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쉼(마11:28-30)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진정한 쉼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아갑니다. 우리 주변의 상황들을 살펴보면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은 무척 바쁩니다. 고등학교에 가면 새벽 별을 보고 나가서 밤에 돌아오는 자녀들을 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바쁩니다. 그리고 아버지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경쟁사회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과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날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풍자했습니다. 어느 양지바른 산지에서 토끼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도토리 한 알이 토끼 콧잔등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놀라서 깬 토끼는 그때부터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옆에 있던 꿩도 놀라서 달리고, 덩달아서 노루도 달리고 늑대, 여우 등 많은 동물들이 달리는데 한참 달리다가 그중 한 동물이 묻기를 '우리가 왜 이렇게 달리지?'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성도된 우리에게 삶이 너무 분주해서 삶의 본질을 잊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쁜 것이 문제입니다. 매일 같이 분주하고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메말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동도 감격도 묵상도 느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분주함이 얼마나 영적인 요소를 죽이는지 아셔야 합니다. 기도 많이 하던 사람이 아이 낳고 바빠지면 기도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생활에서 빨리 추수르지 않으면 신앙의 열정이 식어져버립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가게로 식당으로 일터로 나가 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립니다.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잠자기 바쁩니다. 그렇게 몇 년을 살면 다 잊어버립니다. 그렇게 살며 주일날 예배에 와도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깊이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고 음미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유와 침착함과 마음이 한가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찾고 본분을 찾고 할 일을 찾고 하나님을 찾고 내 영혼을 매일 새롭게 하는 삶입니다. 이를 위해서 진정한 쉼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이처럼 피곤한 인생들에게 쉼이란 것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하나님을 양떼들을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쉬게 하시는 목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게도 하시지만, 또한 푹 쉬게 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유한한 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불면불휴의 노동이란 불가능합니다. 노동은 때로 창조의 기쁨이 용솟음쳐야 하는데, 불면불휴의 노동이란 바로 지옥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쉼, 휴식은 우리의 삶에서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피서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레저와 함께 여행과 휴식을 통하여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이려 합니다. 휴식은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고, 일의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휴가나 여행은 자칫 사람을 탈선 또는 나태하게 만들거나 피곤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평안과 휴식은 어디서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누리는 진정한 안식과 행복은 하나님께로 나갈 때 영생이 있고,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쉼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쉼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에게 초청을 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는 초청의 말씀을 듣고 쉼을 얻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올 때 인생의 고통이 해결됩니다.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이 세상이 줄 수 없고, 사람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쉼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쉼이 아닙니다. 돈, 취미나 오락, 잠, 삼림욕 같은 것이 주는 쉼이 아닙니다. 근원적이고 충분한 쉼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쉼이 진정한 쉼이라는 사실을 믿으며 이제부터 이 쉼을 늘 맛보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에게 진정한 쉼이 필요합니다.(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강한 것 같지만 내면은 참 약한 존재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자체 발사대를 만들어 인공위성 시험 발사를 계속 진행중에 있으니 우리 인간은 참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 수 백만, 수억 개의 정보를 조그만 칩에 저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두뇌는 신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거 1세기 전 만해도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던 나이를 80세까지 끌어올린 것만 봐도, 거의 하나님에 버금가는 능력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대단한 존재입니다.
반면에 인간에겐 나약하고 작은 모습도 있습니다. 주체하지 못하는 슬픔 앞에서 몸부림치는 모습. 무서운 고독 앞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 심각한 질병 앞에서 하얗게 질려 버리는 사람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지푸라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정말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나 가엾을 정도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표현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한 평생을 수고하면 살도록 징벌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18절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하여금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한 평생 수고를 해야만 그 수고의 댓가를 가지고 삶을 살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1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장수하고 살았던 모세라는 사람은 인생을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보통 평균 수명이 칠십에서 팔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빠르게 우리 인생이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이십대 삼십대들은 잘 실감하지 못하지만 오십대 육십대 칠십대 인생의 후반전을 살고 계시는 분들은 어떻게 이렇게 인생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 가는가 실감을 하실 것입니다.
과연 수고가 무엇일까요?
나를 매우 힘들게 하는 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버거운 삶, 가족 부양, 자녀 부양, 치매에 걸리신 노부모를 모시는 일, 그리고 성격이 맞지를 않아서 힘들게 살아가는 부부의 삶, 힘든 직장 생활, 인간관계, 질병, 시련, 나의 고쳐지지 않는 습관들, 이런 것들이 심히 나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을 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인생은 무거운짐을 지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18세기 영국이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다닐 때, 수없이 많은 배들을 띄웠습니다만, 그 중에는 적지 않은 많은 배들이 침몰되곤 했습니다. 배들이 자주 가라앉게 된 큰 이유는 짐을 너무 많이 싣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사무엘 프림솔(S. Plimsoll)이라는 사람이 이를 연구하고 조사하여 영국 국회에 한 개의 법안을 제출, 통과시켰습니다. 그 법의 이름이 적재 한계선(Load Line)이라는 법이었습니다. 일정한 짐을 실은 배가 일단 물 위에 띄워지면 그 배가 물에 닿는 부분에 선, 줄을 긋고, 그 이상은 절대로 초과해서 짐을 더 못싣게 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큰배를 보면 매 아래에 노란선, 하얀 선이 그어져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선을 프림솔이란 사람이 제안했다고 하여 프림솔 line이라고 합니다. 일단 이 선이 물에 닿으면 그 이상 짐을 실을 수 없습니다. 이 선은 생명선과 같습니다. 그 이상 짐을 실으면 배가 가라앉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조그만 풍랑이 일어도 쓰러지고 뒤집혀집니. 그래서 사람마다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합니다. 피곤한 영혼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며 살다가 어느 곳에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하지만 쉴만한 곳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밖에 드러내지 않지만 죄책과 정죄의 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과거에 잘하지 못한 정죄감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즉 꼭 했어야 만 했던 일을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죄책과 정죄감입니다. 예를 들면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잘해줄 걸. 내가 좀 더 도와줄 걸’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결과는 마음의 정죄감인 것입니다. 시편 38편 4절에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또한 세속의 타락의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해서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깨끗한 체하고 교육을 잘 받고 점잖고 훌륭한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지만 내부에는 부패한 탐욕과 욕심과 방탕의 정신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여기에서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방되기를 원해도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술주정뱅이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하면 그만 마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또 마십니다. 도박꾼도 늘 안 한다, 안 한다 하면서 또 도박합니다. 자기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우리는 심신의 질병의 짐을 지고 있습니다. 한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마음이나 몸에 병들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몸의 병도 무섭지만 마음의 병도 무섭습니다. 오늘날 시기와 분노, 질투, 탐욕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줍니까? 모든 사람들은 마음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이름모를 병들이 수없이 생겨서 우리는 육체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생활고의 짐이 있습니다. 요사이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길거리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직장에서 쫓겨나 손 털고 나왔습니다. 자식들은 학교에 다니고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은 저주를 받아서 아무리 잘살려고 노력해도 고통이 쌓이고 괴로움이 쌓이고 어려움이 쌓이는 것입니다. 이 짐을 누가 벗겨 주겠습니까?
또한 결국에는 죽음과 허무의 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바라며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보편적으로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늙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안 늙습니다. 그런데 몸이 늙어 갑니다. 마음은 튼튼한데 두 다리가 자꾸 떨립니다. 눈이 컴컴합니다. 어떻게 이 짐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무거운 짐들 때문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 타락의 짐, 질병의 짐, 가난의 짐, 죽음의 짐, 이러한 것들이 다 스트레스인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현대인들이 모두 보편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질병입니다. 스트레스는 우리의 지성을 마비시키고 감성을 혼란시키며 의지를 무력화해 우리 삶을 무너뜨립니다. 또한 마음의 슬픔과 불안을 증대시켜 고혈압, 심장마비, 위궤양, 불면증, 각종 암 등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기에 이와 같은 연약한 인생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생의 본질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 계십니다. ‘수고한다’는 말은 원문에 능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사서 고생하는 능동적인 고생을 의미합니다. ‘무거운 짐’은 원문에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피동적인 고생입니다. 원치 않는 환경 속에서 수난을 겪는 그런 고생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고난을 취하든지, 원치 않는 고난을 받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존재입니다.
이와같은 인생들에게 진정함 쉼이 필요한 것입니다.
2.내게로 오라로 초청하신 예수님이십니다.(28)
“다 내게로 오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초청의 종교입니다. 내게로 오라고 하는 초청에서부터 시작한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먼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을 초청하기도 하고 초청을 받기도 합니다. 특별히 초청을 받을 때 기분이 좋습니다. 기뻐하게 됩니다. 특별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초청하게 되면 마음이 더욱 설레게 됩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 더욱이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초청하게 될 때 우리는 기쁨으로 그 초청에 응답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초청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누구의 초대를 받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웃집이나 친구들의 초대를 받으면 편하게 방문하면 됩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초대를 받았다면 거기에 맞는 품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오늘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초대는 멋진 옷도 필요 없습니다. 믿음의 초대장만 있으면 세상 짐을 그대로 짊어지고 나아가면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이렇게 성전에 모였습니다. 왜 모였습니까? 우리의 발걸음이 그냥 인도되었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교회로 나오게 되었습니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청을 받고 이 시간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늘 드나들던 이사야마저도 하나님을 친히 뵙게 될 때 ‘와~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시는 그 만남의 초청을 받으면서 주의 성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찾아온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 맡아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가져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한두 명만 오라는 것도 아니고 부자만 오라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다 자기 짐을 지고 오라고 초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그 짐을 맡아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짐을 맡아주시고 우리를 쉬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이 삶의 스트레스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삶에 스트레스와 괴로운 짐을 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되 거저 초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먼저 죽어 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초청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지금도 하늘 위에 계셔서 쉬지 아니하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을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 서 무엇을 하든지 동행해 주시고 동거해 주시고 같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서 전부를 다 희생하셨습니다. 한없는 무한한 사랑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다 보답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내 목숨을 바쳤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 앞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막대한 사랑에 대한 보답 뿐입니다. 감히 무엇을 바쳤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가령 옛날 성자들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힘쓴 그 노력들을 우리 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애굽의 안토니(Anthony)같은 성자는 항상 일 주일 동안에 한끼만 먹고 잘 때에도 장대에 의지해 가지고 서 서 잤다고 합니다. 톨레미오(Ptolemy)같은 사람은 3년 동안이나 물 없는 사막에서 살면서 밤 이슬로 목을 조금씩 축여가면서 살 았다고 합니다.
자, 이렇게 무서운 노력을 해도 인간의 노력으로서는 죄인이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변화가 올 수는 없습니다 . 그저 다소간 수양(修養)은 될 수 있지만 죄인이 의인이 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알지도 못 했을 때에 그의 피를 지불해 주시고 생명까지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죄인이 의인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뿐이고 또 그의 주시는 안식을 공로 없이 누리는 것 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주시는 참 안식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 잘 받아 들여야 하는데 언제나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말씀을 지키고 그대로 사는 것, 이것이 그의 베푸시는 구원과 참 안식을 가장 잘 받는 자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하나 뿐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진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참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이 되는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주님 주시는 참 안식을 영원히 누리는 유일의 길입니다. 또 우리는 그를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것이 진정한 쉼이 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28)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쉼이란 무엇일까요? 그런 점에서 평안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우리의 상처에 대한 치유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기쁨과 감사, 죄로부터의 자유, 세상의 공포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쉼입니다. 이 쉼은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외딴 곳에 내가 들어가서 쉼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쉼은 철저하게 세상의 현실을 부딪쳐 나가면서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현실로부터 도망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맞닥뜨리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29-30절에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쉼을 약속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적극적으로 인생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쉼은 그냥 짐으로부터 도피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데서부터 쉼이 옵니다. 이는 약간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쉼이 어떻게 멍에의 무거운 것을 지는 것과 만날 수가 있는가? 기독교는 쉼을 준다고 하면서 더 큰 멍에를 갖다가 쌓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진정한 쉼, 그것은 진짜 멍에를 져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멍에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율법의 조항들을 바리새인들이 해석하면서 여러 가지 인간에게 억압적인 조항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안식일 법을 하나를 지키면 둘을 지키라고 하고 둘을 지키면 셋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그 많은 조항들을 쌓아 부으면서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무거운 짐을 주는 것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짐은 가벼운 것이다. 숨을 막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며, 너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것이다.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우리의 넘어진 것을 세우시는 분이라고 가르치면서 내 새로운 교훈, 내 새로운 멍에, 내 새로운 말씀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쉼을 얻고자 할 때 도피해서는 안됩니다. 인생은 어차피 짐을 지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짐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면 어디를 가셔야 하는지 아십니까? 그곳은 공동묘지입니다. 그 때 가면 우리의 짐은 다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내 심장이 뛰고, 내 손이 움직이고 내 발이 움직이는 이 순간에 짐을 지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진공상태에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짐을 벗어버리시겠습니까? 어머니의 짐을 다 내놓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의 짐을 묵묵히 지고 가야 합니다. 어머니의 짐을 지고 가면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남편의 짐을 버리겠습니까? 아내의 짐을 버리겠습니까? 아닙니다.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이 짐을 지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학생의 짐이 있습니다. 직장인의 짐이 있습니다. 목사에게는 목사의 짐이 있습니다. 이 짐을 붙잡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를 억압하는 멍에를 메고 세상의 교훈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인간을 자유케 하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 짐은 가볍다, 내 짐은 쉽다' 내가 니 대신 다 졌다. 예수님이 지신 멍에 마지막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지고 못에 박힘으로 너희는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이 너희 속에 주어진다는 그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기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자유와 평화와 해방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들은 교회 나오시면 배우셔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배우시고, 기도하시면서 배우시고, 찬양을 부르면서 배우셔야 합니다. 기독교는 배움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학자의 이야기를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를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배워요? '예수님'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친히 만나라는 것입니다. 부부같이 살듯이 예수님과 더불어 살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가?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가? 예수님 때문에 내가 죄를 용서 받았구나! 예수님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구나!하는 예수님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배우라'는 말은 현재 진행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많이 배웠다고 오늘부터 적게 배우야 되겠다고 하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너는 목사니까 이제 조금 배워라 그러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지금 계속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배워 나가도 다 배울 수 없는 신비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도우시며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 나의 연약함을 알고 그대로 받아 주시는 예수님을 힘써 배우면서 살 때 우리는 쉼을 누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사회는 한없이 바쁘고 분주합니다. 도무지 쉴 시간이 없습니다. 계속 쫓기고 불안합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쉬겠습니까? 예수 안에서 쉼을 얻읍시다.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참 안식이 있습니다. 영원히 쉬는 길이 있습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날마다 예수 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예수님을 배우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