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예배 순서들,어떤 의미를 띠는가 이 글은 A Better Way(Baker, 2002)의 “What should Our Service Look Like”(pp. 141∼162)로 BAKER의 허락을 받아 번역·게재합니다. copyright ⓒ 2002 BAKER, Used by permission. ‘예배 의식’(liturgy)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이 단어를 성령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나 무미건조한 기계적 절차로 보는 이들도 있고, 형식적인 예배 의식을 강조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필자가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들은, 대체적으로 형식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예배 시의 행동이 즉흥적일수록 우리 자신이 보다 진실해지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예배 형식은 있었다. 일어서고 앉아야 할 때를 알고 있었고 다음 순서가 무엇인지도 예기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런 것들조차도 결국은 일정한 형식으로 예견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이 된다. 예배형식에 어떤 독특성이 있든지 모든 교파들은 모종의 예배 의식을 가지고 있다. ‘섬김, 봉사’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한 이 예배의식(liturgy)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의 회집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의 예배는 다른 어떤 대상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되며 예배의 구성 요소는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에 지나쳐서도, 모자라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주연 배우일 뿐만 아니라 감독이자 각본 작가이시므로 예배의 규범은 우리의 기술이나 창조성이 아닌 하나님의 기술과 창조성에서 나와야 한다. 이런 논의 가운데 나타나는 중요한 실제적 이슈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예배가 얼마만큼 전통(고대의 전통이든 최근의 전통이든)에 얽매이고 있느냐는 것이다. 상황에 좌우되는 부수적 요소들도 있지만(예컨대, 예배 요소들의 순서, 예배 시간, 매주 성찬 시행 여부, 성직자의 예복 착용 여부), 하나님께서 예배에 관해 명령하신 분명하게 요구되는 요소들도 있다. 우리가 어느 하나의 예배의식만을 이것이야말로 참 예배의 유일한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예배 규정에 더욱 충실한 보다 나은 예배의식은 분명히 있다. 요는 우리가 예배의식에서 무엇을 행하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 두루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의 관습을 비평하며 무언가 지식을 가지고 예배라는 ‘언약갱신의식’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 의식 속에 무엇이 있는가 … 맨 먼저 언급할 사항은 예배의 구조와 내용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이 구조와 내용이 취향의 문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열방의 신들”과 달리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우리의 손에 맡기지 않으셨다. 주어진 일정한 상황에서 어느 스타일을 사용할 것인가에 관한 우리의 온갖 의문에 뚜렷한 흑백논리식 해답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배의식 스타일이 진열장 장식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예배 양식이 중립적인 게 아니라면 우리는 예배의 순서를 비롯해 예배 전체를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비기독교적 사상은 극단적인 초월성으로부터 극단적인 내재성 사이에서 진자처럼 왕복 운동을 한다. 그러나 존 프레임(John Frame)이 지적했듯이 기독교적 사고는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근본적으로 상반되는 개념들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되며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언약 수장(首長)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에 입각해 방향을 잡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월’하시지만 또한 자신을 낮추셔서 임마누엘로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으나 거기에는 하나님 자신이 설정하신 조건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의 하위 성경적(sub-biblical) 개념인 초월성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역시 하나의 하위 성경적 개념인 내재성을 지향할 것인가는 우리 손에 일임된 사안이 아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성전의 제사장으로서 여호와를 섬겼으나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죽음을 당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더욱 강렬한 초월성(의식적 성격이 보다 강한, 또 하나의 예배의식적 혁신)을 추구했을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 그들은 보다 강렬한 내재성(하나님을 그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듯한 예배 형식)을 원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그들의 마음은 순수했다. 그들은 대담하게도 ‘예배답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며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 방식을 부족한 것으로 보았다. 적어도 예배자의 마음이 바른 위치에 있는 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별로 신경 쓰시지 않을 사소한 사안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 전에 백성의 뜻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그들의 아버지 아론은 다시 한번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로마서 10장에 나타난 복음의 논리에 의하면, 죄인들은 자신들의 솜씨, 영리함, 상상력, 노력을 동원해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식대로 죄인들에게 자기 사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연약함에 적응하셨다. 우리가 말씀의 사역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적응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편에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라는 개념에 저항해야 한다. 성경을 사람들의 보통 언어로 읽고 노래하고 설교해야 한다는 것은 타당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람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싶다는 욕구에 입각해 촌극, 뮤지컬, 인형극 등을 도입한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의 사역을 통해 자신을 인간에게 아직 충분히 적응시키시지 않았다고 추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응은 충분히 이루어졌다. 가인으로부터 지금까지, 아니 아담과 하와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인간은 하나님을 자기 식대로 자기 조건으로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듯한 형식으로 예배하려고 애써왔다. 알다시피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배의 세목들을 일일이 규정하셨다. 하지만 혹시 참된 예배는 외형보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 신약성경의 해방된 부분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결코 아니다. 구약의 예배 대 신약의 예배(?) 우선, 성금요일에 성전의 휘장이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찢어졌을 때 일대 변환이 발생했다는 지적은 옳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르셨듯이 참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이제는 진정한 예배의 때가 도래했다. 참 예배는 지상적 장소에 매이지 않고 하늘의 시온과 직결된다. 동시에, 형식적인 예배와 비형식적인 가슴의 예배를 상호 대조하며 신구약 간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수님이 외적인 형식과 가식적 성결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들의 내적 부패성을 인식할 수 없었던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비판을 가하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 예배에 대한 신약적 비평이 아니었다. 사실 예수님의 이런 책망은 선지자들을 통한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꾸짖음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호 6:6). 게다가 예수님은 1세기 유대의 기도서(書)들에 의거해 형식적인 예배의식이 본질적으로 아버지와의 인격적 관계를 무효화한다고 보시지도 않았다. 예수님 자신도 길모퉁이에 서서 많은 말로 길게 기도하는 위선자들처럼 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다음, 그 유명한 기도의 형식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셨다(마 6:9∼13). 예수님은 형식 있는 기도를 버리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육을 입은 하나님으로서 기도 형식을 새로 도입하시기까지 하셨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장 42절에 나와 있듯이 초대교회 신자들도 함께 모여 가르침 받기와 성례와 “그 기도”(the prayers)에 전념하였다. 헬라어 본문에 정관사가 출현하는 경우에도 반(反)예배의식적 편향성을 지닌 영역본들에서는 종종 이 정관사가 포함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형식적인 기도문을 마술적 주문으로 간주하지 않고 훈련을 위한 조직으로 보셨다. 하나의 격자 틀처럼 이 기도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방식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방황하는 마음들의 길잡이가 됐다. 특정 형식이 있을 때 회중이 이를 통해 훈련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목사들과 예배 인도자들의 회중에 대한 지나친 재량권 행사가 통제된다. 미국의 분파주의는 그 지도자들의 특이한 카리스마와 개성 위에서 번영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모험가가 현장에 출현할 때처럼 예배 형식이 항상 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멋진 예배에는 멋진 설교자가 있고 지루한 예배에는 지루한 설교자가 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적극적 상상력이 발휘될 경우 그 저변에서는 우상숭배의 위험성이 부상한다. 내 안에 있는 작은 배우(thespian)는 생계를 위해 실험적인 예배 ‘체험’을 쉽사리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 경험의 특이성과 혁신적 명민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꽤 빠른 속도로 나이를 먹을 것이며 여러 세대를 지나면서 각 세대간의 예배는 유사성을 결여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규정한 단순한 예배에 대해서만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약성경의 신적 명령에 담긴 모형과 그림자를 넘어서서 우리 자신이 만든 모형과 그림자로 나아가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리스도께 이르지 못하고 스스로가 고안한 이미지들과 “예배 체험들”에 갇힐 것이다. 하지만 가변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의 날에 모일 것을 명하였지만 오전 11시에 모이라고 명하신 적이 없다. 교회의 예배는 상황에 따른 변수가 있을 것이다. 필수적인 요소도 없지 않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하는 것들도 있다. 전자를 우리는 통상 요소(필수적인 것)라 칭하고 후자를 부수적인 것(교회의 판단에 달린 것)이라 부른다. 헌금은 하나의 요소이지만 이를 어떻게 드릴 것인지는 부수적인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지금부터 새 언약의 예배에서 어떤 것을 성경적 예배 의식으로 혹은 예배 요소로 간주하는 게 합당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예배의 필수 요소들 하나님을 부름(Invocation) 공식적인 부름(invocation)의 사례는 성경에 풍부하다. 성경은 언약 헌장으로서, 그 안에 보다 작은 언약적 단위들을 담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종주국과 속국의 관계에서 속국의 왕(제후)이 외세의 위협을 받을 때 종주(宗主)의 이름을 부르는 바와 같은 정치적 행위였다. 조약문에 따라 맹주를 부르는 것은 화재 경보기를 누르는 것과 같았다. 속국의 왕이 맹주를 속이고 그의 등 뒤에서 다른 왕들과 비밀 조약을 맺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경의 언약적 구조 혹은 조약적 구조는 예배의 서두에도 분명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궁정에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신다. 맹주가 등단해 보좌에 앉으실 때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대가 설정되고 개막 행위가 수행된다. 부름의 방식은 다양하지만 흔히 시편의 한 구절이 낭독된다. 시편 124장 8절이 한 예이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하신 분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응답이 오고 이어서 언약 갱신 의식이 진행된다. 하나님의 환영(greeting) 이것은 회중의 부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성직자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두 팔을 들고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가지고 백성에게 복을 빈다. 성직자 자신이 무슨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라도 하듯, 하나님의 복을 백성에게 베풀어 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직무상 복을 빌 뿐이다. 성직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자로서 하나님이 무언가를 뚜렷이 말씀하실 경우 이를 대변하는 일만 행하게 된다. 내가 아는 교회들에서는 성직자가 일어선 회중에게 간단히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하나님의 환영을 받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자신의 맹세를 어기지 않고 성령의 권능으로 강림하여 우리 가운데 보좌를 취하고 우리를 세상과 육과 마귀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변한 점은 그 위대한 해방이 이미 도래하고 구속의 중보자가 드러나셨다는 사실이다. 요엘 2장 32절을 인용하며 바울은 선언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성경의 가장 위대한 증언들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높은 맹주, 어떤 위대한 제왕이 없다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자기 백성의 보호자이며 언약의 준수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불러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임재해 주시기를 빈다. 이 때 스가랴의 예언이 우리의 목전에서 성취된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할 것이라”(슥 13:9). 성직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권위로,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선의(善意)를 선포한다. 율법 낭독 어떤 언약이든 조약의 조항들과 조약의 발효에 대한 낭독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 하나님의 궁정에 모인 백성은 계명이 낭독되는 것을 들으며 자신들의 죄악상을 깨닫는다. 이 율법은 십계명 형태나 혹은 예수님의 계명 요약문 형식으로 낭독된다. 때로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5장 16∼26절이 낭독되기도 한다. 어떤 교회들은 십계명이나 예수님의 요약문 외에 다른 것의 사용을 꺼려하지만 여타의 아주 분명한 “율법” 구절들(산상수훈, 예수님의 “화 있을진저” 구절들, 선지서의 무수한 구절들)을 낭독하는 것도 매주 율법을 새롭게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십계명에서뿐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율법을 발견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율법의 낭독을 듣기 전 우리는 스스로를 개선이 가능한 선한 사람들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후에는 그 옛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 보여 주었던 바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모세에게 이르되‘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9). 성경 전체를 놓고 볼 때 율법의 낭독은 회개와 신앙, 가르침에 선행한다. 우리가 율법의 저주를 피해 예수님의 품으로 들어가면 율법의 부여자로서 우리를 대신해 그 율법을 완전히 준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부여하고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 우리가 회심할 때 이 모든 일이 일시에 명확하게, 또 영구적으로 일어나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평생의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매일 ‘또 다시’ 그리스도인이 되며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권능을 새로이 깨달음과 동시에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 회개와 신앙은 매일 갱신된다. 이 공적인 율법의 낭독이 오용된 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한 참된 자각과 우리가 율법 파기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도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하나님이 남은 자들을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고국으로 되돌아오게 하신 후 거행되었던 거대한 예배에서 우리는 율법의 공적 낭독이 예배의식상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뚜렷하게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아주 탁월한 본보기이다(느 8:2∼3, 5∼6). 레위인들은 “백성이 율법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8절). 이것은 오늘날의 설교에 상당하는 행위였다. 이 날은 절기일이요 큰 기쁨의 날이었지만 율법의 낭독은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을 몰고 왔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 지라.” 그러므로 에스라는 백성을 위로했다.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9절). 우리가 예배 시 통상적으로, 귀환한 포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듣고 그랬던 것처럼 울지는 않겠지만, 성령이 율법으로 (율법의 공적 낭독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한 설명을 통해) 우리의 심령에 다가오실 때 우리는 자기 죄악성을 새로이 자각할 것이다. 요(要)는 성령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기 본분을 아직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 아래 들어가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형벌이 임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죄의 고백과 사면의 선언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 아래 있다. 율법은 죽이고 복음은 살린다. 에스라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율법을 선포하는 이 장면에서도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고 그들에게 옷을 입혀 주신 이래 역사에서 줄곧 나타났던 그 변환, 심판에서 은혜로의 변환이 엿보인다(느 8:10). 이제 우리는 예배의 전환점에 이르렀다. 심판에서 은혜로 전환된 것이다. 이런 전환점이 법정의 공판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판사가 범죄자에게 유죄와 형량을 선고한 다음 그를 사면할 방안이 마련된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이것이 사면 이상의 어떤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악인들에게 전가함으로써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루터의 표현에 의하면 여기에 ‘위대한 교환’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는 그의 의를 입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공적으로 죄를 함께 고백하는 것은 우리에게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 외에 다른 출구가 없다는 사실에 관해 하나님의 견해에 동의하는 것이다(‘고백한다’는 말의 의미가 이것이다: 동의하다). 이 예배의 언약적 성격은 우리가 비록 매일 개별적으로 죄를 고백한다 하더라도 공동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소속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부각시켜 주는 요소이다. 우리는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인”(느 8:1)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 날 낮의 1/4은 율법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낮의 1/4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였다”(9:3). 이것이 성전 예배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것은 사실상 예수님 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회당 예배와 닮은꼴이 더 많았다. 우리는 이 예배를 귀감으로 삼을 수도 있다. 물론 하나님이 이런 예배를 명하신 듯,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만일 그렇게 하려면 우리도 그들의 일정표를 똑같이 지켜야 할 것이다!). 이 공적인 모임은 구원, 순종, 불순종, 심판, 구원의 사이클을 보여 준다. 이런 사이클은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던 시편에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신구약에서 발견되는 신앙적 삶에 관한 역사적, 교리적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사죄선언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공적인 선언이다. 우리가 느헤미야에서 엿보이는 패턴을 눈여겨본다면, 백성이 자신들의 악함을 고백하고 슬퍼할 때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에스라가 바로 이 일을 수행했다는 사실이 목격된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고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권위로 그들에게 말했다(느 8:10). 이것은 간음한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선언과 흡사하며(요 8:10∼12). 바울도 외치고 있는 바다(롬 8:31∼34). 많은 사람들의 귀에는 이 사죄선언이라는 말이 사제주의적인(성직자에게 신적인 권한을 부여함) 용어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씀 사역의 중요한 요소이다. 성직자에게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고유한 힘이 없다. 이 사죄의 권한은 전적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소유하신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율법과 복음을 선포하며 말씀의 사역으로 하늘의 문을 열고 닫게 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이 권한을 남용하고 백성을 섬기는 대신 전제를 일삼았던 중세 교회와 달리 종교개혁자들은 마태복음 16장의 권한이 사제들의 “내부자 거래”를 통해 주어지는 권위가 아니라 말씀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는 봉사라고 보았다. 이 사역은 흥미진진할 때도 많지만 동시에 이것은 성직자가 휘두르는 양날 가진 검이기도 하다. 이 사역은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기쁨이자 짐이다. 확실히 우리는 죄에 대해 경건한 슬픔을 토로하며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행실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가 사람들이 갖다 붙이는 이런 조건들에 달려 있다면 우리에게 그것만큼 비참하고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칼빈은 회개에 대한 오해가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회개가 죄 용서의 원인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이런 죄의 고백은 특별한 주간에 행하는 부속물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고백은 교회에서 통상적으로 늘 있어야 한다. 목회 기도 칼빈이 말했듯이, 이런 공적 죄 고백과 사죄 선언 후에는 기도의 길이 열린다. 목회 기도에서 성직자는 세계 곳곳의 교회와 세상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다음으로 자신의 양무리를 위해 기도한다. 필자는 다시 느헤미야서에 호소하고 싶다. 모세처럼 느헤미야는 진노하신 하나님과 악한 백성 사이에 가로막고 서서 백성을 위해 기도한다(느 1:5∼6, 10∼11) 목회자의 역할은 중보 기도를 드리는 것이지 중재하는 게 아니다. 모든 신자와 함께 목회자들도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의 주님 앞에 간구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목회자는 저주와 복(율법과 복음)을 선포할 때 교인들 앞에서 하나님을 대리하듯이, 또한 교인들의 요청에 따라 통일된 목소리를 발하도록 부름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교인들을 대리한다. 세상의 요망사항과 정부 지도자들, 보편 교회를 위해서는 물론 특정 교회의 요망사항을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는 이 공적 기도를 통해 개인 기도에서 흔히 간과하기 쉬운 것을 배우게 된다. 즉 우리 자신과 자기 가족의 관심사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한 것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딤전 2:1∼2). 말씀 선포 은혜의 최고 수단은 선포되는 말씀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설교는 인자가 죽이고 살리는 양날 선 검을 휘두르며 죽은 뼈의 골짜기에 생기를 전파하시는 수단이다. 말씀 사역의 유효 원인은 성령님이시다. 그러나 말씀 사역은 설교를 통해 수행된다. 그때문에 역사적 관습에 따라 설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는 부름과 함께 시작되어 ‘아멘’으로 끝난다.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때로 우리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유효화 하기 위한 기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혹자들은 설교를 단순한 고찰(좀 천박하게 표현하자면 자료 처리)의 기회로 간주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설교를 결단의 순간으로 본다. 개중에는 설교를 감정적 체험의 촉진제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지성이나 의지 혹은 감성을 주권자로 만든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영광으로 바꾸어 놓는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말씀은 하늘 행위자(성령)와 지상 사자(설교자)의 손에 들려 율법으로 위협하고 복음으로 약속한다. 말씀 자체가 이 사역을 행한다. 말씀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말씀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말씀의 내용뿐만 아니라 말씀의 선포가 예배의 핵심이며, 엄격히 말해 은혜의 수단이 된다. 확실히 이 첨단 기술 시대에 기타 수다한 방법들이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는 데 있어서 보다 효과적인 형태로 보일 것이다. 드라마는 즐거움과 감동을 준다. 강력한 악기들에 맞추어 부르는 감정적인 합창은 의식과 분위기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으며 세련된 오디오 비디오 시스템은 기독교의 메시지가 (그게 무엇이든) 우리 시대에 딱 어울리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도 있다. 파이프 오르간에 수준 높은 성가대의 노래는 우리를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행해 우리의 구원을 유효화하는 것이 주요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슴속에 말씀을 심어 주도록 하는 것이 주된 목표라면 효과와 성공에 관한 기준이 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 말씀의 메시지뿐 아니라 설교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배의 핵심이어야 한다. 성만찬의 사역 집회의 정규적 요소인 “떡을 떼기”(행 2:46)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부활의 날에 드렸던 첫 예배 행위였다(눅 24:30∼31). 그러나 적절한 준비, 자기 반성, 참회 등에 대한 강조가 성만찬의 복음적 성격을 흐려놓는 경향이 생기면서 고대 교회의 일부 집단에서는 성만찬의 빈번한 시행이 인기를 잃게 되었다. 많은 신자들이 오점을 깨끗이 청산하고자 죽음의 침상에 이를 때까지 세례 받는 것을 연기했듯이 죄와 은혜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성찬을 합당치 못하게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기적인 성만찬 의식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서양에서는 중세 교회가 평신도들로부터 잔을 빼앗아 버렸다.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1년에 한두 번(성탄절이나 부활절) 밖에 성찬을 받지 못했다. 그것도 잔은 제외되고 빵 뿐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때까지 이 신성한 잔치는 실용적 의미를 대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종교개혁의 핵심에는 설교의 실제적 갱신과 아울러 이 성찬이 있었다. 이 둘은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수단이며 신적 드라마인 ‘예배’를 한 데 결집시키는 방편이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은 성찬을 받았다. 빵과 포도주 둘 다 받은 것이다. 그리고 매주 받았다. 적어도 계획은 그러했다. 제네바에서 칼빈은 사역 기간 내내 매주 성만찬을 실시하고자 노력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보수적인 시 의회는, 이런 잦은 실시가 그에 익숙하지 못한 공동체에는 지나치게 귀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매주 예배 의식 속에 성찬 예식 부분을 남겨 두었다. “이것이 우리가 빠뜨리고 있는 부분이다!”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존 낙스도 스코틀랜드에서 그처럼 빈도 높은 성만찬 실시를 원했으나 새로운 성직자들을 훈련시키고 파송하는 문제가 너무 무거운 부담이었으므로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담임목사를 모실 만큼 호강을 누리는 교회는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의 교회는 성만찬의 드문 실시에 만족해야 했다. 이 모든 상황은 보다 나은 미래를 기다리는 동안의 잠정적인 조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개혁파 전통의 교회들은 원칙적으로 빈번한 성만찬을 요구하면서도 빈도 낮은 실시에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가 성만찬 의식의 전 부분을 여기에서 낱낱이 규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성만찬이 통상적인 예배 의식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이 성만찬 실시 빈도의 이슈는 그리스도인들이 분쟁이나 분열을 일삼을 사안이 아니다. 이 문제는 깊은 주의를 요한다. 우리가 말씀 선포를 철회했을 때 벌어질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이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 올 것인지 추산된다면 우리의 광야길 순례 여행에서 양분의 제공에 성만찬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감사와 헌물 우리는 속죄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유일하고 완벽한 제사를 통해 죄 용서를 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오는 것은 ‘감사’의 제물이다. 이 예배 의식(儀式) 전체 구조가 하나의 극(劇)처럼 극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의식은 처음에 부름으로부터 시작해 죄의 고백으로 나아간다. 다음으로 사죄 선언과 중보 기도가 나온다. 이어서 말씀이 선포되고 성만찬을 통해 말씀이 가시화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우리의 마음 속에 회개와 신앙을 일으키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깊은 감사를 드리고 주의 이름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 말고 달리 어떤 응답을 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최후의 결정적인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축도 이 언약적 모임에서 내러티브 구조를 배제하면 축도는 마지막 인사말로 전락하기 쉽다(그런 일이 흔히 일어난다): “예배가 끝났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러나 이 축도를 통해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백성이 두 팔 든 목회자의 축도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은혜가 최후의 결정적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 축복 기도는 구약성경 곳곳에서 출현할 뿐만 아니라(주로 아론의 축도 형식으로) 신약성경 서신들의 종결부에도 자주 등장한다(이 편지들은 로마 제국 곳곳의 교회들에서 공적으로 읽히도록 하기 위한 사도적 설교였다). 언약의 백성은 감사의 마음을 가득 안고서 궁정을 떠난다. 하나님이 자기 편이시며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아래 서 있다는 확신을 얻기 때문이다. 맺는 말 예배 의식은 때와 장소의 부대 상황에 맞게 개량될 수도 있으나 예배의 요소들은 순수하게 보존돼야 한다. 필자는 여기에서 어떤 특정 예배 의식을 제안하지 않았다. 단지 바른 성경적 예배 내용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라고 믿는 바를 약술하고 그에 곁들여, 이 예배가 어떻게 진행될 수 있는가(진행되어야 하는가가 아니라)에 관해 다소간의 부수적 맥락을 제시했을 뿐이다. 이 모든 것과 관련해 우리가 정녕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가 신적인 드라마라는 사실이다. 성경의 역사 속에 펼쳐지는 구속의 드라마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이 예배를 통해 하나의 극으로 연출된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세계의 모든 열방에 복을 주시는 그들의 위대한 자손과 함께 식탁에 앉는다. 할례 받은 마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과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과 자리를 같이한다. 단 한번만이 아니라 매주, 매해, 매시대마다 우리는 이 드라마로 마음을 새로이 꾸민다. “지나가는 이 악한 시대”의 줄거리가 “장차 올 시대”에 굴복할 때까지 말이다. 여기에서 많은 자유가 있어야 하며 또 ‘고 교회’(high church) 방향에서든 ‘저 교회’(low church) 방향에서든 절충주의적 실험도 주의 깊게 검토되어야 한다. 다음 주일에도 모든 교회에서는 어떤 예배 의식이 진행될 것이다. 문제는 의도적인 깊은 생각과 이해에서 나올 것인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판에 박힌 대로 진행될 것인가 라는 점이다. 오늘날 예배와 예배 의식에 새로운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기쁨을 표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도들의 교회 성장 전략에서 용기를 얻어야 한다: “그 말 [베드로의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1∼47) 마이클 S. 호튼 ■ 미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 | 2002.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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