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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를 위한 부르심 (에스더 4:10-17)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15|조회수30 목록 댓글 0

그때를 위한 부르심 (에스더 4:10-17)

수산 궁의 금빛 휘장은 찬란했지만, 그 찬란함 속에는 한 여인의 숨죽인 떨림이 있었습니다. 왕궁의 대리석 바닥은 햇빛을 받아 눈부셨지만, 그 눈부심은 에스더의 마음속 어둠을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왕후의 관은 머리에 있었으나, 그 관은 영광의 장식이기 전에 무거운 침묵의 짐이었습니다. 세상은 왕궁을 안전한 곳이라 부릅니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피난처라 생각합니다. 권력 가까이에 있으면 바람을 피할 수 있고, 금으로 둘러싸인 문 안에 있으면 죽음도 문밖에서 머뭇거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사람이 왕궁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할 수 있느냐고.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민족의 눈물과 시대의 탄식에서 면제될 수 있느냐고. 사람이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침묵할 때, 그 침묵은 과연 생명을 지켜 주느냐고.

에스더서에는 이상할 만큼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은 구름 위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시지 않고, 왕의 잠 못 이루는 밤과 한 여인의 떨리는 결단과 한 노인의 찢어진 옷 속에서 조용히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가장 깊이 일하십니다. 사람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걸어오고, 인간의 계산에는 막힌 골목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나, 그 침묵은 무능의 침묵이 아니라 영원의 깊은 호흡입니다. 하나님은 감추어져 계시는 것처럼 보이나, 그 감추심은 떠나심이 아니라 인간의 얕은 눈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더 깊은 현존입니다.

본문의 시간은 매우 무겁습니다. 유다 백성은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서 죽음의 조서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하만의 악한 궤계는 한 민족을 하루아침에 지워 버리려 했습니다. 한 사람의 교만이 한 민족의 피를 요구했고, 한 사람의 분노가 제국의 법으로 포장되었습니다. 죄는 언제나 그렇게 옷을 갈아입습니다. 죄는 단순한 감정으로 시작하지만 제도와 법과 문화와 관습의 옷을 입고, 마침내 사람을 죽이는 권세처럼 군림합니다. 하만은 자기 마음속의 분노를 왕의 도장으로 봉인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비극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을 빌리고, 자기 증오를 아름다운 명분으로 포장하며, 자기 불안을 신념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악은 아무리 화려한 관복을 입어도 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인의 조서는 아무리 제국의 문장으로 봉인되어도 피 냄새 나는 죄의 문서입니다.

모르드개는 그 조서 앞에서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중에 나가 크게 통곡했습니다. 왕궁 안의 에스더는 처음에 그 울음의 깊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가까운 피가 울고 있었으나, 왕궁의 벽은 그 울음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위험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편안한 방을 주며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성공은 때로 우리의 귀를 막고, 안정은 때로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내 식탁이 풍성하면 굶주린 자의 신음이 멀어지고, 내 자리가 안전하면 무너지는 이웃의 울음이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평안의 벽을 넘어 들려오는 탄식에 귀를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나 하나의 안락을 넘어 이웃의 눈물 속에서 우리를 깨웁니다.

모르드개의 말은 에스더의 영혼을 향한 칼날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말은 단순한 꾸짖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혼의 깊은 잠을 깨우는 하나님의 나팔입니다. 왕궁은 피난처가 아닙니다. 지위는 구원이 아닙니다. 사람의 자리는 영원한 성벽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보이는 문과 보이는 왕좌와 보이는 권력을 붙잡으며 불가시의 하나님을 놓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무너지고, 붙잡은 것은 빠져나가며, 의지한 것은 우리를 배반합니다. 시간적인 것은 시간 속에서 낡아지고, 인간적인 것은 인간의 한계 안에서 꺾이며, 세상의 안전은 죽음이라는 최고 법 앞에서 그 민낯을 드러냅니다. 죽음은 왕궁 앞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죽음은 빈민의 초막만 찾아가지 않고 왕후의 침실 문턱에도 먼저 와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계산보다 앞서 도착해 있는 신비한 정지이며, 우리 현존의 가장 지울 수 없는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경계 너머에서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참으로 붙들어야 할 것은 생명을 지키려는 우리의 손이 아니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입니다.

모르드개는 또 말합니다. “네가 이 때에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여기서 “놓임과 구원”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רֶוַח וְהַצָּלָה, 레바흐 웨하찰라입니다. 레바흐는 숨 쉴 공간, 틈, 해방의 여지를 뜻하고, 하찰라는 건짐과 구원을 뜻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막힌 곳에서도 숨 쉴 틈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조서가 사방을 봉쇄해도 하나님은 다른 데서라도 구원의 문을 여시는 분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멸절될 수 없다는 언약의 신뢰 위에서 말했습니다. 에스더가 순종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갇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순종을 귀하게 사용하시지만, 우리의 순종에 인질로 붙잡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엄숙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를 불러 그 일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이 없어서 가난한 자를 먹이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손을 떡의 통로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이 없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입술을 생명의 증언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에스더 없이도 유다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를 그때 그 자리에 세우심으로, 한 여인의 떨림을 민족 구원의 문으로 삼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의 삶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리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늘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우리가 가진 작은 영향력, 우리가 겪는 고통과 기다림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던진 말은 모든 시대의 성도에게 던지는 말씀입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여기서 “때”는 히브리어로 עֵת, 에트입니다. 단순한 시각이나 날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익어 가는 결정적 순간을 가리킵니다. 인간의 달력에는 평범한 하루처럼 보이나, 하나님의 달력에는 영원의 문턱이 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우연한 만남처럼 보이나, 하나님께는 오래전부터 준비하신 사명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사람의 계산에는 피해야 할 위험처럼 보이나, 하나님께는 믿음이 태어나는 산실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왜 내가 여기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왜 내가 이 가정에 있습니까. 왜 내가 이 교회에 있습니까. 왜 내가 이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왜 내게 이런 책임이 주어졌습니까. 왜 내 앞에 이런 아픔과 부담과 사람과 문제가 놓였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질문을 바꾸십니다. “왜 내가 여기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두신 뜻은 무엇입니까?”라는 기도로 바꾸십니다.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낭만이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의 깊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영적 시력입니다. 믿음은 안전한 곳에서만 하나님을 찬송하는 정서가 아니라, 위험한 문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붙드는 결단입니다. 믿음은 손에 쥐어지는 보장이 아니라, 텅 빈 공중처럼 느껴지는 순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어제 들었던 말씀을 오늘 새롭게 듣고, 오늘 붙든 은혜를 내일 다시 새롭게 붙드는 것입니다.

에스더의 첫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모르드개에게 말합니다. 왕의 모든 신하와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금 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이미 삼십 일 동안 왕에게 부름을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 속에는 한 여인의 현실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에스더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법을 알았습니다. 위험을 알았습니다. 자기 처지를 알았습니다. 믿음은 위험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위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더 크게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죽음이 없다고 말하는 허풍이 아닙니다. 믿음은 죽음이 있음에도 생명의 주인이 계심을 고백하는 진실입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사라진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더 크게 들릴 때 시작됩니다.

에스더가 두려워한 왕의 법은 잔인했습니다. 부름받지 않은 자가 왕 앞에 나아가면 죽음입니다. 왕이 금 규를 내밀어야만 생명입니다. 이것은 인간 세계의 권력이 가진 본성을 보여 줍니다. 세상의 왕 앞에서는 초청받지 못한 자가 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왕을 보여 줍니다. 세상의 왕은 오지 말라 하고, 하늘의 왕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십니다. 세상의 왕은 금 규를 내밀어야 살지만, 하늘의 왕은 십자가 위에서 두 팔을 벌려 우리를 살리십니다. 세상의 왕좌는 가까이 가면 죽음이지만, 은혜의 보좌는 담대히 나아가면 긍휼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습니다. 에스더가 들어가야 했던 왕의 뜰은 죽음의 가능성이 도사린 자리였지만, 그리스도께서 열어 주신 길은 휘장을 찢고 열린 생명의 길입니다. 에스더는 왕이 금 규를 내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의 규가 아니라 은혜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에스더의 결단은 갑자기 솟아난 인간적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먼저 금식을 요청했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여기서 금식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닙니다. 금식은 자기 생명의 주인이 자신이 아님을 인정하는 영혼의 무릎 꿇음입니다. 금식은 인간의 힘과 계산과 식욕과 통제 욕구를 내려놓고,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임을 고백하는 몸의 기도입니다. 금식은 “내가 살 길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 내 생명은 주께 있습니다”라는 항복입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질서입니다. 사람 앞에 서기 전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세상의 문을 두드리기 전에 은혜의 보좌 앞에서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왕의 안뜰에 들어가기 전에 영원의 성소에서 자신의 두려움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וְכַאֲשֶׁר אָבַדְתִּי אָבָדְתִּי, 베카아셰르 아바드티 아바드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뜻은 “내가 잃게 된다면 잃겠습니다”, “내가 멸망한다면 멸망하겠습니다”라는 결연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운명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망의 탄식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생명을 다시 돌려드리는 믿음의 언어입니다. 에스더는 죽음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생명을 경멸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생명을 너무 깊이 알았기에, 자기 생명만 보존하는 삶이 참 생명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만 살기 위해 침묵하는 생명은 이미 생명의 중심을 잃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드려지는 생명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가장 깊은 역설을 봅니다. 살려고 움켜쥐면 잃고, 하나님께 드리면 삽니다.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잃으면 찾으리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에스더의 결단 속에서 그림자처럼 비칩니다. 에스더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결단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희미하게 예고합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해 왕 앞에 나아가 죽음의 가능성을 감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말없이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심으로 “내가 죽어 너희를 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더는 왕의 금 규가 내밀어지기를 기다렸지만, 그리스도는 심판의 막대기를 자신의 몸에 맞으셨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의 멸망을 막기 위해 왕의 뜰에 섰지만,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와 사망을 담당하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에 서셨습니다.

그러므로 에스더의 이야기는 단순히 용감한 여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구속사의 빛 아래에서 볼 때, 중보의 자리로 부름받은 한 사람을 통해 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에스더가 자기 백성과 왕 사이에 섰듯이, 그리스도는 죄인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와 그리스도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습니다. 에스더는 왕이 받아 주어야 살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버림받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에스더는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리스도는 죽으실 것을 아시고도 들어가셨습니다. 에스더는 금식 후 왕 앞에 나아갔지만, 그리스도는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신 후 십자가 앞에 나아가셨습니다. 에스더의 삼 일 금식 뒤에는 왕 앞에 서는 시간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삼 일 무덤 뒤에는 부활의 새 아침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시간 속에서 복음은 말합니다. 세상 안에서의 구원, 심판 가운데서의 무죄선고, 시간 속에서의 영원, 죽음 가운데서의 새 생명, 이 모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터가 놓였습니다.

우리의 시대도 에스더의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만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하만의 영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람을 숫자로 만들고, 약자를 짐으로 여기고, 공동체를 이익의 도구로 삼고, 진리를 불편하다는 이유로 침묵시키고, 복음을 사적인 취향으로 밀어 넣으려는 힘들이 있습니다. 오늘의 조서는 종이 위에만 쓰이지 않습니다. 냉소의 언어로 쓰이고, 무관심의 문화로 쓰이고, 성공만을 숭배하는 시대정신으로 쓰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왕궁을 지키느라 이웃의 울음을 듣지 못합니다. 많은 성도가 자기 안위의 작은 방 안에서 세상의 멸망 조서를 바라보며 “나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 때를 위하여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냐. 네 가정에서, 네 교회에서, 네 일터에서, 네 이웃 앞에서, 네 시대의 고통 앞에서, 네가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가 아니냐.

침묵은 언제나 중립이 아닙니다. 어떤 침묵은 지혜이지만, 어떤 침묵은 불신앙입니다. 어떤 침묵은 기도이지만, 어떤 침묵은 자기 보존의 우상숭배입니다. 에스더에게 침묵은 안전한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그 침묵이 결코 안전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성도는 말해야 할 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방식으로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금식한 사람의 낮은 마음으로 말해야 합니다. 자기 의를 앞세우는 분노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깨어진 자의 눈물로 말해야 합니다. 상대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말해야 합니다. 진리를 무기로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 먼저 자신이 찔린 사람으로 말해야 합니다.

에스더가 금식하며 공동체를 불러 모은 장면은 우리에게 교회의 본질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결단을 혼자 감당하게 내버려 두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함께 금식하고 함께 울고 함께 서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에스더 한 사람을 사용하셨지만, 그 뒤에는 수산의 유다인들이 함께 엎드려 있었습니다. 보이는 무대에는 에스더가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자리에는 금식하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앞에 서고, 어떤 사람은 뒤에서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고, 어떤 사람은 눈물로 받쳐 줍니다. 어떤 사람은 왕의 뜰로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방 안에서 금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무대 위의 순종과 골방의 기도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담대함은 많은 사람의 눈물 위에서 자라고, 한 사람의 사명은 공동체의 기도 속에서 힘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날들은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각자의 수산 궁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나 속으로는 두려움이 있고, 남들은 부러워하나 자신은 외롭게 흔들리는 자리들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목회자로서, 직분자로서, 자녀로서, 일터의 사람으로서, 이웃으로서, 우리는 때때로 “내가 나서면 잃을 것이 너무 많다”고 느낍니다. 말하면 관계가 깨질 것 같고, 순종하면 손해를 볼 것 같고, 복음을 붙들면 세상에서 뒤처질 것 같고, 진실을 선택하면 나만 바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붙들고 있는 그것이 정말 생명이냐. 네가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영원 앞에서 그토록 무거운 것이냐.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물들의 망망대해보다 더 무겁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잃는 것은 잃음이 아니며, 십자가 안에서 내려놓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부활의 씨앗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심연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으로 건너오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에스더는 왕의 은총을 기다렸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의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결단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금식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생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뇌물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길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업적을 높이 세우는 기념비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기념비가 무너지는 회개입니다. 믿음은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해 가난하게 되는 자의 방향 전환입니다. 믿음은 나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 안으로 던져지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긍정과 신념과 경험과 사회적 위치를 가로질러, 누구에게나 쉽고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힘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선교사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오래전 낯선 땅에서 복음을 전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아무런 권력도, 재산도, 보장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마을에 큰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병든 이들을 멀리했고, 두려움 때문에 가족마저 문밖에 두었습니다. 그 선교사는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남으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든 사람들 곁에 남아 물을 먹이고, 상처를 닦고, 마지막 숨을 쉬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도망가지 않습니까?” 그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나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 이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내가 떠나면 이들은 그 사랑을 누구에게서 보겠습니까?” 그는 훗날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그 마을 사람들은 복음을 달리 듣기 시작했습니다. 말로만 전해진 복음이 아니라, 곁에 남아 준 사랑으로 전해진 복음이었습니다. 그는 에스더처럼 왕궁에 들어간 사람은 아니었으나, 자기 시대의 죽음 앞에서 “주님, 내 생명은 주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생명은 죽음 속에서도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왕의 안뜰이 있습니다. 들어가기가 두려운 자리, 피하고 싶은 사람, 말해야 하지만 침묵하고 싶은 순간, 용서해야 하지만 마음이 닫히는 관계,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조롱이 두려운 자리, 진실을 선택해야 하지만 손해가 계산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모함으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보존의 감옥 안에 영원히 머물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두려움을 제거하는 방식으로만 일하지 않으십니다. 때로 성령께서는 두려움보다 더 큰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는 사람이 순종합니다. 에스더의 결단은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민족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가 두려움보다 커졌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는 도망가지 않으신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왕궁에 머물러 계시며 인간의 멸망 조서를 멀리서 바라보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살과 피를 입고 이 땅의 안뜰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는 죄와 사망과 율법의 정죄가 서 있는 자리 한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는 우리 대신 심판의 문 앞에 서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버림받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찢기셨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위로가 아닙니다. 부활은 역사의 한복판에 터져 나온 새 창조의 빛입니다. 부활 가운데서 성령의 새 세계는 육의 옛 세계와 접촉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실패와 두려움과 침묵과 죄책을 끝으로 만들지 않고, 은혜 안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는 하나님의 새 아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힘으로 에스더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참 에스더보다 더 크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 자기 생명에 갇혀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미 사랑받았기 때문에 인정받기 위해 왕궁의 안전을 숭배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받았기 때문에 손해와 상실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생명, 시간이 낡게 할 수 없는 소망, 죽음이 끊을 수 없는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한 것은 자기 파괴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 봉헌의 언어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손해 보면 손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버리지는 않겠습니다. 주님, 낮아지면 낮아지겠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포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주님, 오해받으면 오해받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길을 떠나지는 않겠습니다. 주님, 내 계획이 무너지면 무너지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 안에서 다시 세워지는 은혜를 믿겠습니다. 주님, 내가 붙든 작은 왕궁이 흔들려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겠습니다.

이 고백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손에 쥐어지는 소유물이 아니며, 한 번 결심했다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심리적 확신도 아닙니다. 믿음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제의 은혜를 오늘의 순종으로 다시 번역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일의 두려움 앞에서 오늘의 말씀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이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마치 잔과 잔이 가까이 다가와 부딪치듯,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연약한 세계와 접촉할 때 창조의 힘, 구속의 힘, 하나님 나라의 힘이 우리 안에서 울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지만 걸어갑니다. 두렵지만 말합니다. 떨리지만 사랑합니다. 울면서도 순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왕궁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지키려는 안전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두려워 침묵하고 있는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 때에 그 자리에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이가 많아도 부르심은 끝나지 않습니다. 젊어도 면제되지 않습니다. 많이 배운 자도, 배우지 못한 자도, 가진 자도, 없는 자도, 설교하는 자도, 설교를 듣는 자도, 모두 하나님의 시간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경을 보시지 않고 우리의 순종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화려한 겉모습에 속지 않으시고, 하나님 앞에 떨며 엎드리는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리스도는 연출의 대상이 아니며, 복음은 우리의 체면을 장식하는 종교적 문양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를 질문대 앞에 세웁니다. 네가 살고자 하는 생명은 무엇이냐. 네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무엇이냐. 네가 붙들어야 할 십자가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입을 여시면 하늘이 갈라지고 무덤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왕의 잠 못 이루는 밤도 구원의 도구가 되고, 한 여인의 떨리는 발걸음도 민족을 살리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하만의 장대는 하만의 심판이 되고, 멸망의 날은 구원의 날로 뒤집히며, 눈물의 금식은 기쁨의 잔치로 바뀝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향한 언약의 신실하심으로 악의 궤계를 뒤집으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뒤집힘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가장 어두운 죄악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가장 찬란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죄인들의 생명나무로 세우셨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패배라 불렀으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사망을 무장 해제하셨습니다. 세상은 무덤을 끝이라 불렀으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부활의 새 시간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보이는 조서가 전부가 아닙니다. 지금 들리는 위협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지금 느끼는 두려움이 당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당신의 생명은 왕의 변덕에 달려 있지 않고, 세상의 평가에 달려 있지 않고, 당신의 완벽함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금 규보다 더 확실한 은혜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의 숨 쉴 공간, 당신의 레바흐 웨하찰라, 당신의 놓임과 구원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에스더처럼 왕의 뜰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죽음의 뜰로 들어가신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심판의 문을 지나가신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가시고, 우리를 위하여 새 아침을 여신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눈물이 있어도 일어나십시오. 두려움이 있어도 기도하십시오. 떨림이 있어도 순종하십시오. 말해야 할 때 사랑으로 말하고, 나아가야 할 때 겸손히 나아가고, 내려놓아야 할 때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금식의 밤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여시는 새벽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처럼 보이는 자리가 하나님의 구원으로 뒤집히는 날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실 때, 우리는 자기 생명을 움켜쥔 작은 인간에서 하나님의 뜻에 붙들린 새로운 사람으로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이 때를 위하여 세웠다. 네가 두려워하는 자리에도 내가 먼저 가 있다. 네가 잃을까 떨고 있는 생명도 내 손 안에 있다. 너는 나의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라.” 이 음성을 듣는 성도는 더 이상 왕궁의 포로가 아닙니다. 그는 은혜의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어둠 속에서 작은 등불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비록 손은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도, 그 영혼은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죽으면 죽으리이다. 그러나 주님 없이 살지는 않겠습니다. 주님, 잃으면 잃으리이다. 그러나 복음의 소망은 놓지 않겠습니다. 주님, 내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누군가 숨 쉴 공간을 얻게 하시고, 나를 통하여 누군가 십자가의 은혜를 보게 하시며, 나를 통하여 이 시대의 작은 어둠 한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게 하옵소서.”

그 고백 위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하나님은 결단하는 자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떨며 순종하는 자의 발걸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금식하는 밤의 침묵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아래 엎드린 영혼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오늘 우리의 왕궁이 흔들려도, 우리의 소망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길이 좁아도, 그 길 끝에는 부활의 주님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손이 비어도, 그 빈손을 붙드시는 주님의 손은 못 자국 난 사랑의 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나십시오. 다시 기도하십시오. 다시 사랑하십시오. 다시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이 때를 위하여 부르신 하나님께서, 이 때를 견딜 은혜도 주시고, 이 때를 지나 영원으로 이어지는 소망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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