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에 담긴 영원 (마태복음 13:47-50)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15|조회수33 목록 댓글 0

그물에 담긴 영원 (마태복음 13:47-50)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의 물비린내 나는 새벽에서 태어난 말씀입니다. 밤새 바람을 맞으며 물결 위에 몸을 맡긴 어부들, 손바닥에 밧줄 자국이 깊게 팬 사람들,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그물을 끌어올리며 오늘의 양식과 내일의 염려 사이에서 숨을 고르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의 비밀을 먼 궁전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손끝에 묻은 소금기, 노동의 땀, 시장의 소란, 밥상의 기다림, 생존의 떨림 속으로 하나님의 영원을 끌어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단순한 어업의 풍경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간의 바다 위에 던져진 하나님의 그물이며, 인류의 마지막 해변으로 끌려가는 모든 영혼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물은 헬라어로 σαγήνη(사게네)입니다. 이것은 작은 손그물이 아니라 바다 깊은 곳까지 넓게 펼쳐져 온갖 것을 끌어모으는 큰 그물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은밀하면서도 거대합니다. 조용히 던져졌으나 아무도 피할 수 없고, 부드럽게 펼쳐졌으나 역사의 깊은 물살을 거슬러 움직입니다. 사람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운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선택, 자기 성취, 자기 이름, 자기 계획이 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 아래 더 깊은 그물이 있음을 드러냅니다. 보이는 바다보다 깊고, 느껴지는 시간보다 넓고, 인간의 의지보다 오래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를 향하여 펼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사로잡힙니다. 손에 잡히는 것을 안전이라 부르고, 숫자로 셀 수 있는 것을 복이라 부르며,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을 영광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모두 시간의 물결 위에 잠시 반짝이는 빛입니다. 오늘의 자랑은 내일의 먼지가 되고, 오늘의 권세는 내일의 침묵이 되며, 오늘의 박수는 어느 날 장례식장의 낮은 탄식으로 바뀝니다. 인간은 가시적인 것만을 붙들다가 불가시의 영원을 놓치고, 시간의 장식품을 붙들다가 시간의 주인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그물 비유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냐. 네가 끝까지 남으리라 믿는 것은 무엇이냐.

주님은 그물이 각종 물고기를 모은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것만 모으는 그물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구별하여 거두는 그물이 아닙니다. 바다 속에 있는 온갖 것이 함께 들어옵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 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교회 안에도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고, 그물 안에도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가 함께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는 쉽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같은 예배당에 앉고,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성경을 펴고, 같은 신앙의 언어를 사용해도 마음의 중심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울고, 어떤 이는 자기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의 옷을 입습니다. 어떤 이는 은혜 앞에 무너지고, 어떤 이는 은혜를 자기 의로 장식합니다. 사람은 얼굴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역할을 보지만 하나님은 실체를 보십니다. 사람은 가면의 색을 보지만 하나님은 영혼의 방향을 보십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서도 무대 위의 배우처럼 살아갑니다. 경건이라는 옷을 걸치고, 봉사라는 이름표를 달고, 지식이라는 향수를 뿌리며, 사람들의 인정이라는 조명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출에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겉모습이 안전지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종교적 장식물이 아니시며, 십자가는 우리의 자존심을 고상하게 꾸며주는 상징물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자기 의가 벗겨지는 자리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괜찮은 사람, 조금 부족하지만 선한 사람, 남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말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를 속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정직한 심판이며, 우리를 심판하시되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사랑입니다.

그물이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물은 영원히 바다 속에 머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계속될 것 같지만, 시간도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습니다. 역사는 무한히 반복되는 바퀴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강물입니다. 사람은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 여기고, 세상은 영원히 이 모습으로 계속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물은 물가로 끌어올려질 것입니다. 숨겨졌던 것이 드러나고, 섞여 있던 것이 나뉘며, 미루어졌던 질문이 피할 수 없는 대답 앞에 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세상 끝이라고 하셨습니다. 헬라어 표현은 συντέλεια τοῦ αἰῶνος(쉰텔레이아 투 아이오노스), 곧 한 시대의 완성, 이 세상의 종결입니다. 세상 끝은 단순히 시간이 멈추는 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시간이 자기 의미를 돌려받는 순간입니다. 인간이 마음대로 해석하던 역사가 하나님의 해석 앞에 서는 순간입니다. 눈물이 눈물로만 끝나지 않고, 죄가 죄로만 지나가지 않으며, 은혜가 은혜로 밝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탄식, 마음 깊은 곳에서 흘린 회개의 눈물, 주님만 아시는 순종의 작은 몸짓까지 모두 하나님의 빛 아래 놓이는 날입니다.

그날에는 천사들이 나와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낸다고 하셨습니다. 의인은 헬라어로 δίκαιοι(디카이오이)입니다. 그러나 이 의로움은 인간이 자기 손으로 쌓아 올린 도덕의 탑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자기 완전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옷 입은 사람입니다.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사람은 결국 자기 무게에 눌려 무너집니다. 인간의 의는 아름다워 보여도 심판의 빛 앞에서는 얇은 안개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죄인을 덮는 왕의 옷입니다. 믿음은 그 옷을 붙드는 빈손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자기 이름을 변명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피하는 영혼의 방향 전환입니다.

악인은 헬라어로 πονηροί(포네로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흉악한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빛을 거절하며, 은혜의 초청을 듣고도 자기 왕국을 포기하지 않는 영혼의 어두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악은 때로 세련된 옷을 입습니다. 악은 때로 교양 있는 목소리를 냅니다. 악은 때로 종교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악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오래된 거짓말이 있습니다. 에덴에서 시작된 그 거짓말은 오늘도 인간의 마음에 속삭입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네가 네 삶의 주인이다. 네가 선과 악을 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삭임의 끝은 자유가 아니라 고독이며, 승리가 아니라 심판이며, 자기 실현이 아니라 자기 상실입니다.

주님은 악인을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귀에 무겁고, 마음에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사랑 없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너무 깊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경고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병의 실상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친절이 아니라 방치입니다. 다리가 끊어진 길 앞에서 위험을 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용이 아니라 살인적 침묵입니다. 예수께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은 죄인을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을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멸망의 길을 멸망이라 부르시는 것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거절한 인간이 자기 선택의 최종 결과를 맞이하는 엄숙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심판의 말씀을 들을 때 먼저 다른 사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저 사람은 나쁜 물고기일 것이다. 저 사람은 심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주님의 비유는 남을 분류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빛 앞에 세우는 말씀입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나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의를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공로와 체면과 상처와 분노를 왕좌에 앉혀두고 있지 않은가. 나는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구원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속했느냐입니다.

바다는 세상입니다. 그물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입니다. 물가로 끌어올림은 마지막 심판입니다. 좋은 물고기를 그릇에 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한 생명 안으로 받아들이시는 은혜입니다. 못된 것을 내버리는 것은 하나님 없는 삶의 최종적 폭로입니다. 이 모든 말씀의 중심에는 한 가지 진리가 흐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였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 은혜와 완성 사이, 부르심과 영화 사이, 십자가와 재림 사이를 걷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이 세상을 절대화하지도 않습니다. 오늘의 삶을 성실히 살지만, 오늘의 삶을 영원처럼 붙들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땅을 딛고 살지만, 하늘을 향해 숨 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비유는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오늘 회개할 수 있다는 은혜의 문을 열어줍니다. 마지막 날에 그물이 끌어올려질 것이기에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날의 구별이 확실하기에 오늘 은혜의 초청이 소중합니다. 심판이 없다면 십자가도 장식에 불과합니다. 죄가 심각하지 않다면 은혜도 얕아집니다. 그러나 죄가 깊고 심판이 참되기 때문에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이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이 함께 빛납니다. 그곳에서 심판이 은혜로 바뀌고, 정죄가 의롭다 하심으로 바뀌며, 죽음이 생명으로 바뀝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를 대충 넘기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심판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심판주께서 심판받는 자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시간의 주인이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고, 생명의 주인이 죽음의 그늘 아래 누우셨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의 수치 한복판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심판은 더 이상 멸망의 문이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담당된 죄의 종결을 확인하는 날이 됩니다. 믿는 자에게 마지막 날은 공포의 날만이 아니라, 눈물의 이유가 밝혀지고 은혜의 무게가 드러나는 날입니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오래된 그물을 손질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낡은 그물을 버리자고 했지만, 노인은 밤마다 작은 등불 아래 앉아 끊어진 매듭을 다시 묶었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낡은 그물에 마음을 쓰십니까?”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바다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지만, 그물은 준비되어 있어야 하네. 끊어진 한 코 때문에 큰 고기가 빠져나가고, 찢어진 한 부분 때문에 밤새 수고가 헛될 수 있지.” 그 말은 마을 사람들에게 오래 남았습니다. 어느 날 큰 폭풍 뒤에 배 하나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 노인이 손질해 둔 그물이 구조 작업에 쓰였습니다. 그물은 고기를 잡는 도구였지만 그날은 사람을 살리는 손이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밤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묶인 작은 매듭들이 어느 날 생명을 붙드는 힘이 된다는 것을.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늘의 회개, 오늘의 기도, 오늘의 말씀 순종, 오늘의 작은 용서, 오늘의 눈물 어린 예배는 사람들에게 크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작은 매듭들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묶으십니다. 세상은 큰 성공과 빠른 결과를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깊은 뿌리와 진실한 중심을 보십니다. 마지막 날에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화려했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묶여 있었느냐입니다. 돈에 묶였는가, 상처에 묶였는가, 자기 의에 묶였는가, 아니면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묶였는가. 세상의 모든 밧줄은 결국 끊어지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의 줄은 죽음 너머까지 우리를 붙듭니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시간의 가장 엄숙한 문지기입니다. 아무리 권세 있는 사람도 그 앞에서 신분증을 새로 발급받지 못하고, 아무리 부유한 사람도 그 문턱을 매수하지 못하며,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그 문을 돌아가는 비밀 통로를 찾지 못합니다. 죽음은 우리의 시간성이 끝나는 자리이며, 인간이 자기 힘으로 영원을 만들 수 없다는 냉혹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죽음에서 죽음 자체만을 만나지 않습니다. 믿는 자는 죽음 너머에서 생명의 주인을 만납니다.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죽음 너머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무한히 소망해야 할 것도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정죄의 대상으로만 부르지 않으시고, 은혜의 품으로 초청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방울의 영원은 시간의 바다보다 무겁습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영광을 모아도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은혜 한 방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죄인을 숨기십니다. 인간은 기념비를 세우려 하지만, 하나님은 무너진 영혼 안에 성령의 성전을 세우십니다. 인간은 자기 의의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오르려 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아래 무릎 꿇은 자를 은혜로 들어 올리십니다. 인간의 종교는 자주 높아지려는 욕망의 언어가 되지만, 복음은 낮아지신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인간의 도덕은 때로 자기 자랑의 거울이 되지만, 복음은 깨어진 거울 앞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 앞에서 교회는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이 이미 완성된 천국인 것처럼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그물 안에 들어온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배워야 합니다. 아직 구별의 최종 권한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라 증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최종적으로 판결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어차피 마지막에 하나님이 하시겠지” 하며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죄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회개를 기다리시는 자비입니다. 은혜는 방종의 허가증이 아니라 새 생명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숨기는 천이 아니라 죄를 죽이는 능력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로 여기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단순한 종교적 감정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죽은 영혼을 깨우시고, 닫힌 귀를 여시며,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는 더 이상 남의 죄만 보지 않습니다. 내 안의 교만을 보고, 내 안의 냉소를 보고, 내 안의 불신앙을 보고, 내 안의 숨겨진 우상을 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절망 속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예수께로 이끄십니다. 회개는 자기혐오로 끝나는 어두운 골방이 아니라,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입니다. 믿음은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무모한 도약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향해 팔을 벌리신 그리스도의 품 안으로 자신을 맡기는 은혜의 응답입니다.

믿음은 쉬우면서 어렵습니다. 어린아이도 예수를 믿을 수 있을 만큼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로 가득 찬 어른에게는 죽음만큼 어렵습니다. 믿음은 많이 배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지성의 성취가 아니며, 못 배운 사람에게만 필요한 위로도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 앞에 놓인 하나님의 길입니다. 유식한 사람도 빈손이어야 하고, 가난한 사람도 빈손이어야 하며, 설교하는 사람도 빈손이어야 하고, 설교를 듣는 사람도 빈손이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는 귀족석이 없습니다. 오래 믿은 사람의 특별 통로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의 문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은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을 통해 열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지금 바다처럼 흔들리고 있습니까. 나는 좋은 물고기일까, 못된 물고기일까, 나는 정말 구원받았을까, 나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두려움이 밀려옵니까. 그 두려움을 가지고 십자가 앞으로 오십시오. 자기 안에서 확신을 찾으려 하면 우리는 끝없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을 찾으면 흔들리는 우리보다 크신 주님을 보게 됩니다. 구원의 근거는 내 감정의 안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입니다. 내 눈물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피의 충분함입니다. 내 결심의 단단함이 아니라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믿음이란 내 손의 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붙드신 손이 누구의 손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좋은 물고기를 골라 담으시는 분으로만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버려져야 할 우리를 대신하여 버림받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풀무 불의 두려움 앞에 서야 할 자들이었으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 절규 속에서 심판의 어둠이 그분 위에 쏟아졌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버림받으심으로, 버림받아 마땅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심판의 비유 한가운데서 빛나는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말할 때 차갑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의 교리는 남을 위협하는 몽둥이가 아니라, 나를 먼저 울게 하는 진리입니다. 지옥을 말하는 입술은 눈물을 알아야 하고, 천국을 말하는 가슴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심판을 말씀하신 것은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경고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주님의 책망에는 구원의 갈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엄중한 말씀에는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떨리는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시간 안에 있습니다. 아직 그물이 완전히 끌어올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회개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아직 십자가의 피가 죄인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직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내일은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현장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도 우리보다 먼저 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고,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우리가 믿음의 손을 내밀기 전에 성령께서 우리의 굳은 손을 풀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지막을 아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끝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되 우상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가족을 더 깊이 사랑하되 가족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일을 성실히 하되 일을 자기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으며, 물질을 감사히 사용하되 물질에 영혼을 팔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을 믿는 사람은 오늘의 작은 선택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말 한마디, 용서 한 번, 정직한 손해, 보이지 않는 기도, 가난한 자를 향한 긍휼, 복음을 전하는 떨리는 목소리 속에 영원의 빛이 스며 있음을 압니다.

우리는 또한 기다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조급한 인간의 손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우리는 눈앞의 변화가 없으면 실망하지만, 성령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일하십니다. 오늘 내 자녀가 주님을 멀리하는 것 같아도 기도를 멈추지 마십시오. 오늘 내 배우자의 마음이 굳어 보일지라도 사랑의 증언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늘 내 영혼이 메마른 광야 같아도 말씀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그물은 하나님의 때에 끌어올려집니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다림은 무기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물의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지만, 동시에 교회의 사명을 일깨웁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구별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오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심판이 참되기 때문에 전도는 선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영원이 실재하기 때문에 예배는 취미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교회는 세상의 박수보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복음은 세상에 나란히 놓인 여러 의견 중 하나가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의견과 모든 자랑과 모든 체계를 하나님의 질문대 앞에 세우는 빛입니다. 그 빛 앞에서 인간은 벌거벗겨지지만, 그 빛 안에서 죄인은 새 옷을 입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그물은 이미 던져졌습니다. 우리는 그 신비로운 그물 안에서 살아갑니다. 세상은 여전히 떠들고, 죄는 여전히 유혹하며, 죽음은 여전히 그림자를 드리우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고,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셨고, 부활로 이미 새 창조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바다 한복판에 솟아오른 새벽입니다. 부활은 마지막 날의 빛이 지금 시간 속으로 새어 들어온 사건입니다. 부활 안에서 우리는 압니다. 죽음이 마지막 단어가 아니며, 죄가 최종 권세가 아니며, 심판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멸망의 끝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으로 드러날 것임을 압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눈물이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회개가 하늘에서 무시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믿음이 주님의 큰 은혜 밖에 있지 않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그리스도를 향한다면, 그 믿음은 영원의 문에 닿아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붙드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약한 날에도 주님의 은혜는 약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떨리는 날에도 주님의 중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바다처럼 뒤집히는 날에도 주님의 십자가는 땅과 하늘 사이에 변함없이 서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조용히 무릎 꿇기를 원합니다. 주님, 내가 붙든 헛된 것을 내려놓게 하소서. 보이는 것에 취하여 보이지 않는 영원을 잃지 않게 하소서. 종교의 옷을 입고도 그리스도 없이 살지 않게 하소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십자가 밖에 머물지 않게 하소서.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의를 붙들게 하소서. 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 안에 숨게 하소서. 마지막 날의 빛 앞에서 부끄러움이 아니라 은혜의 눈물로 서게 하소서.

그날에 천사들이 나와 갈라낼 것입니다. 그날에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에 사람의 박수는 침묵하고 하나님의 판결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그날은 버림의 날이 아니라 품에 안기는 날입니다. 오래 울었던 성도의 눈물이 닦이는 날입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고난의 어두운 뒷면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수놓아져 있었음을 보게 되는 날입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살았던 모든 가난한 영혼이 “은혜였구나, 처음도 은혜였고 마지막도 은혜였구나” 하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시 일어나십시오. 죄책감의 자리에서 일어나 십자가 앞으로 오십시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무기력의 자리에서 일어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상처의 자리에서 일어나 용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십시오. 두려움의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그물은 우리를 멸망으로 끌어가려는 운명의 밧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영원의 해변으로 이끄시는 은혜의 신비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삽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울며 회개합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다시 사랑합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마지막 날을 두려움만이 아니라 소망으로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오늘 그 말씀은 우리 영혼의 깊은 바다에 다시 던져집니다. 피하지 마십시오. 숨지 마십시오. 변명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리스도께 오십시오. 그분의 피 아래로 오십시오. 그분의 의 안으로 오십시오. 그분의 생명 안으로 오십시오. 우리가 붙들 은혜는 작아 보이나 영원보다 가볍지 않고, 우리가 바라볼 십자가는 초라해 보이나 온 우주보다 큽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모든 시간이 영원 앞에 무릎 꿇을 때, 우리는 오직 한 이름을 붙들고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의, 우리의 생명, 우리의 소망,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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