 밝히 앎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이 강하게 역사할 때 주의 임재가 나타납니다. 그때 발생하는 주의 공동체의 현상은 애통의 눈물과 함께 사랑과 감사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이 너무 커서 서로 모든 것을 나누게 됩니다. 이처럼 애통과 기쁨이 동시에 병행하여 나타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완전한 거룩과 완전한 사랑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복음을 듣고 깨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감정적 반응은 애통의 눈물과 함께 찾아오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이때 애통의 눈물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은 신기하게도 우리에게 강한 힘이 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 상태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염려가 없습니다. 죄악으로 인한 모든 상처가 치료 되면서 평강이 넘칩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기뻐하는 상태는 우리 심령에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이러한 기쁨이 있으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으면서 이 우주에게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 봉독으로 시작된 나팔절 성회는 주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기쁨이 커지면서 큰 축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위로를 경험했기 때문에 마음껏 서로 사랑하며 나누었던 것입니다. 영적 각성의 뚜렷한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눔입니다. 사랑입니다. 연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인 부흥은 우리가 정말 사모하고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 이유는 영적인 부흥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연합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성도들과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그 연합은 하나님 나라 그 자체입니다. 그 연합은 하나님으로 인한 아가페이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그 기도는 아들이 드린 공식적인 기도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 기도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요한복음 17장인데, 연합입니다. 주께서 피로 값주고 사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또한 공동체 간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목표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하면 사랑입니다.
[
6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
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6, 16-17, 21-22, 26).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진정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려본 자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들만이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요 하나님의 능력을 아는 자들입니다.
종종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흘린 눈물 뒤에 오는 주의 위로와 기쁨을 아십니까? 그들은 죽도록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공동체와 함께 온 힘을 다해 나누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어지는 이러한 하늘의 기쁨과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놀랍도록 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