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 차려진 은혜의 식탁

작성자예수님사랑|작성시간26.06.08|조회수23 목록 댓글 0

광야에 차려진 은혜의 식탁 (눅9:12~17)


해가 기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빛은 아직 남아 있으나, 그 빛 속에는 서서히 저무는 하루의 그림자가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었고, 그분의 말씀은 그들의 가슴 속에 파문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병든 자는 고침을 받았고, 지친 자는 숨을 돌렸고, 상한 마음은 설명할 수 없는 위로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은 늘 그렇듯이, 은혜의 현장 한가운데서도 다시 고개를 듭니다. 배가 고파집니다. 날이 저뭅니다. 광야는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오래 머물 수 없는 장소입니다. 감동은 있었으나 빵은 없고, 은혜는 넘쳤으나 인간의 계산으로는 이제 끝이 보이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오늘 본문은 시작됩니다. 믿음은 늘 풍성한 창고에서 시험받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히려 빈 들판에서, 손에 잡히는 것이 거의 없을 때, 해가 기울고 길이 멀어질 때 시험받습니다.

누가복음 9장 12절은 참으로 인간적이고, 또 참으로 솔직합니다. 열두 사도가 예수께 나아와 말합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이는 우리가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매우 현실적입니다. 매우 상식적입니다. 목회적으로 보아도 무책임한 말이 아닙니다. 밤이 되기 전에 사람들을 흩어 보내는 것이 오히려 배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상식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계산이 언제나 믿음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의 분별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미리 차단하는 불신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광야가 먼저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양 같은 무리가 먼저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없는 것을 세었고, 예수님은 주어질 것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라져 가는 해를 보았고,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때를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군중을 부담으로 보았고, 예수님은 먹여야 할 영혼으로 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 마음이 찔려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문제를 사람보다 크게 보았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환경을 은혜보다 크게 보았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명의 자리를 계산으로 무너뜨렸습니까. 누군가의 눈물 앞에서, 누군가의 배고픔 앞에서, 누군가의 길 잃은 영혼 앞에서, 우리는 은근히 말합니다. “이제는 보내야 합니다. 더는 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이 없습니다. 여기는 빈 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은 언제나 넉넉한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빈 들에서 만나를 내리셨고, 메마른 반석에서 물을 내셨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마른 막대기에서 싹을 틔우셨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결핍의 장소가 아니라 계시의 장소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말을 들으신 후, 놀라운 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한마디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번개처럼 무겁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무능을 드러내는 거울이며, 동시에 그들을 은혜의 통로로 부르시는 부르심입니다. 여기서 “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δότε(도테) 입니다. 이것은 주다, 건네다, 내어놓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δίδωμι(디도미) 의 명령형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직접 할 테니 너희는 물러서 있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신비입니다. 주님은 홀로 일하실 수 있으시지만, 즐겨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전능하신 분이 연약한 자를 도구로 삼으십니다. 충만하신 분이 빈손 든 자를 불러, 당신의 풍성을 흘려보내게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즉시 현실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바로 여기서 인간의 비애가 드러납니다. “밖에 없으니.” 우리의 언어는 늘 부족을 노래합니다. 우리는 “있다”보다 “밖에 없다”를 더 많이 말합니다. 아직 주님 손에 들리기도 전에, 아직 축사되기도 전에, 아직 떼어지기도 전에, 우리는 미리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은 언제나 바로 거기서 시작됩니다. 주님의 손에 들리기 전의 오병이어는 초라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들린 오병이어는 광야를 덮는 식탁이 됩니다. 축복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손의 문제입니다. 얼마를 가졌는가보다 누구의 손에 들렸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깊은 구속사적 울림을 가집니다. 누가는 단지 한 끼 식사의 기적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옛 언약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살 수 없었고, 하늘이 열려야 살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본래 자급자족의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의존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오늘 시대는 자립을 찬양하고, 능력을 숭배하고, 자기 손의 힘을 과장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떡만으로 사는 존재도 아니고, 자기 힘으로만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공급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지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인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드러내는 표적입니다. 참 생명이 어디서 오는지를 드러내는 표적입니다. 광야에서 베푸시는 하나님, 부족한 인간을 먹이시는 하나님,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는 계시입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을 단지 선한 교사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크신 분으로 서 계십니다. 모세는 만나를 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를 중개한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만나의 실체이십니다. 요한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분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 떡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순한 자선의 장면이 아닙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식탁입니다. 이것은 광야에 세워진 하늘 왕국의 예고편입니다. 세상은 늘 말합니다. 배고픔은 피할 수 없고, 결핍은 숙명이며, 더 많이 가진 자만 살아남는다고.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 한복판에서 전혀 다른 질서를 보여 주십니다. 그 나라에서는 한 움큼의 떡도 축복되면 모두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나눌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중심이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본문에는 매우 중요한 목회적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무질서하게 두지 않으십니다.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십니다. 은혜는 무질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혼란과 방종이 아니라 거룩한 질서 가운데 흐릅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뜨거움만으로는 안 됩니다. 사랑만 외쳐도 안 됩니다. 은혜는 반드시 질서를 입고 흐릅니다. 오십 명씩 앉게 하신 주님은 단지 배급의 편의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목자처럼 돌보시는 분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시편 23편의 목자처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먹이시는 분, 에스겔이 예언했던 참 목자, 흩어진 양을 모아 먹이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광야 가운데 서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빈 들”이라는 표현은 우리 삶의 영적 형편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심령도 얼마나 자주 빈 들입니까. 겉으로는 웃고 있으나 속은 메말라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나 고독합니다. 무언가를 많이 소유했으나 만족은 없습니다. 바쁘게 살지만 영혼은 굶주려 있습니다. 지식은 많아졌으나 생명의 기쁨은 줄어들었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가슴은 마른 장작처럼 식어 있습니다. 회개는 해야 하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는 해야 하는데 하늘이 닫힌 듯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본문 앞에 서야 합니다. 여기가 빈 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리가, 곧 주님이 식탁을 차리시는 자리입니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은 은혜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내가 빈 들이라고, 내가 배고프다고, 내가 무너졌다고, 내가 가진 것이 오병이어뿐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비로소 은혜의 문 앞에 섭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축사하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εὐλόγησεν(율로게센) 입니다. 이는 복을 말하다, 축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적음을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적음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적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적음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세상은 적음을 조롱하지만, 예수님은 적음을 축복하십니다. 세상은 작은 것을 쓸모없다 여기지만, 주님은 작은 것을 받아 큰일의 재료로 삼으십니다. 세상은 숫자를 보고 가능성을 판단하지만, 주님은 순종을 보시고 기적을 여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신비를 미리 봅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이 흐름은 마지막 만찬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만찬은 십자가를 향해 흐릅니다. 예수님 자신이 떼어질 떡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장차 찢기실 그리스도의 몸을 예표하는 표적입니다. 우리를 먹이기 위해 그분이 먼저 깨어지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분이 먼저 버려지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 하늘의 떡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찢기셔야 했습니다. 이 본문을 읽으며 감탄만 하고 지나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광야에 앉은 오천 명은 결국 또다시 배고파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넉넉함을 찬양하는 본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증언하는 본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예수님 없이도 먹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까. 우리는 빵집은 찾으면서 생명의 떡은 찾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활의 안정은 구하면서 영혼의 구원은 미룹니다. 우리는 몸의 피곤함에는 민감하면서 죄의 피곤함에는 둔감합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굶주림은 배의 굶주림이 아닙니다. 가장 무서운 빈곤은 경제적 빈곤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영혼의 빈곤, 그리스도 없는 내면의 빈 들, 이것이야말로 가장 처절한 결핍입니다. 사람은 세상의 음식으로는 살찌울 수 있어도, 죄책과 허무와 죽음의 공포를 씻어낼 수는 없습니다. 양심의 어둠은 쾌락으로 밝혀지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영혼은 세속의 성공으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은 끝내 자기 손으로 자신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인간 문제의 표면만 건드리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궁극적 문제를 향해 포인터처럼 가리키는 사건입니다. “너희는 나에게 와야 산다. 나는 너희를 먹이는 자일 뿐 아니라, 너희 자신을 위해 내 몸을 떼어 주는 생명의 떡이다.”

본문은 또한 교회의 사명을 정면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떡을 직접 군중의 손에 놓으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그렇게 쓰십니다. 교회는 떡의 출처가 아닙니다. 교회는 떡의 전달자입니다. 교회는 은혜를 제조하지 못합니다. 다만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 나누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때로 교회는 제자의 역할을 잊어버립니다. 떡이 자기 것인 줄 압니다. 혹은 너무 빈손이라며 움츠러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많음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손에서 받아 주님의 뜻대로 나누는 것입니다. 말씀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위로도 그렇고, 물질도 그렇고, 용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손에서 받은 것은 흘려보내야 합니다. 붙들고 움켜쥐면 썩지만, 나누면 살아납니다.

실제로 한국교회 역사 속에도 이런 은혜의 장면은 적지 않았습니다. 한 지방의 작은 교회에, 겨울이면 난방비가 부족하여 예배당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성도 수도 많지 않았고, 가진 것도 넉넉지 않았습니다. 어느 주일, 담임목사는 준비한 설교를 펴기 전에 문득 눈에 띈 한 노권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권사는 예배당 구석에서 낡은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는데, 얇은 옷깃 사이로 떨림이 보일 만큼 추위가 심했습니다. 목사는 설교를 미루고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듣읍시다. 우리 곁에 추운 이가 있는데, 우리가 따뜻함을 누릴 자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날 예배 후 성도들은 돌아가지 않고, 집집마다 있던 연탄과 쌀과 반찬과 헌 옷과 장작을 조금씩 가져왔습니다. 많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는 쌀 한 됫박, 누군가는 연탄 서너 장, 누군가는 낡았지만 깨끗이 빨아 놓은 겨울 외투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보기에는 초라한 오병이어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이자, 노권사 한 사람만이 아니라 마을의 가난한 이웃 여러 가정에까지 흘러 들어갔습니다. 며칠 뒤 그 노권사는 울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교회가 큰 줄 몰랐습니다. 나는 교회가 따뜻한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교회는 크지 않아도, 예수님 손에 들리면 이렇게 넓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교회입니다. 거창한 조건이 교회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적음이 세상을 살립니다.

오병이어는 작지만, 무관심은 더 작습니다. 물질이 적은 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은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한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주님께 드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 오병이어는 무엇이냐. 네게 있는 작은 시간은 어디 있느냐. 네게 있는 기도는 어디 있느냐. 네게 있는 눈물은 어디 있느냐. 네게 있는 재능은 어디 있느냐. 네게 있는 회개의 진심은 어디 있느냐. 네게 있는 작은 용서는 어디 있느냐. 네게 있는 작은 헌신은 어디 있느냐. 사람은 늘 큰일을 꿈꾸지만, 하나님은 작은 것을 통해 큰일을 여십니다. 순종은 늘 손안의 작은 것을 내어놓는 데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오병이어를 과소평가했습니까. 아니, 더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오병이어를 아예 내어놓지 않았습니까. 없어 보이기 싫어서, 부족해 보이기 싫어서, 실패할까 두려워서,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해서, 우리는 내 손의 작은 떡과 물고기를 옷자락 속에 숨겨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완전한 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내어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많이 가진 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손에 들리기를 원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인간의 과시에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깨진 심령과 순종하는 손 위에 임합니다.

본문은 놀랍게도 “모두 먹고 배불렀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배불렀다”라는 표현 속에는 단순히 허기가 달래졌다는 의미 이상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겨우 버티게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주님은 궁핍을 아슬아슬하게 메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넉넉하게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은혜는 늘 남습니다. 그래서 열두 바구니가 남습니다. 열두 바구니는 우연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징입니다. 열두 지파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충만, 열두 사도를 통해 세워질 교회를 향한 공급, 곧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충분함의 표시입니다. 주님은 모자라지 않게 하시는 분 정도가 아니라, 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보다 은혜가 더 크고, 우리의 상처보다 치유가 더 크고, 우리의 실패보다 회복이 더 크고, 우리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더 큽니다.

이 남은 조각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복음의 위로를 줍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너무 많이 망가졌습니다. 나는 너무 많이 죄지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은혜가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구경꾼 몇 명을 위한 장식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가정을 위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무너진 기도 자리를 위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메마른 심령을 위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겨우 몇 사람만 건지시고 힘이 빠지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다 먹이고도 남는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죄인은 가장 깊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가장 마른 심령은 가장 빨리 주님께 와야 합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일수록,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넉넉한지 알아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구속을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먹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자기 구원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전적 무능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넘치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떡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오신 참 떡으로 삽니다. 인간의 결핍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찬란히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도덕적 본보기 정도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나눔은 중요합니다. 헌신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중심은 “우리도 착하게 나누자”가 아닙니다. 본문의 중심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가 계신다”입니다. 그분 없이는 모두가 빈 들입니다. 그분 안에서는 광야도 잔칫집이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왜 주님은 굳이 광야에서 이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마을로 보내면 될 일을 왜 여기서 행하셨습니까. 이는 인간의 도움이 완전히 차단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자리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빈 들이라고 인정하는 자리에서는,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를 광야에 두십니다. 병상이라는 광야, 관계의 파탄이라는 광야, 경제적 곤궁이라는 광야,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는 광야,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의 광야. 우리는 그 광야를 저주하지만, 하나님은 거기서 하늘을 열어 보이십니다. 우리는 당장 마을로 내려가고 싶어 하지만, 주님은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십니다. 우리는 고난이 끝나야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하지만, 믿음은 고난이 끝난 뒤가 아니라 고난 한가운데서 자랍니다. 광야는 믿음을 죽이는 곳이 아니라, 참 믿음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혹시 지금 삶이 빈 들처럼 느껴지는 분이 있습니까. 자녀 문제로 속이 타는 분, 육신의 병으로 긴 밤을 지나는 분, 배우자와의 거리 때문에 가슴이 무너지는 분,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듯하여 실망한 분, 믿음은 있는데 기쁨은 사라진 분, 회개하고 싶은데 굳어 버린 눈물 때문에 더 괴로운 분이 있습니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말씀은 먼저 교회를 향한 명령이지만, 동시에 우리 각자의 마음에도 울립니다. 네가 누군가에게 빵이 되어라, 네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라, 네가 누군가에게 기도가 되어라, 네가 누군가에게 용서가 되어라, 네가 누군가에게 복음의 통로가 되어라.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들립니다. “네가 가진 부족함을 내게 가져오라. 네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 네 빈손을 내게 내어드리라. 그러면 내가 축복하고, 떼고, 흘려보내리라.”

이 본문에는 아주 깊은 눈물의 자리가 있습니다. 군중은 배가 고팠지만, 사실 그보다 더 깊은 배고픔을 지닌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 아래 신음했고,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 속에서 지쳤고, 인생의 무게에 눌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몸만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웃고 있으나 울고 있고, 말하고 있으나 무너지고 있으며, 살아 있으나 속은 텅 비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그런 영혼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진 무리를 보시면 불쌍히 여기십니다. 여기 “불쌍히 여기다”라는 복음서의 흐름 속 뜻은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창자가 뒤틀릴 만큼 깊은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멀리서 지켜보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비참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의 끝은 오병이어 자체가 아니라, 오병이어를 드신 예수님의 손이어야 합니다. 떡은 사라집니다. 물고기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광야 같은 심령에 찾아오십니다. 지금도 축복하십니다. 지금도 떼어 주십니다. 지금도 남게 하십니다. 우리의 손에 있는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손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오십시오. 회개하십시오. 계산을 내려놓으십시오. 두려움을 주님 발 앞에 놓으십시오. “밖에 없나이다”라는 탄식을 “주님께 드리나이다”라는 고백으로 바꾸십시오. 그 순간 광야는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메마른 심령에 풀이 돋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저물던 하루가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빈 들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곳에 머무르셨습니다. 십자가도 그런 곳이었습니다. 사람이 보기엔 가장 버려진 자리, 가장 저주받은 자리, 가장 캄캄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온 세상의 구원을 차려 놓으셨습니다.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 그것이 죄인을 위한 영원한 식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는 결국 십자가를 향해 열려 있는 본문입니다. 주님은 떡을 떼셨고, 결국 자신의 몸을 떼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무리를 먹이셨고, 결국 죄인을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남게 하셨고, 결국 영원한 생명을 남기셨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주님, 내가 떡 몇 조각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주님 없이도 괜찮은 척 살았습니다. 배부른 얼굴로 영혼의 굶주림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압니다. 나를 살리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주님뿐임을. 내 빈 들에 식탁을 차리실 분은 오직 주님뿐임을.”

이제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결단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 내 삶의 오병이어를 드리겠습니다. 내 적은 힘을 드리겠습니다. 내 늦은 회개를 드리겠습니다. 내 지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내 상처 입은 마음을 드리겠습니다. 내 부끄러운 과거도, 내 불안한 미래도, 내 눈물도, 내 연약함도, 내 빈손도 드리겠습니다. 주님 손에 들리면 충분합니다. 주님 손에 들리면 축복됩니다. 주님 손에 들리면 흘러갑니다. 주님 손에 들리면 광야도 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해 질 무렵의 인생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날이 저물어도, 빵이 적어도, 환경이 빈 들이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아직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서부터 하늘의 식탁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가정이 광야 같아도, 당신의 심령이 메말라도, 당신의 손에 든 것이 너무 적어 보여도, 주님의 손은 여전히 크고, 주님의 긍휼은 여전히 깊고, 주님의 복음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오늘도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가져오너라. 앉게 하라. 내가 축복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의 언어를 거두고 소망의 고백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광야 끝에서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빈손 끝에서 하늘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물 끝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 안에서, 가장 어두운 저녁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빈 들이었으나 주께서 식탁을 차리셨고, 부족하였으나 주께서 남게 하셨고, 죽을 영혼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얻었다고. 그러니 오늘도 희망하십시오.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은 결코 늦지 않으시며,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그 사랑은 지금도 우리의 광야를 천국의 문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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