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유혹, 어떻게 할 것인가?
마태복음 5:27-30 / 이규현 목사
오늘 본문은 예민한 주제입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지나칠 수 없는 주제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간음입니다. 현대사회는 대놓고 담론화하지 않습니다. 죄를 죄라 하지 않고 간음을 간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성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이 성을 왜곡시켜버렸습니다. 성을 쾌락의 도구로 상품화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은 감각주의적 세상입니다. 세상은 성에 관련된 육감적이고, 말초적인 자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시대 가장 큰 전쟁은 성적 유혹, 성적 욕망과의 싸움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나님의 선하고 완전한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결혼의 거룩함을 보호하고 인간의 완악함을 제거하기 위해 이 법을 주셨습니다. 그때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나치게 축소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외적인 행동을 다루었기 때문에 주로 육체적으로 간음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이혼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율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자기 욕망과 편의를 위해 율법을 그릇되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까지 포함합니다. 죄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주목하십니다.
주님은 순결의 기준을 높이 끌어올리십니다. 본문 27-28절을 보십시오. 이 구절은 특히 남성들을 주눅 들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자를 아예 보지도 말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보는 것 자체가 죄인가?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특히 미혼의 청년들이라면 이성을 쳐다보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이성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연히 본다거나 순간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선 자체보다 시선의 의도성입니다. 의도성을 가지고 바라보거나 그 시선을 즐기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성에 끌리는 마음을 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끌리도록 만드셨습니다. 서로 필요로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이성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정상적입니다. 예수님이 주목하시는 것은 “음욕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에 좀 더 정확한 번역이 있습니다. “음욕을 채울 뜻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다시 말하면 바라보고 있는 이성과 잠자리를 가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간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선이 대상에게 머물러 있는 동안 욕망으로 발전합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너무 유심히 봅니다. 의도를 가지고 바라보며 별 상상을 다 하고 있습니다. 상상의 세계로는 이미 선을 넘고 있습니다. 성적 상상을 하고 있다면 마음으로는 이미 준비된 상태입니다. 그다음은 행동에 옮길 일만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음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아직 행동에 옮길 적절한 상황이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적절한 상황이 오면 언제든지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직장 상사의 경우라면 각종 호의를 베풀며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려고 별짓을 다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스토리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처음 시선 처리에서 실패합니다. 어느 나른한 봄날 오후,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바로 밧세바입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목욕하는 여인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빨리 옮기지 않았습니다. 시선을 즐겼습니다. 시선의 욕망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시선을 옮길 수 없습니다. 이미 욕망의 덫에 빠졌습니다. 다윗이 있는 곳은 왕실의 옥상입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에 권력이 작동되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바라보는 대상을 사유화하려고 합니다. 권력과 탐욕이 연결되면 경계선은 허물어집니다. 결국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습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7계명,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어깁니다. 선을 한 번 넘으면 또 다른 선을 넘는 것은 쉽습니다. 밧세바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신인 우리아를 죽이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한순간의 시선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죄의 속도는 굉장히 빠릅니다. 속전속결입니다. 정욕의 특징은 조급합니다. 기다릴 줄 모릅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기다립니다. 야곱은 한 여인을 7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욕은 단 2초도 기다리지 못합니다. 어느 날 한순간, 단 한 번의 시선에 의해 역사의 변수가 일어났습니다. 죄의 힘은 무섭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왕이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 떨던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로 한 방에 넘어뜨렸습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닐 때도 그는 영성을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되어서도 그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일순간의 성적 탐욕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한순간의 시선 처리의 실패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오늘날, 매우 자극적인 문화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유혹이 넘칩니다. 항상 무엇을 볼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보는 것은 자유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시선에서 시작하여 생각과 감정까지 점령하고 마침내 모든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보는 것들은 우리의 영혼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 정도가 아닙니다. 사망의 길로 몰아갑니다. 오늘날은 성적 어필을 하는 문화입니다. 자신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드러냅니다. 문제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성의 오용입니다. 성을 단순히 쾌락의 도구로만 여기는 문화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은 오직 결혼 관계 안에서만 허락되었습니다. 본능적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 안에서 관계적 선물입니다. 결혼 관계 안에서의 성을 무시하면 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성을 단순히 사생활 혹은 취향 문제로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지켜져야 할 제도 안에서의 성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적 타락은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일입니다. 창조 질서를 파괴하면 개인은 물론 세상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불행해집니다. 예수님은 매우 과격한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29-30절을 보십시오. 교회사를 보면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초대 교회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입니다. 그는 성적 욕망을 이기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절단했습니다. 그 외에도 수 세기 동안 이 말씀에 따라 죄를 피하고자 신체를 절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신체가 남아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신체를 제거해도 마음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일종의 과장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신의 영혼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충격적인 어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성적 문제를 신체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눈으로 죄를 짓는다고 눈을 빼버리는 것이 답이 아닙니다. 눈을 빼고 발을 자르는 마음으로 강력한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끊어버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의 뿌리는 깊습니다. 죄에 대한 처리는 그것 이상으로 단호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육체의 죄를 제거하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합니다. 대가 지불을 해야 합니다. 고통이 수반됩니다. 중독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금단 현상이 있습니다. 대충, 적당한 마음으로 이겨낼 수 없습니다. 뼈를 깎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죄를 짓게 하는 통로를 과감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일은 성적 유혹 앞에서 필요한 태도입니다. 오늘날은 문화적으로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고화질로 만들어진 영상물들은 시선을 압도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한순간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음란한 콘텐츠들, 수위 높은 드라마와 영화들, 셀 수 없이 많은 동영상들이 만들어져 배포되고 있습니다. 음란으로 도배를 한 세상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바벨론의 음녀는 물 위에 앉아 있습니다. 모든 세상의 문화의 한가운데는 음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밤 문화가 너무 발달 되어 있습니다. 성적으로 매우 개방된 문화입니다. 성적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훨씬 더 어려워졌습니다. 우리는 만만치 않은 싸움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가정이 깨어져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정상적인 가정이 많지 않습니다. 불륜으로 가정이 깨어지는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결혼의 가치가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습니다. 성적 일탈이 엄청납니다. 이런 심각한 문화는 교회 안에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이런 성적 유혹 앞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실제적인 길은 죄를 짓게 하는 환경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청년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매우 계획적이었고 노골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여기도 권력의 관계입니다. 주인의 아내가 유혹했습니다. 위력에 의한 성추행입니다.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창39:12). 요셉은 도망을 쳤습니다.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단호하고 신속해야 합니다. 감정의 불이 붙으면 이성의 작동이 고장 납니다. 성적인 유혹 앞에 인간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 여기 피하라는 동사는 일시적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입니다. 목숨을 걸고 도망하라는 뜻입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2).
유혹하는 현장에서 유혹과 싸우면 집니다. “주여 나로 이기게 하소서” 유혹의 자리에 있으면서 도와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피하는 것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한 박자라도 늦으면 안 됩니다. 왜 죽도록 도망을 쳐야 합니까? 성적 부도덕으로 인한 끔찍함 때문입니다. 성적인 죄에 대한 혐오스러움 때문입니다. 성적 유혹 앞에 철저해야 합니다.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 내 눈과 언약을 맺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을 지키지 않으면 순결한 삶은 어렵습니다. 상상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이 있을 때 상상이 시작됩니다. 오늘날 볼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치 마귀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미디어를 마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미리 결단해야 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기준을 정해야 합니다. 경계선을 정하고 원칙을 세우고 살라는 것입니다. 반복적으로 영상물을 접하면 어떻게 될까요?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집니다. 죄에 빠져드는 수순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충격적이어서 가슴이 벌렁벌렁 뜁니다.
그러나 계속 노출되면 둔감해집니다. 그러면 조금씩 수위를 높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태연하게 즐기게 됩니다. 나중에는 감각이 무뎌집니다. 탐닉에 빠져들다 보면 결국 중독에 빠집니다. 중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중독의 단계에 가면,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길이 없는 상태입니다. 뇌 구조가 망가져 버립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인격이 망가지고 인생 전체가 망가집니다. 작은 유혹에서 시작합니다. 처음은 가볍게 시작합니다. 문제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순간의 즐거움이 나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즐거움은 파멸로 이끕니다. 내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단계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간음은 생각보다 파괴력이 큽니다. 사람들은 그 파괴력을 잘 간과합니다. 단순히 두 사람의 관계의 일탈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성적인 죄는 독특합니다. 영적으로 무너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가정을 깨뜨립니다. 주변 가족들은 물론 공동체를 깨뜨립니다. 처음부터 눈길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발길을 끊어야 합니다. 마음을 내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 자체와 싸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유혹의 강도가 높아져 가는 세상입니다.
성적인 죄에 있어서 누구도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언제든지 죄를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안 넘어져” “나는 유혹에 넘어가 본 적이 없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성적 유혹은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도 넘어집니다. 한때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다한 사람도 넘어집니다. 성령충만한 상태에 있다고 유혹에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죄와 싸워 이겼다고 오늘 이긴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는 건물 A동에서 B동까지 20m도 안 되는 거리인데 교회 스탭들 안에서 이성이라면 비가 와도 단둘이는 우산을 씌워주지 말도록 내부 규정을 세워 놓았습니다. 우리 교회도 교역자들은 어떤 이유로든 이성 간에 단둘이 자리를 함께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남녀 관계는 알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사역을 하는 가운데 성도들끼리라도 남녀 관계는 조심해야 합니다. 엄격할 정도로 단호해야 합니다. 사단은 유혹의 틈을 노립니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안 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5:3).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는 것들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적으로 채워야 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론적 결핍이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방식으로 결핍을 채우려고 합니다. 성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가장 흔히 이용하는 대체품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생겨난 빈 공간은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육체적 욕망을 추구할수록 목이 더 마릅니다. 어거스틴의 말은 언제나 큰 울림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참된 안식이 없나이다.” 우리의 마음에 빈 공간이 있으면 안 됩니다. 성적인 문제는 억제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참된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릴 때 거짓 기쁨과 만족은 더 이상 유혹이 될 수 없습니다. 순결한 삶은 단순히 안 보고 피하는 것만으로 지켜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순결을 지켜낼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죄에 매우 취약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그분에게까지 가야 합니다. 성적 욕구를 억압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세상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공허해집니다. 무기력해지고,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결국 중독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한 해결자가 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음욕과 싸워 못 이깁니다. 하나님께 푹 빠지십시오. 하나님에게 중독되십시오. 하나님에게 매이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신성한 혼인을 지켜가야 합니다. 부부 관계 안에서의 만족이 답입니다. 분명한 것은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성은 반드시 부부 관계 안에서만 축복이 됩니다. 부부 관계 안에서만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도록 디자인하셨습니다. 성이란 육체만이 아니라 친밀함 속에서 전인격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이기적으로, 폭력적인 관계로는 만족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욕만으로는 건강한 관계가 될 수 없고,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문화는 우리를 속입니다. 부도덕한 관계를 매력적으로, 낭만적인 것으로 묘사합니다. 진짜 사랑을 빼앗아 가 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사랑을 찾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을 소비의 개념으로 여기는 세상의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결혼 관계 안에서의 헌신의 개념을 가지고 성을 대해야 합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보다 상대의 만족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결혼 이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이전의 성관계는 결혼의 신성함과 결혼의 기쁨을 망가뜨립니다. 순간의 만족이 평생의 후회와 자책감의 요인이 됩니다. 순결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순결은 내 인생에 가장 사랑하는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선물이어야 합니다. 살인과 간음은 모두 뒤틀린 관계들의 결과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거짓 사랑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답입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음란의 죄는 육체적인 문제만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느슨해지면 육체의 힘이 작동됩니다. 우리는 일평생 계속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나를 죽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성화하지 않으면 계속 죄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습성, 뿌리 깊은 본성입니다. 육신의 행실을 죽이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죄와 싸우면 백발백중 집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의 영입니다.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살도록 도우시는 영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더 이상 죄 짓는 것이 즐거워지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3장 5-6절을 보십시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음란, 부정, 사욕, 정욕과 탐심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 사람이나 물건을 탐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육신의 소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일 외에는 다른 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만약 실수를 했다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숨기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의지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에 피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마음을 주십니다.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죄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하고, 항상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충동이 올 때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답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가정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가정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습니다. 돈과 성공, 물질이 우선시되어 있습니다. 돈은 벌었는데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기초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릇된 성 개념이 세상을 흔들고 있습니다. 결혼 관계를 깨뜨립니다. 우리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혹이 찾아올 때 그 유혹을 지켜줄 울타리가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유혹을 막을 울타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음란한 세상과 전쟁 중입니다. 음란한 문화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죽을 각오로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눈을 지켜야 합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단해야 합니다. 유혹의 자리를 단호하게 피해야 합니다. 안 좋은 영상물에서 눈을 당장 떼야 합니다. 엄격하게 자체 검열을 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고 욕망을 영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대응하면 집니다.
만약 실패했다면, 회개하고 빠르게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우리의 내면에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주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는 음욕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원흉이라고 했습니다. 음욕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하고 음란한 시대 속에 순결하고 신실한 백성들을 찾으십니다. 매일의 삶에서 작은 승리를 맛보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내는 구별된 백성으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