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애칭 1 (사 62:1-5)
1.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 시간 “성도의 애칭”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애칭(愛稱)이란 본 이름이 아니고 다정하게 부르는 다른 별칭을 가리킵니다. 가령 연인 간에, 부부간에, 자녀에게, 요즘은 유명 스타에 대한 팬들이 애칭을 지어주기도 합니다. 그만큼 친근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잠언에 “르무엘 왕”=‘하나님을 위하는 자’도 그 어머니가 불렀던 솔로몬의 애칭이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에는 “나의 누이, 나의 신부, 나의 비둘기, 나의 사랑” 등 애칭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링컨 어머니가 부른 링컨의 애칭은 “에이브”(아브라함)였다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애칭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애칭은 무엇일까요?
1. 성도의 애칭은 왕관입니다.
사62: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왕이 쓰는 관이니 성도를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이니 그렇게 존귀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성과 같은 존재입니다.
잠17:6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한 말씀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의 존재입니다. 바울도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빌4:1)이라고 불렀습니다. 사43:4-7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왕관일까요? 영적으로 보면 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다스릴 왕, 벧전2:9에 “왕 같은 제사장들이” 했고, 계3:21에는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5:10에도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관이라 하신 하신 것은 단순히 귀하고 사랑스럽다를 넘어,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단의 권세를 짓밟고 죄와 세상을 이기며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적 통치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만 가져도 하나님께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 드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뻐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하늘의 음성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변화산에서, 그리고 십자가를 앞두고 성경에 세 번이나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라면,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보답이요, 기쁨이요, 공경입니다.
우리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기쁨?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답게 커가고 자녀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 말씀을 해석하는 힌트가 1-2절에 있습니다. 의가 빛같이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날 때, 기드온의 횃불처럼 항아리에만 있지 않고 드러나듯 우리가 자녀답게 커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삭이 젖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설한 것처럼 우리가 믿음 안에서 장성해야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여서는 안 됩니다. 요삼1:4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한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같이 장성한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성도의 애칭은 헵시바입니다.
4절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헵시바란 ‘나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4절은 평행법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버림받은 자”는 헵시바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제는 버림받은 자가 아니요, 나의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버림받은 자"는 언약을 깨뜨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백성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림받은 아내처럼 표현하셨습니다.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 고멜과 같이 우리가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고멜입니다.
그러나 의가 빛 같이 나타나고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나면 주님만 사랑하게 됩니다. 그냥 영광스런 신부가 되는 것 아닙니다. 엡5:26-27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그만큼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혈로서 용납함을 누리고, 말씀과 성령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신부, 하나님의 기쁨, 예수님의 기쁨이 되는 비밀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말씀 보고 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시집 왔는데 아직도 세상에 미련 가지면 어찌 하나님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시45:10-11에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그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늘 은혜를 받으세요. 말씀으로 은혜 받고 성령으로 은혜 받고, 롬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정죄도 없고 해방까지, 이것이 보혈과 성령의 비밀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임종을 앞두고 희미한 목소리로 계속 "헵시바, 헵시바"만 되풀이했습니다. 가족들이 왜 그 말만 하십니까? 그러자 "젊었을 때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천국에 갈 날이 가까워지니 그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가 더 큰 관심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평안히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말로 아들 바보, 딸 바보라는 말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별명으로 부르신다면 그것만큼 더 귀한 것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입니다. 자녀의 모습을 보이고 신부의 모습을 보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관이라, 헵시바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횃불 같이 타오르는 구원의 은혜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